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20)

     「미국은 런던에 있는 유럽의 망명정부를 원조해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망명정부도 미국의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말했더니 알저·히스가 머리를 들었다.

    미국부 안의 특별보좌관실에서 나는 국무장관 특별보좌관 알저 히스를 만나고 있다. 코델 헐 국무장관은 알저 히스에게 전후 한국 처리문제까지 맡겼다는 소문이 있다.

    「박사, 박사께서 한국 임정의 대표자가 아니라고 하던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리고는 알저 히스가 책상 위에 놓은 내 명함을 집더니 보는 시늉을 했다.
    임정 구미위원부 위원장 겸 임정 외교 대표 명함이다.

    갑작스런 일이어서 말문이 막힌 나에게 알저 히스가 말을 잇는다.
    「최소한 한국의 대표자만이라도 단일화 시킬 수는 없습니까? 어제도 한국 망명 정부의 대표라는 사람이 다녀갔단 말이오.」 

    한길수다. 한길수는 중한민주동맹단(中韓民主同盟團)의 대표자 명함을 들고 한국 대표라고 찾아왔을 것이다.

    나는 이 젊은 장관 특보를 물끄러미 보았다. 나와 마주친 두 눈에 적의(敵意)가 덮여진 것 같다.

    내가 차분하게 말했다.
    「곧 단일화가 되겠지요. 하지만 모두 목적은 같습니다. 망명정부를 인정해주시고 지원을 부탁합니다.」
    「소련한테서도 지원금을 받아내고는 임정 간부들이 착복을 했다던데. 그 돈으로 첩을 두고 유흥비로 썼다고 들었습니다.」

    알저 히스가 시선을 준채로 말을 잇는다.
    「그러니 우리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소련의 외교부 관리한테서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입술 끝을 올리며 웃는다.
    「저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여럿이 같이 들었거든요.」

    사실이다. 그래서 김구가 지원금을 유용한 김립(金立)을 의혈단을 시켜 거리에서 사살하기까지 했다.

    소리죽여 숨을 뱉은 내가 알저 히스를 보았다.
    「일본이 제거되면 다음에는 아시아에서 소련이 군림하게 될 것입니다. 소련을 견제해야 됩니다.」
    「아니.」

    머리를 저은 알저 히스가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소련은 미국의 동맹국입니다. 동맹관계인 우방을 모욕하거나 모함하면 안됩니다.」
    국무장관 특보한테서 직접 이런 주의를 받자 내 가슴은 쇳덩이가 든 것처럼 무거워졌다.

    알저 히스 뿐만이 아니다. 국무장관, 대통령인 루즈벨트까지 일본의 견제 세력으로 동맹국인 소련에 대한 기대와 호의가 넘쳐나는 분위기였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소련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일본을 얼마나 우대 했던가? 강대국의 자국(自國) 이기주의는 이렇게 뻔뻔하다.

    망신만 당하고 사무실을 나왔더니 내 친구인 프레스턴 M 굿펠로 대령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말했다.
    「리, 표정을 보니 일이 잘 안됐군. 전쟁도 곧 끝날테니까 그렇게 실망 할 건 없네.」

    다가선 굿펠로가 손바닥으로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잇는다.
    「일본이 망하면 한국 땅은 해방이 될 것 아닌가? 아무도 다시 뺏어가지 못할거네.」
    「그렇게 될까?」

    지방신문 발행인인 굿펠로는 낙천적인 성품이다. 내 시선을 받은 굿펠로가 빙긋 웃었다.
    「우선 일본이 망하는 것이 순서네. 그 다음이 독립이고.」

    그런데 어떤 독립이 될 것인가? 소련을 등에 업은 공산주의 체제의 국가로써 독립할 것인가? 아니면 좌우 합작이 될 것인가? 현재로써는 그 두가지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