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18) 

     이번에는 프랭크린 루즈벨트다.

    1905년에 내가 가져간 청원서를 읽었던 대통령은 제 26대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그리고 지금 내가 제출한 임정 승인 요청서를 거부한 대통령이 제 32대 프랭크린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다.

    프랭크린 루즈벨트는 1933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1940년에 3선되었지만 루즈벨트 두분과 조선, 특히 나하고는 악연(惡緣)이다.

    루즈벨트는 임정 승인은 물론 일본과의 독립전쟁에 필요한 무기 지원도 거절한 것이다.
    중국은 지원해도 대한민국은 안된다고 했다.

    그때가 1941년 6월쯤 되었다. 국무부에서 통보를 받은 내가 담당 보좌관 맥밀란에게 말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고 했소. 나는 36년 전에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오늘과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36년 전입니까?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나셨다구요?」

    맥밀란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제가 5살때였군요. 박사님이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나셨다니 놀랍습니다.」
    「조선 황제의 특사로 밀서를 가져와 보여드렸지요.」
    「그렇습니까?」

    더 놀란 맥밀란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안는다. 그저 호기심이 일어났을 뿐 대한민국 임정을 인정하건 말건 관심도 없는 것이다. 나는 소리죽여 숨을 뱉았다.

    미국 국무부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청소부까지 다 나를 안다. 매일 들락거린데다 끊임없이 내 기사와 원고가 신문 지면에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정책을 입안하는 관료보다 미국 시민을 움직여 여론을 결집시키는 것이 내 바람이었다.  

    그것이 30년동안 내가 미국에서 닦아온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지쳤던 것 같다.

    맥밀란의 시선을 받은 내가 말을 이었다.
    「그때,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조선을 일본의 합병에서 막아달라는 조선 황제의 청원서를 읽고 나서 나에게 고려 해보겠다고 했지만 이미 육군장관 테프트를 일본으로 보내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었지요.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조선을 각각 나눠갖기로 밀약을 맺은 겁니다.」
    「아, 그런가요?」

    정색한 맥밀란이 머리를 끄덕였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 뒤를 밀어준 것 같았는데.」

    말을 그친 내가 맥밀란을 똑바로 보았다. 맥밀란은 젊고 유능한 관리였지만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른다.
    조선인, 대한제국인, 대한국인의 고통을 어찌 알 것인가?

    길게 숨을 뱉은 내가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은 러시아에게 조선을 내주기 위해서 임정을 승인하지 않고 무기 지원을 거부하는 것 같소.」
    「아니,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놀란 맥밀란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러시아에게 조선을 내주다니요?」
    「일본을 견제하려고 말이요. 그러려면 러시아의 힘이 필요하니까.」
    「......」
    「그것 밖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조선인을 무장시켜야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 같단 말입니다. 차라리 러시아에게 조선을 내주고 일본을 견제시키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박사님, 그럴 리가 없습니다.」

    고위급 정책 회의에는 들어가보지 못하는 맥밀란이 손까지 저으며 말했으므로 나는 청원 거절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십 번 당하는 일이었지만 가슴이 미어졌고 이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나 맥밀란은 다시 만나야 할 담당 보좌관이었으므로 나는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