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25)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사흘 후인 8월 9일에 다시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8월 10일에는 그때까지 뜸을 들이고 있던 소련군이 일본령 만주를 공격하면서 곧장 북한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8월 15일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했다.

    일본은 항복하기 전까지 20여만명의 조선인을 징집해 갔으며 1백여만명을 노동자로 끌고 갔으니 조선 땅의 폐해도 일본 못지않았다. 그래서 나는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들으면서도 기쁨보다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 당시 조국에서는 만세 열풍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나는 순진한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 사이에 섞여 목이 터져라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울부짖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미국 땅, 워싱턴의 내 주변 분위기는 차겁다 못해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 위원장직을 해방 전까지 수십년간 맡아오면서 수많은 미국인 친지를 만났으며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미국 정관계 인사와 교분이 많았고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는 특별한 인연도 있었지만 단 한번도 미국의 정책이 자국의 이익을 벗어나 집행된 것을 본 적이 없다. 미국을 예로 들었을 뿐이지 서구 열강의 행태도 예외가 없다.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 24군단이 한국으로 진입한다는군요.」
    8월 16일,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선 이원순이 말했다.

    이원순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존. R. 하지(John. R. Hedge) 중장이 한국 진주군 사령관이 된 것이다.

    의자에 앉은 이원순이 얼굴의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을 잇는다.
    「38선 이남의 땅을 맡게 되겠지요.」

    소련군의 급속한 한국 북반부 진입에 맞서 동경의 맥아더가 일반명령 제1호를 내렸기 때문이다. 만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이 명령이 없었다면 소련은 미국과의 협약을 무시하고 남하했을 지도 모른다.

    2월의 얄타회담에서 병든 루즈벨트가 스탈린에게 한반도를 소련에게 양도해주기로 밀약을 했다고 터뜨린 내 말이 그것으로 증명 되었을 것이다.

    「다 한국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머리를 든 이원순이 나를 보았다.
    「위원장님 여권은 곧 나온다고 국무부 담당한테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좌익 세력은 재빠르게 소련군과 함게 북한 땅으로 진주했다는 것이다.

    그때 사무실로 로버트 올리버(Robert Oliver)가 들어섰다.

    로버트는 1942년부터 내 정치 고문으로 일해 온 충실한 동지이자 조언자다. 에드워드 장킨 목사의 소개로 로버트를 만난 나는 그의 성실함과 외교적 안목을 존중했다.

    서둘러 내 앞으로 다가온 로버트가 말했다.
    「박사님, 될 수 있는 한 빨리 한국에 들어가셔야 될 것 같습니다. 미국무부에서 중국 정부와 합의해서 한국의 연립정부안을 밀어 붙인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나는 듣기만 했고 로버트가 말을 잇는다.
    「김구 주석도 어쩔수 없이 김규식이나 조소앙 등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합의를 할지도 모릅니다.」
    「김주석이 그럴 리는 없어.」
    내가 머리를 저으며 말했지만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그때 이원순이 말했다.
    「남한에서는 이미 여운형과 박헌영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고 합니다.」

    박헌영(朴憲永)은 이미 1939년 서울에서 「경성콤그룹」을 조직한 기반이 있는 것이다. 또한 1930년대에 공산주의자의 지도를 받아 조직된 농민조합의 기반도 갖춰져 있다.

    나는 저절로 어금니를 물었다. 해방이 되고나서 이제 좌우 갈등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