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24)

     당시의 한반도에 대한 미국 측 정책은 좌우합작 연립정부를 겉으로 표방하되 안으로는 신탁통치를 추진하고 있었으니 내 폭탄발언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루즈벨트가 병사한 후에 대통령직에 오른 트루만도 당혹했을 것 같다. 병사한 루즈벨트로부터 한반도 정책에 대한 처리과정을 자세히 들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 발언으로 가장 분노한 조직이 바로 미국무부의 알저 히스 무리였다.
    나중에 소련 스파이로 밝혀져 처형된 알저 히스는 미국무부의 최고 실세로 국제연합 창립까지 주도한 친소파여서 나를 그 전부터 눈엣가시로 여기던 인물이다.

    그 알저 히스 앞에서 소련의 위험성을 설득하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쓴웃음이 나온다.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하고 일본의 운명도 풍전등화 상태가 되어가던 1945년 7월경에 나는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전화를 받았다.

    「형님, 이곳 공산당 조직에서 형님을 미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성토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기자회견 때문인 것 같소.」
    하고 김구가 말했으므로 나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나 백범이 나를 형님이라고 부를 때 어떤 분위기인지를 알만큼 우리 둘은 20년이 넘도록 서로 의지해 왔다. 다툴 때도 있었지만 나는 백범을 임정의 기둥으로 믿었고 백범 또한 나를 의지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외세의 배격에 둘의 뜻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백범이 말을 이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도 좌우합작 정부를 받아들이라고 나한테 압력이 옵니다. 미국과 소련이 손발을 맞추고 있는 상황에서 양측 모두를 공격하면 재미가 적지 않겠습니까?」
    「이보오, 아우님.」

    내가 전화기를 고쳐 쥐고 말했다.
    「그 소련 앞잡이 놈들 말을 믿지 마시오. 내가 미국 국무부, 정계 사무실을 굶은 쥐처럼 수십년 돌아다녀봐서 이젠 짐작할 수가 있소.」

    사무실 안에는 나하고 임병직 둘 뿐이었는데도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미국은 한반도에 관심이 없소. 소련은 부동항을 얻으려고 1백년 전부터 조선을 노리고 있었지 않소? 이제는 그 기회가 온 것이오.」

    백범이 한 살 연하였지만 포용력과 조정력은 나보다 월등한 사람이다.

    내가 말을 이었다.
    「이제 일본이 패망하면 바로 소련군이 진주할 것이오. 그리고 바로 조직을 갖춘 공산당 세력이 소련의 지원을 받고 정부를 장악하게 될 것이고, 그럼 우리는 좌우연립정부라는 명분만 갖춰주는 허수아비가 될 것이오.」
    「저도 그것 때문에 우파의 단결과 연합을 추진하고는 있습니다만.」

    백범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지요. 하지만 중차대한 시기에 분열된 지도부를 드러내면 각국의 신뢰를 잃을테니 임정은 중립을 지키는 모양새를 하겠습니다.」
    「아우님은 그렇게 하시오. 나는 이곳에서 할수 있는 한 소련의 위험성을 경고 할테니까 말이오.」
    「형님, 조심하시오.」

    불쑥 백범이 말하더니 잠깐 뜸을 들였다가 잇는다.
    「이곳 공산당 조직에서 형님을 제거해야 독립이 순조롭게 된다고 떠드는 자들이 있어요. 이놈들이 암살대를 조직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아우님, 고맙소.」

    통화를 끝낸 내가 웃음 띤 얼굴로 임병직을 보았다. 왠지 개운해진 것이다.

    그래서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일본이 패망이나 되고나서 암살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