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땅을 밟고 죽기가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 
      
     現代史 발굴 연재③
    주치의는 李박사가 더 이상 하와이에 머물다가는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말은 당시 李박사를 보필하던 프란체스카 女史와 하와이 교민들에게 자극이 되었다. 적극적으로 還國(환국)을 주선하기 시작한 것이다. 

    李東昱(前월간조선 기자)   
     
     “지금 우리나라가 어떻게 돼 가지?”
     
      李仁秀(이인수)씨가 차에서 내려 바라본 테라스에는 검정 양복에 안경을 쓰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역시 백발에 여윈 듯이 보이는 부인의 부축을 받고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바로 李仁秀씨의 양아버지인 李承晩(이승만) 박사였다. 李承晩 박사는 상기된 표정이었으며 마당을 들어서는 李仁秀씨를 바라보자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며 손을 흔들었다. 층계를 올라온 李仁秀씨가 한국식 큰 절을 올렸다.
     
      아들 仁秀씨가 손을 잡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앉은 李박사는“지금 우리나라가 어떻게 돼 가지?”하고 물었다. 李仁秀씨는“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잘 되어갈 것입니다. 염려 마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런가? 나라가 잘 되어 간다면 그것은 참 좋은 일이야...”하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동안 노인의 얼굴에 회한의 빛이 서리는 듯했다. 그러다가 곧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뜨면서 침통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런데... 너는 남이 잘된다, 잘된다 하는 소리 아예 믿지 마라... 이렇게 절단이 난 걸... 그렇게 우리나라 일이 쉬운 게 아니야.”
     
      침통해진 남편의 얼굴을 본 프란체스카 女史(여사)는 아들 仁秀에게 뒤뜰이 보이는 마루방에 마련된 환영식탁으로 李박사를 모시고 나오도록 했다. 李박사 부부가 아들을 맞는 경사에 친지와 제자들이 축하 인사로 김치는 물론 고비나물까지 한국 음식을 골고루 마련해 왔다.
     
      환영해 준 교포들도 다 가고 세 식구만 남은 마키키집은 다시 쓸쓸함과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아래층 창고 같은 작은 방에 침실을 정한 李仁秀씨는 이튿날 밤에도 旅毒(여독)이 채 가시지 않았다. 2층에서 일찍 내려와 막 잠이 들 무렵이었다.
      들릴락 말락 하는 노크 소리에 놀라 일어난 李仁秀씨가 문을 열었을 때 캄캄한 어둠 속에 프란체스카 女史의 부축을 받고 서 있는 李承晩 박사를 보았다. 李仁秀씨의 양어머니는 “아버님이 지금 한국말로 뭐라고 말씀을 계속하시며 나를 끌고 이리로 오자고 해서 모셔왔는데, 무슨 뜻인지 통역 좀 해달라”고 했다.
     
      급히 李仁秀씨가 자신의 방으로 모시니 李박사는 상기된 표정으로 대뜸 “얘야, 우리나라 가는 데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다. 李仁秀씨는 시간을 의미하는 질문 같지가 않아서“경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하고 물으니“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李仁秀씨가 양어머니에게 통역을 하자“또 그 걱정이 일어나셨구나. 윌버트 최씨가 한국에 돌아가는 모든 비용을 대준다고 우리에게 약속했으니 그렇게 이야기를 해보게”하며 그 과정을 낱낱이 설명했다. 李仁秀씨가 다시 李承晩 박사에게 우리말로 설명을 드렸다.
     
      “그럼 언제 내가 우리 땅에 가게 돼?”
      “한 서너 달 지나면 한국이 날씨도 풀리고 그러면 그때는 가시게 될 겁니다.”
      李仁秀씨는 즉흥적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李承晩 박사는 그 말을 좀체로 납득하려 하지 않았다. 떨리는 손을 천천히 李仁秀씨에게 내보이더니 “자- 이것 좀 봐...내가 전에 갈려고 할 때 석 달만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어?...그런데 자- 지난번에도 하나 둘 셋...지금도 하나 둘 셋이니 왜 세월은 안 간다나?”하며 세 손가락을 꼽았다 폈다 했다.
     
      이번만은 속지 않겠으니 정확한 날짜를 대라는 표정이었다. 養子(양자)가 정해질 무렵에도 박사는 종친회를 통해 환국을 하겠노라고 알렸지만 종친회측에서는 날씨도 그렇고 하니 석달만 기다리라고 간청하여 겨우 무마시켰던 일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그가 힘들게 얻은 자식의 입에서도 또 다시 석달이란 말이 나오게 되자 기가 막힌 표정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 땅을 밟고 죽기가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 모두 어떻게 할 작정이야?”
      이 말을 하는 그의 상기된 두 볼에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他國(타국)에서 밤을 맞은 세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한 숨만 쉬고 있었다.
      이런 일은 종종 있었고 그럴 때마다 울고 싶은 심정인 된 李仁秀씨와 프란체스카 女史가 李박사를 달래어 진정시켜야 했다.
     
      떡국을 좋아한 李박사
     
      하와이에 와서 보행마저 불편해진 李박사는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했는데 아들 李仁秀씨가 오자 큰 힘이 되었다. 객지에서 건강이 나빠진 고령의 노인이 아들을 곁에 두게 되자 많은 위로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매일 아침 李仁秀씨가 예의를 갖추어 아침 문안을 드릴 때마다 몹시 기뻐했다.
     
      세 식구는 아침 7시 반에 일어나고 8시 반에 식사를 했는데 식사 전에 李박사가 기도를 했다. 아주 작은 소리로 기도를 해서 옆 사람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아침 식사는 과일주스 한 컵과 빵을 먹었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李仁秀씨와 프란체스카 女史가 번갈아 가며 성경과 신문을 읽어 드렸는데 李承晩 박사는 아들이 읽으면 더 좋아했다.
     
      부인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李박사는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테라스로 나가 바깥 공기를 쐬었다. 10시 반이면 李박사의 운동시간이다. 부엌에서 약 10m쯤 떨어진 마루방까지 10회를 왕복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의사의 권고에 따라 다리의 보행력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운동으로 李박사는 李仁秀씨의 부축을 받아가며 걸었다. 운동과 관련해서는 李仁秀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아버님은 참 꼼꼼하셨습니다. 부엌 벽의 붙박이장에는 허리 높이 정도에 선반이 있었어요. 이 선반 한쪽에 종이를 끼우는 클립 열 개를 모아 두셨습니다. 운동이 시작되면 으레 그 선반에서 출발해 마루방까지 왕복을 합니다.
      한 번 왕복할 때마다 아버님은 그 클립 중 하나를 선반 반대편으로 옮겨 두셨습니다.
     일종의 萬步器(만보기)인 셈이었지요. 그 날치 운동을 다하게 되면 클립은 선반 반대편에 모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있을 때도 기력이 점점 약해지셔서 열 번을 왕복하는 것조차 힘들어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가끔씩 제가 클립을 옮겨 드린다고 하면서 한 번에 두세 개씩 옮겨 놓았어요. 그러면 아버님께서는‘내가 벌써 열 번을 했어?’하시며 건강이 좋아졌다고 아주 기뻐 하셨지요.”
     
      점심은 그 날의 식단에 따라 만든 반찬과 밥과 김치가 전부였다. 김치는 李박사의 고혈압을 생각해서 부인이 조금씩만 접시에 놔드렸는데 李박사는 늘 아들 仁秀 앞에 놓인 김치 그릇에서 더 집어다 들었다.
      점심식사가 끝나면 약 1시간 동안은 온 식구가 낮잠을 잤다. 李박사의 건강이 좋았을 때는 오수 시간 후에 마당에 나가 꽃에 물을 주거나 나무 손질도 했다.
      이 무렵 李박사는 신문지를 펴놓고 붓글씨 연습을 간간이 했고, 자신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지었던 많은 漢詩(한시)들을 묶어 내고 그 표지의 題字(제자)를 썼다. 그 제목 글씨‘替役集(체역집)’은 하와이에서 탄생한 李박사의 마지막 서예작품이었다.
     
      하오 6시가 되면 저녁식사 시간이다. 주로 밥을 지었지만 때로는 국수를 만들기로 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똑같이 식성이 좋아서 반찬이 좋든 나쁘든 식탁 위의 그릇들은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깨끗이 비워졌다.
      특히 떡국을 끓일 때는 父子가 대환영이었다. 저녁 설거지가 끝나면 보통 7시가 넘었는데 약 10분 동안 성경을 읽고 李承晩 박사의 저녁기도가 끝나는 8시쯤에는 모두가 침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에도 부인 프란체스카 女史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자나 깨나 귀국할 일념뿐인 李박사가“또 하루를 하와이에서 보내버렸다”며 못 견디게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어서 가야겠다”
     
      아들 李仁秀씨가 李박사의 옆에 앉아 있으면 더듬더듬 말을 건네곤 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누가 남북통일을 하려는 이가 있나?”
      “우리 국민의 소원이니 모두가 생각하고 있습니다”하고 李仁秀씨가 으레 생각해 둔 대답을 한다. 그러자 李박사는 “그까짓 생각만 해서 뭘해? 아- 李承晩이가 한바탕 했으면 또 누가 나서서 해야 할 게 아니야. 내 소원은 백두산까지 걸어가는 게야.”
      답답해서 하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李仁秀씨는 대답이 막혔다. 묵묵부답. 다시 아버지의 이야기.
      “그럼 日人(일인)들은 어떡허구 있누?”
      화제를 日本(일본)으로 돌렸다. 즉각적인 답이 쉽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李仁秀씨가 東京(동경)을 경유해 하와이로 오면서 들은 이야기를 말했다.
      “그네들도 요즘은 불경기에 실업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답니다.”
     
      이런 얘기가 오간 하루는 온 종일 李박사의 얼굴에 근심이 떠나질 않는다.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국내 문제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앉아 있게 된다. 프란체스카 女史가 아들 李仁秀씨에게 이런 충고를 해 줬다.
      “바로 저런 것이 아버님의 병환이시다. 아버님께선 조금이라도 자극이 있는 말씀만 들으시면 그것이 풀릴 때까지 골똘하시니 네가 말조심을 단단히 해야 한다.”
     이런 일로 해서 母子는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고국에 관한 신문기사를 가능한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李박사는 이로써 마지막까지 朴正熙(박정희)라는 인물이나 그 정권의 속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李仁秀씨는 아버님을 보다 잘 설득하려 애썼다. 1961년 12월 어느 날 오후, 李박사는 또다시 짐을 챙기면서“어서 가야겠다”고 했다. 그러자 李仁秀씨가“지금 한국은 눈이 많이 쌓이고 춥습니다”라고 만류했더니“추우면 오바를 입으면 돼. 괜찮아...”하며 아들의 말을 가로막았다.
     
      1961년 12월17일은 일요일이었다. 아버지를 모신 아들이 韓人(한인) 교회에 나갔다. 李박사가 1918년에 지은 이 교회는‘한인 기독학원’과‘동지회’를 포함한 李박사의 하와이 3대 사업 중 하나다.
      아들의 부축을 받고 교회 안에 들어서자 교포들이 달려나와 李박사를 부축했다. 예배가 끝난 후에는 교포들이 李박사의 건강을 묻는 인사가 계속됐다.
      이날 저녁에는 하와이 영사관으로부터 催伯烈(최백렬)씨와 김학성씨 등이 최근의 공보영화 필름을 빌려와 집안에서 영사회를 가졌다. 그러나 ‘토키’가 너무 빨라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에 옆에서 李仁秀씨가 설명을 해 드렸다.
     
      公報 영화
     
      국토건설사업이 소개되어 건설 實況(실황)을 李박사에게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李박사가 박수를 쳤다.
      “한인들 잘허네! 아, 왜들 이렇게 안 해?”하며 기쁜 얼굴로 주위 사람들에게 박수를 치라고 권했다. 催伯烈씨 부부와 몇몇 교포들도 웃으면서 박수를 치자 李박사는“우리 날마다 이렇게 하세!”
      그 한 마디가 한바탕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1961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테라스에 나와 바람을 쐬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는 듯 “이거 다 죽어가는 몸이 어쩌다가 하루를 이렇게 보내누”하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 仁秀씨가 진정시켜 드리며 부축해서 방안의 소파에 눕혀드리자 가슴에 북받치는 슬픔을 억제할 수가 없었던지 고향을 잃은 노인은 또다시 흐느껴 운다.
      마키키에서의 크리스마스 시즌은 세 식구에게 부담스러운 날이기도 했다. 각계에서 날아드는 카드에 일일이 답장을 해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李仁秀씨는 주로 한글로 된 카드의 주인에게 답장을 보냈고, 프란체스카 女史는 외국인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두 사람이 개봉한 카드 중에는 가끔씩 수표나 현금이 들어 있었다. 교포들과 미국인들이 보낸 후원금이었다. 李박사의 하와이 생활 5년 2개월간은 전적으로 그곳의 한인 교포들과 미국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살았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부터 자금에 관한 부분은 단 한 번도 풍족한 때가 없었다.
     

  •   ▲프란체스카 여사가 6·25 당시 주한 제7보병사단장이었던 렘니처 장군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 이승만 대통령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종일 침대에만 누워있어야 한다고 쓰고있다.(1962년 12월11일)
     
      梨花莊(이화장)에서 경호원으로 근무했던 禹石根씨(우석근․현재 해외 거주 중)의 이야기를 측근을 통해 들어보면 梨花莊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경호원들이 돈을 모아서 연료를 사야 했다고 한다.
      이런 내핍생활은 하와이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李박사 부부가 재산을 모아두고 이런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열심히 일했지만 자신을 위한 돈은 거의 모아 두질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며느리로서 프란체스카 女史를 20년 이상 모셨던 李仁秀씨의 부인 曺惠子(조혜자) 女史는 이 분들의 생활을 처음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훗날 프란체스카 女史가 임종할 무렵이 되어서야 자신의 삶을 대략적이나마 회고하여 들려줌으로써 李박사 부부의 내핍생활에 대한 이해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李박사 부부는 애당초 나라를 잃은 상태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따라서 이 분들에게 있어 돈을 쓴다는 것은 최소한의 자기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특히 프란체스카 女史는 末年(말년)에“우리가 北韓(북한)동포들을 위해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무리 강대국들이라 해도 우리를 함부로 업신여기지 못한다”고 며느리에게 이야기함으로써 비로소 曺惠子 女史가 그 깊은 뜻을 알게 됐다.
      李박사 부부는 스스로 근검절약을 실천해 보임으로써 주위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 것이 거의 틀림없다. 이 분들의 생활을 제대로 이해한 주변 사람들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작은 돈이나마 봉투에 넣어 시시때때로 이 분들에게 드렸고, 이로써 하와이에서의 생활도 그나마 가능해졌던 것이다.
     
      하와이 마키키 집에서의 내핍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현지 교민들이나 당시 수 개월간 체류하며 동거한 李仁秀씨를 통해서 상당히 일치된 증언들을 들을 수 있었다.
      “마키키 집에 있는 가구들은 전부가 교민들이 쓰던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혹시 남의 물건이 그대로 들어 있지는 않는지 해서 서랍을 열어보았지요. 그랬더니 거기엔 두 분이 폐품을 차곡차곡 모아 두고 계셨습니다. 포장지는 포장지대로, 노끈은 노끈대로 서랍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겁니다.
      한 번은 집 밖으로 아버님을 모시고 산책을 나갔을 때입니다. 발밑에 작은 쇠붙이가 떨어져 있는 걸 보신 아버님이 그걸 주워다가 부엌 옆에 쇠붙이를 모아두는 곳에 갖다 놓으셨지요.”
     
     50년 친구 ‘보스윅’
     
      1961년 12월21일에는 李仁秀씨가 아버님을 모시고 보스윅씨라는 李박사의 친구집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보스윅씨는 하와이에서 아주 유명한 장의사를 하고 있었다. 이 양반이 李박사와 인연을 맺게 된 시기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통치되던 19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日本은 李承晩이란 인물에 대해 국제적으로 현상금을 걸고 있었는데, 李박사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상해로 출발을 해야 했지만 無國籍(무국적)에 현상금이 걸린 상태라 용이치가 않았다.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보스윅씨다.
     

  • 상해임시정부 대통령 취임을 위해 밀항직전 중국인으로 변장한 이승만.
     
      당시 보스윅씨는 하와이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다 죽어간 많은 중국인 시체들을 수습해 중국으로 보내주는 葬儀(장의) 사업을 벌여 재미를 보고 있었다. 李承晩박사는 1920년에 중국인들의 시체를 실은 관 속에 숨어 상해까지 밀항을 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일로 해서 보스윅은 李承晩이란 인물에 대해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李仁秀씨가 양부모님을 모시고 만나 본 보스윅은 대단히 부유한 저택에 살고 있었다. 李박사보다 크다고 할 수 없는 키에 넉넉한 풍채를 가지고 있는 보스윅씨는 더구나 90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정정했고 말소리도 우렁찼다. 그의 부인이 와병중이라는 말에 프란체스카 女史는 부인의 방에 위문차 들어갔고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
     
      보스윅은 李박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어떤가... 자네 건강은?”하고 큰소리로 웃었다. 李박사는 거기서도 “나는 한국으로 갈 거네”라고 했다. 놀란 표정이 된 보스윅은 “그게 무슨 말인가? ‘하와이’가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인데 여기를 두고 어딜 간단 말인가, 이 사람아!”하고는 겨울의 추위가 노인네에게 얼마나 해로운 것이며, 감기에서 시작된 병이 죽음에 이르는 경우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李承晩 박사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보스윅의 얼굴만을 퀭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말상대가 안 된다는 뜻이었다.
     
      잠시 후 프란체스카 女史가 거실로 나오자 李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스윅씨는 내실로 잠깐 들어갔다 나오더니 프란체스카 女史의 핸드백 속에 봉투를 넣어주었다. 女史는 고맙다고 인사했다.
      밖에까지 따라 나온 보스윅은 돌연 李仁秀씨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현관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귓속말로 “아가, 잘 봐드려라... 그는 굉장한(Great) 사람이야. 50년 친구인 내가 그를 모를 리가 있겠나”하고는 등을 밀치면서 “가봐라”했다. 그의 눈시울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본시 가난한 사람이야”
     
      李박사가 귀국을 위해 노력했던 눈물겨운 모습은 망명생활 중 곳곳에 베여있다. 5달러하는 이발비를 아껴 여비를 모으기도 했다. 그 바람에 한동안 李박사의 머리는 보기 싫을 정도로 길어서 프란체스카 女史가 손수 이발을 해드려야 했다.
     
      매주 금요일은 부인이 한 주일분 식료품을 사들이는 장보는 날. 그러나 李박사는 부인에게 시장엘 가지 말라고 한사코 말렸다. 프란체스카 女史는 “굶어서야 살 수가 없지 않아요”하고 설명을 하면 “그러면 조금만 사와... 돈 써버리면 서울 못 가...”라고 말하며 겨우 놓아주곤 했다.
      시장을 보고 온 부인은 항상 작은 봉투 하나만 들고 현관문으로 들어갔다. 작은 봉투를 들고 李박사 앞을 지나서 부엌으로 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남편을 안심시키려 한 것이다. 그리곤 부엌에 달린 뒷문을 통해 나머지 물건을 몰래 들여놓아야 했다.
     
      아들 李仁秀씨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로 이런 생활이 반복되었다. 어쩔 수 없이 어른을 속이는 슬픈 연극을 母子(모자)는 한동안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화이트 大將(대장)이 마키키의 李박사 집으로 찾아와 위로를 하고 갔다. 이밖에도 李박사를 자주 찾은 사람들은 당시 함참의장이었으며 前 주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램니처 장군을 들 수 있다.
      그는 하와이에서 회의가 열리면 항상 마키키의 李박사를 찾아주었다. 훗날 요양원에 있을 때에도 그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고, 심지어는 시간이 나지 않을 때는 회의 중간 중간에 방문하거나 점심을 걸러가며 李박사를 찾아주었다.
     
      또 세계은행 총재였던 맥나마라씨(前 미 국방장관)와 맥아더 장군, 그리고 벤플리트 장군
     도 李박사를 만나러 하와이에 들렀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두가 한국전쟁 중에 李박사를 만나보고 그 후 평생토록 존경해마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화이트 대장은 李박사가 하와이에서 병원의 혜택을 받는 데에 상당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트리풀러 병원에서의 정기검사와 치료는 물론이고 훗날 임종 직전까지 많은 의료혜택을 주선해 주었다.
     
      그러나 한국의 관리들은 군사정부의 李박사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로 인해 눈치를 보아야 했다. 그래서 당시 李박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알래스카를 경유하는 비행코스를 택해야 했다. 이런 모험을 해가며 李박사를 찾은 사람 중엔 前 주미대사였던 金貞烈(김정렬)씨가 있다. 軍政(군정)초기에는 아무도 李박사에게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당시 駐美(주미) 대사로 발령받은 金씨는 일부러 하와이에 들러 李박사를 만났다. 그리고는“우리가 보필을 잘못해서 이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라며 눈물을 흘리고 돌아갔다고 한다.
     
      해가 바뀌어 1962년이 되자 李박사의 귀국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갔다. 그럴수록 자신의 희망이 관철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도 덩달아 커져갔다.
      한번은 “내가 알고저 하는 것은 누가 나를 여기 데려다 붙잡아 두고 있는가 하는 거야!”하며 격분했다. 흥분을 절대 하지 말라고 부인이 애원 했음에도 불구하고 李박사는 이날 상기된 표정이 되어 혼잣말을 계속 이었다.
      “온 천하에 못된 놈들... 그 놈두... 그 놈두. 웬 도적놈이 그닥지 많아... 어떻게... 그런 것을 저질렀단 말이야?... 내가 도적놈인가? 나는 본시 가난한 사람이야... 돈을 어찌 해?... 기가 맥혀...”
      그리고는 혈압이 올라 두통을 호소하며 몸져누웠다.
     
      프란체스카 女史의 눈물
     
      마키키街(가)의 집에서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안 있어 李박사는 트리풀러 병원에 들렀다. 당시 ‘그레고라토스’라는 희랍계 미국인 의사가 李承晩 박사의 주치의였다.
      李박사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 요즘 자꾸 건강이 안 좋다”고 하자 주치의는 뇌파검사를 제안했다.
      뇌파검사가 끝나자 두 母子를 별실로 불러들인 주치의는 뇌파검사 결과를 프란체스카 女史에게 설명했다. 그러면서‘그 이상 희망이 없음’을 전해주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30년을 한결같이 믿고 따르던 남편이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태라니...
     
      그때 李仁秀 박사는 프란체스카 女史가 우는 것을 처음 목격한다. 그녀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항상 강한 여성인 줄 알고 있던 李仁秀씨에게 그녀는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李박사 자신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었다. 이 무렵에도 李박사는 “나를 앞으로 20년간 여기다 붙잡아 둘 작정이냐”고 역정도 냈고 李仁秀씨에게도“괘씸한 놈, 내가 걸어서라도 갈 테다”하며 신발을 찾았던 적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주치의는 李박사가 더 이상 하와이에 머물다가는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말은 당시 李박사를 보필하던 프란체스카 女史와 吳重政(오중정)씨를 비롯한 하와이 교민들에게 자극이 되었다. 적극적으로 還國(환국)을 주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서는‘사과도 없이 어떻게 들어올 수 있냐’는 반발이 드셌다. 물론 일각에서는 李박사의 환국운동도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서 유명한 李박사의 ‘사과성명’이 등장한다. 그러나 사과 성명의 작성자는 李박사가 아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