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 번 째 Lucy 이야기 ②  

     로스엔젤리스의 김동기씨가 전화를 해왔을 때는 오후 3시경이다.
    나는 저녁에 고지훈, 김태수와 만날 약속을 정하고 나서 방으로 돌아와 쉬는 중이었다.

    「루시양, 벌써 열흘이 되었군요.」
    인사를 마친 김동기가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에 1장씩 보내온 수기가 이제 9장까지 모아진 것이다.

    김동기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하루에 1장씩 보내드린 건 밤에 읽고 낮에는 한국 물정을 익혀 보시라는 의도였는데 루시양은 선생님을 잘 만난 것 같더군요.」

    고지훈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고지훈씨를 아세요?」
    「루시양의 교사가 된 후에 내가 조사를 시켰더니 자료가 나왔습니다.」

    김동기는 이곳에도 정보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하긴 Vip 택배로 하루 1장씩 나에게 수기를 보내는 것부터 심부름 하는 사람이 있어야 될테니까.

    김동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팩스로 보냈으니 곧 루시양에게 전달 될 것입니다.」
    「먼 곳에 계시지만 저를 다 보고 계시는 것 같아요.」
    「우린 다 인연으로 얽혀져 있습니다.」

    김동기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제가 그 말씀을 드리려고 전화를 한 겁니다.」
    「어떤 인연 말씀인가요?」
    「고지훈의 증조부 고복만은 일제시대에 한의사였는데 뱀한테 물려 다 죽은 어린 애를 살려냈지요. 그 사건은 신문에도 보도 되었는데 팩스로 복사해 보냈으니 읽어 보시지요.」
    「......」
    「그런데 그 살아난 아이가 누군지 아십니까?」
    「누구죠?」
    「김태수의 조부 김만기입니다. 이름까지 다 신문에 나왔습니다.」

    나는 숨을 참았다.
    나는 우연이란 없다고 믿어왔다. 인연이 얽히고 나서 우연처럼 만들어진다고 믿은 것이다.

    TV나 소설을 보면 주인공끼리 자꾸 길에서 만나거나 은밀한 부분을 들키는데 그것은 게으른 작가와 성급한 관중이 만들어낸 싸구려 야합일 뿐이다. 주인공끼리 길에서 만났을 때는 각각 그 길과 그 시간대에 피치 못할 인연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김만기와 고복만의 피치 못할 인연이 무엇인가가 궁금해졌다.

    그때 김동기가 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고복만과 김만기는 서울 용산에서 살았습니다. 주소를 보니 바로 같은 동네더군요.」

    그렇다면 고지훈과 김태수의 조상들은 같은 동네 사람으로 알고 지냈을 것이다.

    김동기가 웃음 띤 목소리로 말을 맺는다.
    「좁은 땅이니 몇 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다 얽혀져 있습니다. 그럼 루시양, 오늘은 이만 끊습니다.」

    나는 오늘 오후에 고지훈과 김태수가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전하려다가 참고 끊었다.

    통화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호텔 종업원이 팩스를 가져왔다.
    소파에 앉아 팩스를 펼쳐 본 내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김동기는 신문기사까지 복사해서 보낸 것이다.

    만일 고지훈의 증조부 고복만이 김태수의 조부 김만기를 살려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김태수는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만일, 이 증거를 보여도 김태수는 제 증조부 김재석이 이승만의 경호원인 것을 무시했듯이 조부와의 인연도 무시할 것인가?

    소파에 등을 붙인 내가 긴 숨을 뱉았다. 김태수라면 그럴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