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⑥

     상해 임정은 내분과 각 계파간의 갈등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었고 주요 인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김구는 1926년 12월에 의정원 원장 이동녕 등의 지지를 받아 임정 국무령이 되었는데 재정상태가 궁핍해서 집세도 밀려 소송을 당한다고 했다.

    내가 머물고 있는 하와이 사정도 나을 것이 없다. 파벌로 나뉘어 서로 원수가 되는 경우가 흔했고 상대를 일본놈보다 더 증오하는 것이었다.

    내가 조선말 계몽운동을 하던 때부터 겪어 온 일이었다.
    국적 없는 방랑자, 국제미아, 보다 적확히 표현하면 빌어먹는 독립선동가(獨立煽動家)가 되어있는 내 현재의 처지에서 동포들의 갈등은 가장 큰 상처가 되었다.

    자의건 타의건 내가 개입된 상태에서의 갈등과 분란은 더욱 그렇다.
    사람은 각양각색이어서 일괄적 기준을 긋고 상대하면 꼭 반발이 일어난다. 그렇다고 위, 아래 다 맞추면 극심한 혼란이 발생된다. 기준을 아래로 놓거나 위에다 놓는 것도 그렇다.

    법(法)이 그래서 필요하다고 하겠지만 주의, 주장, 방침에 어떻게 법을 정하는가? 그래서 나는 빌어먹는 독립선동가가 되면서부터 스스로 결심을 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결심을 한 일에는 절대로 타협이나 양보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가 떳떳하다면 좌고우면 하지 않고 밀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다. 성취욕도 강하고 학식과 자질도 갖췄다고 생각했다.
    내가 왕가(王家)의 혈족임을 단 한번도 내세운 적이 없었지만 이씨 조선 태조(太祖) 자손으로서의 긍지는 숨기듯이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말 많고 분파 좋아하는 백성을 이끌기 위해서는 민중 바닥의 삶을 이해하면서 강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 이 난세를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자고로 난세의 지도자는 친절한 인간이 아니다.
    일본 식민지가 된 조선을 친절한 독립선동가가 구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강력한 기운으로 민중을 끌고 나아가야 한다.

    「박용만이 죽었습니다.」
    하고 김만수가 나에게 말했을 때는 1928년 10월 중순 쯤 되었다.

    나는 하와이의 한국인학교 사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처음에는 잘 못들었다. 그래서 눈만 껌벅였더니 김만수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다시 말했다.

    「박용만이 베이징에서 이해명이란 의혈단원의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어허.」
    내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동포의 손에 죽다니.

    그때 김만수가 말을 잇는다.
    「방금 베이징에서 연락을 받았다는 동지한테서 들었습니다. 박용만은 그동안 일본 총독부와 결탁해서 독립군 정보를 빼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를 잡고 의혈단에서 처치했다고 합니다.」

    이제 나는 잠자코 김만수의 얼굴을 보았다. 문득 박용만의 나이가 떠올랐다.

    박용만은 나보다 여섯 살 연하였으니 1881년생으로 올해 만 47세로 죽었구나. 나하고 한성감옥서에서 같이 지내던 때는 갓 스무살이었지. 출옥한 박용만은 내가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 원고를 트렁크 밑바닥에 숨겨서 미국으로 가져왔었다. 일곱 살짜리 태산이 손을 잡고 미국 대륙을 횡단하여 나한테 데리고 온 사람도 박용만이다.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

    「믿을 수가 없어.」
    생각에서 깨어난 내가 머리를 저으며 말했지만 가슴 속에 돌덩이가 든 것 같았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도 나는 겪어 보았다. 주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변절하고 배신하는 것도 겪었다.

    그러나 박용만에 대해서는 믿고 싶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