• 10장 분열된 조국 (19)

     그렇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이다.
    제각기 자신의 입장과 명분만을 추구하는 바람에 한반도는 격랑속으로 빠져들었고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다.
    그 예로 백제를 보라. 찬란했던 문명, 일본과 중국 땅에까지 진출했던 그 웅대한 기상과 역사가 신라에 패망하면서 의자왕과 삼천궁녀, 황음무도의 기록만이 남았다. 패자(敗者)는 입이 없는 법이다.

    나는 다급했다. 이대로 두면 한반도는 공산화가 된다.
    이것을 김구도, 김규식도, 하지도 간과하고 있다.

    나는 그때 미국행을 결정하면서 이것으로 파란만장한 내 70 인생이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조선 말기, 그 암울했던 시기보다 해방 후의 그 당시가 더 처절했으며, 분열에 절망했고 각 지도자들의 반목에 치가 떨렸다.

    그때 내가 스스로 자위하던 단 한가지 명분이 있다. 그것은 내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을 누가 건국할 수 있겠는가 였다.

    당시의 북한은 이미 소련 위성국이었다. 철부지 김일성은 스탈린의 꼭두각시였다.
    북한은 북로선노동당, 즉 북로당이 통일했으며 남한도 박헌영에 의해 남조선노동당, 남로당이 가장 조직적 정당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보라.
    남한의 분열상을. 남한의 지도자 중 과연 누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겠는가? 
    남북한이 공산국가로 통일 된다면 김일성이 통일 대통령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나는 그렇게 교육 받았으며 40여년 전 한성감옥서에 갇혀있을 때부터 「독립정신」을 집필하면서 오늘에 대비했다. 애송이 김일성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 놓았다.

    내가 군정당국에 도미 신청을 한 것은 11월 하순이었다.
    그런데 신청을 한 다음날 사령부에서 보좌관 스튜어트 대령이 나를 찾아왔다. 스튜어트는 하지의 보좌관으로 군정청의 감독관까지 맡아서 권세가 막강했다.

    응접실의 소파에 마침 집에 와있던 윤병구까지 셋이 마주앉았을 때 스튜어트가 정중하게 물었다.
    「박사님, 미국에는 무슨 일로 가시려고 합니까?」

    예상하고 있었지만 내 목소리가 굳어졌다.
    「친지들을 만나러 가는 거요. 그런데 왜 그것을 묻소? 내 나라에서 입출국도 자유롭게 못한단 말이오?」
    「군정청에서 출국 비자를 발급 해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내 대신 윤병구가 물었다.
    「왜 그렇소?」

    기가 막힌 윤병구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건 일제 식민지 시절보다 더 심하군 그래. 일제 때도 어지간하면 출국을 시켰소. 대령.」
    「하지만 지금은 어렵겠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려고 제가 온 것입니다.」

    「그 이유를 들읍시다.」
    내가 정색하고 말했더니 스튜어트가 외면한 채 말했다.
    「첫째, 반미 성향의 인사는 출국할 수 없습니다.」

    나와 윤병구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때 스튜어트의 말이 이어졌다.
    「둘째 소련과의 우호적 관계에 해를 끼치는 인사도 출국할 수 없습니다. 박사님은 그 두가지 이유에 해당됩니다.」

    「그것이 하지 장군의 생각인가?」
    내가 물었더니 스튜어트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시인이나 같다.

    쓴웃음을 지은 내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고 나서 물었다.
    「해외로 전화도 못하게 하실거요?」
    「전화는 됩니다.」
    서두르듯 말한 스튜어트가 그때서야 나를 보았다.

    그때 내가 윤병구에게 영어로 말했다.
    「동생, 동경의 맥아더한테 전화를 걸어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