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⑨  

     50대 후반이면 그 당시에도 노인 취급을 받는다.
    그 나이가 되도록 혼자 살고 있었으나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번 실패한 경험도 있는데다 그 실패를 반복할 가능성이 많기도 했다.

    조국을 떠난 이국땅에서 수시로 떠도는 생활을 해야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선 땅에 살면서도 가정을 돌보지 못했는데 독립선동자가 되어 동가식서가숙을 하는 입장이니 지금은 더 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학교에서, 교회에서 강의로 겨우 먹고사는 형편이다. 군식구까지 데리고 살면 그야말로 독립선동벌이꾼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 그런 의식도 가끔 흔들렸다. 나에게 안정(安定)과 정착을 권하면서 아내감을 소개시켜주는 이들도 많았다.

    하와이 교민동지회의 간부 김만수가 그런 사람이다. 김만수는 여류사업가 안명희와의 결혼을 추진한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 이번에는 중학교 교사인 교민의 딸을 소개했다. 30대 중반으로 아직 미혼이라는 것이다.

    「박사님을 존경한다는 말을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교회 보수공사를 둘러보는 나에게 김만수가 열심히 말했다.
    「교민 안응경씨 장녀이니 집안도 좋고 인물도 뛰어납니다. 뉴욕대학 경제학부를 나와 지금 뉴욕에서 교사로 있습니다.」

    「내가 그런 재원을 낭비하면 쓰겠소?」
    부드럽게 말한 내가 발을 떼자 김만수가 옆을 따라 걸으면서 말을 잇는다.

    「박사님, 교민들도 박사님이 가정을 이루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일은 조선독립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올시다.」
    「누가 상관이 있다고 했나?」

    되물은 내 얼굴에 쓴웃음이 번져졌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교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정을 이루면 돈이 드는 법이다.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사업가였다면 진즉 결혼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때 김만수가 말했다.
    「안응경씨도 박사님이시라면 두말 않고 사위로 삼으실 것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더구나 그 분은 박사님의 후원자시니까...」
    「그만하시게.」

    김만수의 말을 자른 내가 얼굴을 펴고 웃어 보였다. 갑자기 가슴이 허전해졌기 때문이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을 때는 내색은 안하지만 가슴이 허전해지는 버릇이 있다.

    안응경은 늦은 나이에 이민을 와서 60대 후반의 나이였으나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뉴욕에 무역회사와 큰 도매상을 두 곳이나 운용하고 있는데다 호놀루루에도 호텔과 식당을 소유하고 있다.

    나는 처갓집 덕으로 호의호식하기는 싫다. 차라리 혼자 살겠다. 모르고 만났다면 모를까 그것을 전제로 하다니. 김만수는 너무 서둔 것 같다.

    「안선생께 내가 직접 말씀 드리도록 하지.」
    웃음을 지운 내가 걸음을 멈추고는 김만수를 보았다.
    「내가 따님하고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 드리려는 거야.」

    눈만 껌벅이는 김만수를 향해 내가 말을 이었다.
    「난 잘못된 결혼으로 자식까지 죽인 사람이야. 자신 없는 일에는 나서지 않겠어. 자네의 호의는 눈물겹도록 고맙지만 말이네.」
    내 말을 들은 김만수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길게 숨을 뱉는다.

    우리는 다시 나란히 발을 떼었고 내 눈앞에 죽은 태산의 얼굴이 떠올랐다. 태산이 살았다면 지금은 30대 초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 눈앞에서는 여전히 7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