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장 분열된 조국 ⑤ 

     그래도 나는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11월 2일, 조선공산당 대표이며 조선인민공화국의 실세인 박헌영이 돈암장을 방문했을 때 내가 물었다.

    「박비서장. 친일, 반일 가려내는 일보다 뭉쳐서 독립과 통일을 이루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제가 그 일 때문에 왔습니다. 주석님.」

    내가 인공 주석을 사양했는데도 박헌영이 버릇처럼 주석이라고 부른다.

    박헌영이 말을 이었다.
    「한민당과 일제 부역자들은 우파 정당의 그늘에 숨어 주석님을 앞세워서 시간을 벌고 있습니다. 만일 그대로 놔두고 독립을 추진한다면 그놈들은 어느새 권력을 쥐게 될 것이고 우리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이때 내 입에서 곧 미·소의 신탁통치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밖으로 터져 나올 뻔 했다.
    이런 분열과 갈등이 미·소의 신탁통치에 대한 명분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발설할 때가 아니다. 확실치 않은 정보를 내놓았다가 혼란만 가중시킬 수가 있다.

    나는 소리죽여 숨을 뱉았다. 박헌영은 1900년생이니 당시 나이 46세. 나보다 25세 연하였지만 대단한 경력의 소유자다.

    1919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 전신)을 졸업하고 1920년 상해로 망명, 1921년에 고려공산청년단 책임비서가 된다. 그리고는 그 해 5월에 고려공산당 이루크츠크파에 입당했으나 곧 일제에 체포되어 1924년에 출옥했다.

    그리고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했다가 동맹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해고되고 조선일보사에도 입사했다가 일제의 압력으로 퇴사했다.

    1928년에 소련으로 망명한 후에 모스크바의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했다.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동맹) 조선 문제 트로이카 위원이 되어서 활동 중에 상해에서 다시 체포되어 1934년에서 1939년까지 6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한 후에 서울에서 「경성 콤 그룹」을 설립,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는 1941년 검거를 피해 광주의 벽돌공장에서 인부로 일하다가 해방이 되자 상경하여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것이다.

    내가 박헌영에게 말했다.
    「친일분자는 반드시 색출해낼 것이오. 그러니 우선 독촉을 중심으로 통합된 대한민국의 힘을 만방에 과시합시다. 그러면 미·소도 우리를 만만하게 보지 못 할 것이오.」

    내 말에 열기가 띄워졌다.
    「이제 마지막 기회가 왔습니다. 러시아, 일본, 중국의 먹이가 되었던 한반도가 독립할 기회란 말이오. 미국을 이용해 러시아의 야욕을 막아야 하고 막을 수가 있습니다. 박 비서장.」

    그때 박헌영이 정색하고 나를 보았다.
    「주석님, 소련은 우리들의 은인입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해방을 맞은 것도 소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소?」
    「소련은 미국하고 다릅니다. 소련은 한반도에 야욕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길게 숨을 뱉았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했던 때가 1896년, 내 나이 21세 때였다. 물론 그때 박헌영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 땅에서 힘겨루기를 하던 때여서 나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

    박헌영은 그 당시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러시아 혁명 전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인가?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미국에서 30여년동안 외교 활동만을 했지만 미국을 믿지 않소. 그리고 의지하지도 않소. 그들은 힘이 없고 싸울 의사가 없는 국민은 무시하는 강대국일 뿐이오. 그러니 우리는...」

    덮어놓고 뭉쳐야 한다. 뭉쳐야 산다. 그리고 나서 청산하지.

    그렇게 말을 이으려다 나는 갑자기 목이 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