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⑩  
     
     피가 마르고 뼈가 깎이는 것 같다는 말이 있다. 모질고 독한 고통을 표현한 것이겠지만 나는 가만있을 때, 그것도 사무실이나 침실에서도 문득 그런 느낌을 받는다.

    감옥서에서 고문을 받을 때도, 그 열악한 환경에서 콜레라 환자와 함께 있을 때조차 이보다 심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식민지가 된 지 20여년. 허깨비처럼 해외를 떠도는 자신을 생각하면 그렇게 된다.
    그렇다고 맨날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며 고통을 받는 것은 아니다. 나도 인간이어서 밥도 먹고 맛을 볼 줄도 안다. 가끔 이렇게 자책하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다.

    1932년 12월, 내가 임시정부 대표 자격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했을 때도 그런 상황이 되었다. 계속해서 매를 맞으면 매에도 이골이 날법한데 더 모질게 아픈 것이다.

    1919년 이후부터 나는 외교적 협상에 실패만 거듭해왔다. 1919년 파리강화회담, 1921년의 워싱턴 군축회의 등에 청원서를 접수조차 시키지 못했으며 거슬러 올라가면 1905년에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까지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으나 조국에 대해서는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매달렸고 동포들은 내 이상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참담한 비난과 좌절로 돌아왔다.

    제네바에 도착한 나는 중국 대표 안혜경(顔慧慶)부터 만났다.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에서는 19인 위원회를 소집하여 만주에 일본이 세운 만주국 문제를 토의 시켰는데 당사자인 일본과 중국은 제외된 상태였다.

    「만주국을 국제연맹에서 부인(不認) 시키는 것이 일본이 침략국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목표로 각국 위원을 설득해 나갑시다.」

    내 말에 안혜경은 뛸 듯이 기뻐했다. 안혜경이 둔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나처럼 온갖 수단을 강구하며 20년간 국제회담에 매달려온 독립선동가와 같겠는가?

    미국인 기자들도 나를 도왔고 국제연맹 사무국 직원들도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하와이에서 내 반대파인 교민단 간부들이 중국의 또 한명의 대표 고유균에게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정식 대표가 아니라는 편지를 보내 왔을 때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모두 내가 부덕한 탓이다.

    「그 편지는 찢어버리도록 하지요.」
    중국대표 안혜경이 말했다.

    「이 편지는 읽지 않겠습니다.」
    다 읽었으면서도 고유균이 외면한 채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연맹 사무총장 에릭 드러먼드(Eric Drummond)에게도 편지를 썼는데 일본인이 세운 만주 괴뢰국에는 조선인의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지시켰다.

    결국 19개국 위원회는 만주국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국제연맹에 제출했고 만주국은 국제연맹에서 41:1이라는 표결로 부인(不認) 되었다. 1표는 일본의 찬성표였다.

    「모두 박사님 공입니다.」
    흥분한 중국 대표 안혜경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지만 나는 웃기만 했다.

    국제연맹에서 만주국이 부인된 것은 일본국의 야만성과 침략국임을 증명한 것이나 같다.
    그리고 조선의 참담한 실상에 대한 내 편지를 국제연맹 사무총장과 각국 대표단이 읽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땅은 그대로 일본 식민지가 되어있다. 드러난 공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내가 임시정부 대표가 아니라면서 함께 일한 중국 대표단 앞으로 편지를 보낸 반대파들을 떠올리자 일본 총독의 밀사가 되었다는 박용만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박용만의 변절을 믿지 않는데도 그렇다.

    그렇게 내 제네바 일정은 무의미한 성공으로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