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여운형, 나를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최종편집 2011.02.11 23:12:51

9장 시련의 20년 (26)

 9월 초에 미국무부에서 여권을 발급해 주었지만 군으로부터 한국 입국 허가증을 받아야만 했다.
맥아더 사령부는 즉시 입국 허가증을 발급했는데 여권 소지자의 신분에 「주미 한국 고등판무관」이라고 기재했다.

내가 제출한 서류상 신분이 「한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이었으니 군당국의 표현이 맞다.

그러나 그것을 본 미국무부는 내 여권을 취소시켰다. 「주미 한국 고등판무관」은 군 당국의 행정 실수라는 것이다. 한국 임시정부를 인정 안해 온 터에 「주미 한국 고등판무관」은 있을 수가 없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꼬투리를 잡는 이유는 뻔했다.
내가 한국에 들어가야 미국 정책에 해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나는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로버트를 미롯한 미국인 친지들이 백방으로 뛰었지만 그렇게 9월 한달이 지나갔다. 그 한달이 나에게는 방랑자로 떠돌던 10년이나 같았다.

그 사이에 북한 땅을 점령한 소련군은 38선에 경계초소를 만들고 남한과의 교류를 막았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한 하지 중장이 남한의 모든 정당을 대표하고 있다는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지도자 여운형을 만난다.

건준은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지자 중도우파를 끌어들여 건국 작업을 했는데 좌파의 행태에 반발한 우파가 대거 탈퇴하여 좌파만의 조직이 되었다.

다급해진 여운형이 서둘러 1945년 9월 6일,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에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을 선포한 상태였다.

9월 말의 어느 날 오후였다. 워싱턴의 사무실에 있던 나에게 구미위원부 직원 송병일이 바쁘게 다가와 말했다.
「위원장님, 서울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놀란 내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당시에는 서울과의 직통전화가 어렵던 시절이다. 군이라면 가능했지만 서울은 아직 점령지 상태다.

사무실로 온 전화여서 옆방으로 간 내가 전화기를 귀에 붙였다. 송병일도 놀라서 누군지 잘 못들었다고 했다.

「예, 이승만입니다.」
했더니 이초쯤 있다가 잡음 끝에 제법 선명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예, 저 여운형입니다.」
놀란 나는 숨을 들이켰다.

몽양(夢陽) 여운형은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1886년생이니 나보다 열한살 연하로 당시 60세가 된다.
몽양은 1919년 상해 임정의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다가 1920년 고려 공산당에 가입했는데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피압박민족대회에도 참석하는 등 활발한 애국 활동을 했다. 나하고는 상해 임정에서 안면을 익혔을 뿐 교류는 없었던 상황이다.

「아니, 왠일이시오?」
내가 물었더니 여운형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위원장님, 언제 귀국하십니까?」
「가고 싶은 마음은 급하지만 이 사람들이 못가게 막는구려.」

내가 듣고 있을지도 모를 이들을 겨냥하고 말을 이었다.
「내가 가면 미국 정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소.」
「저희들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습니다. 들으셨지요?」
「들었소.」
「저희들이 위원장님을 인공의 주석으로 추대했습니다. 받아들여 주시겠지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조금도 놀랍지가 않았다. 문득 26년 전인 1919년이 떠올랐을 뿐이다.

3.1운동이 일어나 독립의 운동이 거세지면서 국내외의 6개 단체가 모두 나를 대통령, 주석 등으로 임명했다. 다시 26년 전의 전철이 되풀이 된단 말인가?

아니다. 이제는 그렇게 되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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