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 지음 '마그리트와 시뮬라크르'
  • "우리는 우리 밖의 세상을 보지만,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 안에 있다" -르네 마그리트

  • ▲ 마그리트의 그림을 통해 현대 철학의 중요한 화두인 시뮬라크르 이론을 설명한 책 '마그리트와 시뮬라크르'가 출간됐다. ⓒ기파랑 제공
    ▲ 마그리트의 그림을 통해 현대 철학의 중요한 화두인 시뮬라크르 이론을 설명한 책 '마그리트와 시뮬라크르'가 출간됐다. ⓒ기파랑 제공

    액자 속 그림안에 또 하나의 그림을 즐겨 그려 넣던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갖고 있는 한계를 이질적 요소가 결합한 그림으로 표현하곤 했다.

    이파리가 된 새, 나무가 된 여인, 구두가 된 발, 낮과 밤 등 두개의 시간이 공존하는 거리 등 그의 그림에는 기이하면서도 무미건조한 분위기, 상식을 깨는 묘한 매력이 서려 있다. 

    시뮬라크르, 기호의 상징 등 현대 미학의 여러 주제를 설명할 때 등장하는 단골 화가, 그가 마그리트다.

    아마 마그리트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그림은 누구에게나 친숙할 것이다. 파이프, 검은 중절모를 쓴 남자, 가려진 얼굴, 일상적인 사물 속에 들어 간 푸른 하늘 등 이 모든 것에는 마그리트의 상표가 찍혀 있다. 또, 신문,잡지, TV 광고에 마그리트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인문학자인 책의 저자는 푸코가 1973년에 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왜 마그리트가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는지를 발견한다.

    르네상스 이래 서구 미술사를 지배해온 두가지 원칙은 첫째, 글과 그림이 다르다는 것, 둘째, 그림과 제목은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그림은 문자 요소와 조형 요소가 철저히 분리돼 있다. 마그리트는 유사의 파괴를 통해서가 아닌 사물과 철저하게 유사한 형태들을 비상식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우리의 허를 찌른다.

    마그리트의 그림이 오늘날에 대중의 감수성에 부합하는것에 대해 저자는 '시뮬라크르'라는 코드가 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즉, 현대는 시뮬라크르 시대라는 것이다.

    책은 오늘날의 실재는 실제적인 실재가 아니라 조작된 결과일 뿐이라 말한다.

    현대의 실제는 구체적 세계가 아닌 초월적 공간에서 모델들의 조합으로 합성된 생산물인 '하이퍼리얼'이라 설명한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은 지시 대상이 없는 겉껍데기만 존재하는 기의가 사라진 시대라는 것이다.

    저자는 얼마전 송판에 금이 가 말썽이된 문화광(門化光)이라고 한자로 쓰인 광화문 현판은 원래 오리지널도 아니고 당대의 역사를 반영한 것도 아니며 그냥 가짜의 시뮬라크르라 주장한다.

    책은 실체가 없이 인위적 가짜가 지배하는 시대에서 예술은 더이상 모방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특권적인, 최종적인, 꼭 있어야 하는 그런 것은 없다.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모호해진 현대 사회의 풍경을 진지하게 들여다 보고 싶다면 서점으로 달려가 파이프에 들어간 하늘이 그려진 책 '마그리트와 시뮬라크르'를 찾아보자.

    기파랑 펴냄, 256쪽, 1만 6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