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27)

     1945년 10월 16일, 마침내 나는 김포 비행장에 도착했다. 1912년 3월 26일, 38살 생일이 되던 날 조국을 떠나 33년만에 71세의 노인이 되어서 귀국한 것이다.

    무국적자로 떠돌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현실은 감개를 느낄 형편이 아니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나서 계단을 내려올 적에 비행장 땅바닥에 얼굴을 비벼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억제했다.

    나는 비밀 귀국을 한데다 미군용기에 탑승했기 때문에 규정상 미군복을 입었다. 마중나온 사람도 미군정사령부의 장교 몇 명 뿐이었다.

    숙소인 조선호텔로 달리는 차 안에서 연락장교 스미스 중위가 말했다.
    「박사님, 내일 오전에 사령관께서 방문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전에 기자회견이나 외부인사 접견은 삼가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잠자코 스미스를 보았다.

    남한에 진주한 하지 중장은 즉각 군정을 실시했는데 여운형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은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중국 정부의 조종을 받는다고 의심한 중경(重慶)의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미국무부의 입장이 전달 된 것이다.

    내가 스미스에게 물었다.
    「중위,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젊은 스미스의 푸른 눈동자가 한동안 내게 부딪쳤다가 떼어졌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외면한 채 말했던 스미스가 나에게 결례라고 생각했는지 덧붙였다.
    「좀 복잡합니다. 박사님.」

    「뭐가 말이오?」
    「한국 정당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는 머리를 저어보였다.
    「제 생각입니다만 한국에 지도자가 빨리 나서야 합니다.」
    나는 쓴웃음만 짓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조선 땅은 38선으로 나뉘어졌다.
    북쪽 땅은 이미 8월에 소련군이 진주한 후에 8월 24일, 평양에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가 사령부를 설치하였고 각 지방별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간접통치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9월 중순에 소련군 휘하에서 조선공작단 대장이던 34세의 김일성을 앞세워 전지역을 장악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김일성의 이름을 최근에야 들었다. 그리고 남한 땅은 좌우로 나뉘어 혼란 상태다. 그 중 가장 잘 짜여진 조직이 박헌영이 재건한 조선공산당이며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심인 것이다. 한반도는 가만 두면 소련령이 될 것이었다.

    하지의 배려로 나는 조선호텔 3층의 귀빈실에 투숙했는데 대여섯명이 모여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에다 큰 회의실도 하나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안내한 스미스 중위가 내 부관이 되었다.

    그날 밤, 내가 혼자 방에 남았을 때는 밤 10시 반쯤 되었다. 갈증이 났으므로 전화로 룸서비스를 불러 물을 시킨 내가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았다.

    1945년 10월 16일 밤이다. 창밖으로 소공동 거리가 보였고 오가는 행인도 남녀 구분이 된다. 33년만에 보는 서울 거리다. 조선호텔은 내가 조국을 떠난 후인 1914년에 건축 되었으니 나로써는 처음 보는 건물이다.

    그때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으므로 나는 다가가 문을 열었다. 종업원이 쟁반에 물병과 잔을 받쳐들고 서 있다가 나를 보더니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단정한 제복 차림의 젊은 청년이다.

    나는 잠자코 비켜서면서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왜 그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눈물이 그치지가 않길래 몸을 돌리고 서있었더니 문이 닫치는 소리가 났다.

    33년만에 귀국한 첫날 밤 일이어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