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⑭ 

     내가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것은 1934년 10월 8일이다.
    뉴욕 몽클레어 호텔에서 오랜 친구인 윤병구 목사와 존 헤인즈 홈즈 박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는데 내 나이 59세, 프란체스카는 34세였다.

    렉싱턴 애버뉴에 위치한 몽클레어 호텔은 내 프린스턴 동창인 킴벌렌드 대령 소유여서 여러모로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60객이 그것도 30대의 서양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에 대한 편견이 꽤 심했었지만 나와 프란체스카는 극복할 수 있었다.

    다음 해인 1935년 1월 25일 하와이로 돌아온 나는 다시 교육사업과 교회활동, 그리고 잡지 출간에 열중했다. 당시 상해 임정은 1923년의 분열로 크게 위축되어서 김구가 겨우 꾸려가던 실정이었는데 1930년대에 들어 대전환기를 맞았다.

    김구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여 적극적인 테러 활동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가 임정과 김구의 명망을 높였고 곧 한국독립당의 기반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만주 땅에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중국 대륙을 석권하려는 야욕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지만 서구 열강은 방관했다. 러시아 견제용으로 일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곧 중국대륙을 먹습니다.」
    나에게 자주 찾아오는 김덕수가 어느 날 오전에 그렇게 말했다.

    1937년 3월이다. 조선 땅은 1936년 부임한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에 의해 내선일체(內鮮一體), 동조동근(同祖同根) 정책을 강력히 시행하는 중이다.

    즉, 조선과 일본은 같은 민족이며 뿌리도 하나라는 정책이다. 그래서 천황을 조상신으로 참배토록 강요했고 학교에서 조선말 사용을 금지시켰다. 또한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했기 때문에 민족 말살정책이나 같다.

    김덕수가 길게 숨을 뱉는다.
    「일본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박사님.」
    「그렇군.」

    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더니 김덕수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반발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내가 김덕수에게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곧 중국에서 전쟁이 일어나겠지. 일본은 마치 가속도가 붙어 달려 내려가는 자동차 같지 않은가?」
    「그렇긴 합니다만.」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일세.」

    내가 말했더니 김덕수가 길게 숨을 뱉는다.
    「결국에는 어딘가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겠군요.」
    「군국주의(軍國主義)의 말로는 같아. 더구나 지금은 20세기야. 미국과 영국이 지금은 일본을 이용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배신당하게 될걸세.」

    내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어서 김덕수는 시선을 탁자 위에 둔 채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렇게 말하는 나에게 대놓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내가 주장하는 외교독립론은 말잔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강대국은 강대국끼리만 이권을 챙겨올 뿐 지금까지 단 한번이라도 약소국인 조선 입장을 들어준 적이 있느냐고 대들었다. 나는 그런 비난에는 일일이 대꾸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렇게 강대국 주변에서라도 맴돌지 않았다면 조선은 잊혀졌을 것이다.

    김구가 애국단을 시켜 폭탄을 던지는 것이나 내가 미국 신문에 끊임없이 투고와 인터뷰를 쏟는 것이나 같은 독립운동이다.

    내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내가 조선을 떠난 지 올해로 25년이야. 25년을 기다렸는데 조금 더 기다리지 못하겠나?」

    그리고 벌써 내 나이가 63세가 되었다. 조국이 식민지가 된 지는 27년이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