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22)

     「좌우합작은 성립될 수가 없는 사상누각이오.」
    내가 말하자 임병직과 장기영 등은 머리를 끄덕였다.

    워싱턴 구미위원부의 사무실 안이다. 1944년이 되면서 전황은 연합군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국력(國力)의 차이, 즉 미국의 전력(戰力)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발악적으로 대응했고 식민지 한국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는다.

    1944년부터 일본은 한국인 1백여만명을 징용, 징집해갔는데 노예나 같았다. 탄광, 군수공장, 철도, 비행장 건설 등에 끌려갔다가 공사가 끝나면 비밀을 유리하려고 대량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수십만의 여자가 정신대(挺身隊)로 끌려가 군인 상대의 위안부로도 보내졌다.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방금 한국 땅 실상을 듣고 난 후여서 방안 분위기는 어둡다. 이러다 한국 백성이 일본과 함께 멸망당할 것 같다는 불안감도 든다.

    내가 말을 이었다.
    「소련은 이미 공산당 조직을 한국 땅에 다 만들어 놓았지만 미국은 전혀 관심이 없어.」
    「한국 땅을 소련에 내줘도 일본 땅을 먹게 될테니까요.」

    나하고 생각이 같은 임병직이 말을 잇는다.
    「미국 정부 관리, 의원들을 만나면 친소파가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이 순진한지 무식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한국 땅처럼 외세의 핍박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이어서 그럽니다.」

    장기영이 맞장구를 쳤다.
    「미국 관리 중에 소련과 내통한 스파이가 여럿 있을 것입니다. 이러다가 한번 발칵 뒤집히겠지요. 미국은 언론이 발달 된 나라여서 곧 발각이 날테니까요.」

    공감이 갔으므로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1930년대 이후 한국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은 일본의 탄압을 피해 지하로 잠적했지만 끈질기게 이어졌다. 그러다 1939년 박헌영(朴憲永)이 서울에서 경성코뮤니스트 그룹을 조직했다가 다시 해체 되었지만 기회가 오면 불 일어나듯 타오를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패망하면 공산당 조직을 이용한 소련은 순식간에 한국 땅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데 좌우합작(左右合作)이라는 말만 그럴듯하게 만들어놓고 우(右)의 모체인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조직을 지원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다. 미국은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아니, 좌우합작이란 미명 하에 우파를 속여 소련에게 한국 땅을 내줄 생각인 것 같다.
    그것이 나와 내 동지들의 생각이었다. 우리가 직접 미국 내에서 겪었기 때문이다.

    「한국 땅을 다시 러시아에 넘겨줄 수 없어.」
    혼잣소리처럼 내가 말했지만 모두 들었을 것이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내가 낮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되면 다시 러일전쟁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돼.」

    1896년,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일본의 압력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러일전쟁으로 러시아가 패퇴했고 결국 미국의 중재로 조선 땅은 일본에 맡겨졌다.
    이제 다시 미국의 중재로 한국 땅이 소련에 맡겨지는가? 미국은 그 댓가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아마 소련군의 일본군 공격일 것이다.

    그때 임병직이 말했다.
    「미국은 중국 국민당 정부한테도 국공합작을 요구하고 있는 형편이니까요.」

    방안에는 다시 무거운 정적이 덮여졌다.

    하긴 국민당 정부 외교부장 송자문이 모택동에게 호의적이고 임정에 좌우합작을 요구하는 세상이다.

    국민당정부 수반인 장개석은 처남의 행태를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