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장 분열된 조국 ⑦  

     「이보시오, 장군.」
    내가 부르자 하지(John R. Hedge) 중장이 몸을 돌렸다.

    미 제24군단장 하지는 전형적인 야전형 무장으로 전투에는 용명을 날렸으나 정치는 서툴렀다.

    한반도는 이제 전장(戰㙊)이 아니다. 수많은 정파와 협상하고 타협하며 강력한 리더십으로 이끌어 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뚜렷한 주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하지는 그 주관이 부족했다.

    신탁통치를 미리 귀띔 받았는지 하지는 인공은 물론 임정까지 억압했고 인정하지 않았으며 무시했다. 그것은 결국 공산세력의 확장을 의미했다.

    북한 땅이 소련 점령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Ivan Chistiakov) 대장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공산당 일당 체제로 굳혀가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이곳은 군정청사로 사용되는 조선호텔 별관 앞이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의 하지 앞으로 내가 다가가 섰다.

    「장군, 임시정부, 조선인민공화국을 모두 인정해주시오. 그러면 혼란이 가라앉습니다. 지금 당신은 점령군 사령관이 아니고 한국인도 패전국민이 아니지 않소? 무조건 부인하고 거부해서 나치 점령군처럼 행동하자는 것이오?」

    나치 점령군이란 표현은 뱉고 보니 조금 과한 것 같았지만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후회하지는 않았다. 하지의 얼굴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졌다. 옆에 서있던 두 대령도, 내 뒤의 스미스 중위도 얼어붙어 있다.

    그때 하지가 말했다.
    「박사, 말씀 삼가시오. 난 당신들의 분열과 모략에 벌써 지친 사람이오.」

    1945년 12월 초순 경이었으니 하지가 한국 땅을 밟은 지 석달이 되었다.

    다시 화가 난 내가 말했다.
    「석달 동안에 한민족을 평가 하신거요? 한민족 역사는 5천년, 수많은 왕조가 이어졌고 수많은 외침을 받았지만 이렇게 단일민족으로 살아남았소. 식민지에서 억압받던 한민족을 위로하고 고무시키지는 못할망정 겨우 석달 동안 겪고 나서 분열과 모략에 지쳤다니? 그것이 사령관으로써 할 말씀이오?」

    부하 장교들 앞에서 천하의 군단장, 사령관이 이런 수모를 당했으니 하지는 허리에 찬 권총이라도 뽑고 싶었으리라. 허나 나도 군인의 생리쯤은 안다. 눈을 치켜떴던 하지가 몸을 홱 돌리더니 참모들을 끌고 멀어져 간다.

    나는 길게 숨을 뱉았다. 아직 말은 다 하지 못했지만 자극을 주었으니 송진우를 통해서라도 반응이 올 것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이철산이 다가왔다. 이철산은 박헌영의 비서 중 하나로 자주 군정청에 들락이고 있었는데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영어가 유창하다.

    이철산이 굳어진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주석님, 감동했습니다.」

    아직 40대 중반의 이철산은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있다.
    「점령군 사령관을 그렇게 몰아붙인 민간인은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아, 저자는 점령군 사령관이 아니라 진주군 사령관이네. 그리고,」
    호흡을 가눈 내가 말을 이었다.
    「난 이제 인공의 주석이 아냐. 주석이라고 부르지 말게나.」
    「예, 박사님.」
    머리를 숙여 보인 이철산이 몸을 돌렸다.

    하지 중장은 1893년생으로 당시 53세가 되었으니 장년이다. 민간인으로부터 더구나 식민지 백성한테서 그런 수모는 처음 받았겠지만 나하고의 악연은 계속되었다.

    이제는 공개적이 아니라 비공개적으로, 게다가 상관에게 충성하는 부하들의 과잉 반응까지 겹쳐 악재가 계속 되었다.

    하지 대 이승만의 싸움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