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現代史 발굴] 李承晩은 하와이에 亡命한 적이 없다!  
     
     연재① 조국은 그를 매정하게 버렸다
    李東昱(前월간조선 기자)   
     
     국립묘지엔 아직도 찾아 주는 이 있어…
     
      1995년 1월2일 오후 4시.
     필자는 동작동 국립묘지의 李承晩(이승만) 대통령 묘역을 찾았다. 겨울 저녁의 쓸쓸함이 계곡을 냉랭하게 채우고 있을 시간. 더구나 이 분은 ‘독재자’라는 이미지로 부각되어 온 점이 있어 그의 묘역은 더욱 쓸쓸할 것이란 필자의 선입견도 한 몫을 했다.
     
      묘역까지 이르는 車道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李承晩 대통령의 묘에
     다다를수록 가파른 언덕이 나타나 힘껏 액셀을 밟아 차를 몰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언덕을 올라서자 나타난 묘역 앞에는 이미 다섯 대의 차량이 주차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걸어서 올라온 분들도 거기 계셨다. 모두 해서 스물 다섯 분쯤 되었을까? 필자의 어리석은 짐작을 후회하며 준비해 간 작은 꽃다발을 올리고 분향을 했다. 그리고 돌아 본 묘역엔 현재 생존해 있는 전․현직 대통령들의 화환들이 일렬 횡대로 서서 자신들의 이름 적힌 종이를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왼쪽 맨 끝엔 養子(양자)인 李仁秀(이인수)씨의 작은 화환도 보였다.
     
      쓸쓸한 노후를 마친 老부부의 묘지 오른편에는 순 한글로 쓰여진 ‘우남 李承晩 박사의 묘’라는 碑文(비문)이 묘지를 지키고 있었다.
      커다란 하나의 봉분으로 만들어진 묘지였지만 부부가 합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체스카의 비석은 없었다.
      두 분이 잠든 묘역 입구에도 이렇다 할 안내 문구조차 없었다. 묘역 입구 왼편에는 ‘...눈물을 뿌리며 이곳에 세우노라’고 적힌 ‘하와이 한인동지회’의 追慕碑(추모비)가 참 서럽게 서 있다고 생각됐다. 李박사 부부는 아직도 망명중인 느낌이었다.
      
      제1부 출국 전야
     
      감투가 날아가면 인간만이 남는다
     
      12년간 머물렀던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다음 5년 2개월간의 하와이 생활로 생을 마감한  李承晩 박사.
    4·19 전후에 태어난 필자와 같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남아 있는 李承晩에 대한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다. 언제나 그의 이름 앞에는‘독재자’란 보통명사가 붙어 다녔고,‘부정선거’와‘친일파의 비호자’란 말이 대명사처럼 활용되기도 했다.
      지난 80년대를 거치면서 해방 전후사를 인식한다는 명분하에 좌익적 시각에서 빚어진 그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새로운 언어로 포장돼 왔다.‘친미주의자’로 혹은 미제국주의의 앞잡이’이거나 ‘미군정의 꼭두각시’역할을 한 ‘권력욕의 화신’으로, 심지어는‘분단을 획책한 주범’에서 ‘金九(김구) 암살배후’에 이르기까지 ‘진보’라는 미명하에 知識人(지식인) 집단이 만들어 낸 그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敵對的(적대적)이었다.
     
      필자가 李承晩 박사의 하와이 망명 생활을 더듬어 보기로 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위대한 정치가이거나 악명높은 독재자일지라도 일단 그가 권좌에서 물러나 감투를 벗으면 거기엔 벌거벗은‘人間(인간)’만이 남는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孤島(고도) 하와이에서 5년2개월간을 지낸 李承晩의 마지막 생애를 통해 정치적인 변수가 거의 개입되지 않은 한 노인의 일상적인 삶을 진솔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알면 그의 정치적 스타일과 범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거기서부터 그의 정치철학과 그가 했음직한 일들, 그리고 잘못 전해진 사연들을 역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취재 도중에 필자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亡命(망명)’이란 단어였다.
      우선 李박사의 生(생)이 마감된 마지막 하와이 생활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망명’이었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국어사전의 정의에 의하면‘망명’이란 亡命逃走(망명도주)의 준말로써‘정치적인 이유로 해서 제 나라에 있지 못하고 남의 나라로 피하는 일’이다. 물론 自動詞(자동사)에 속한다.
     
      그런데,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의 梨花莊(이화장)엔 그의 전 재산과 모든 자료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亡命逃走한 정치인의 뒷 자리로 보기에는 너무나 온전하다. 게다가 李박사의 하와이 생활은 항상 고국을 그리워했던 首丘初心(수구초심) 그 자체였다. 自意(자의)로 떠난 사람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또한 하와이 체류 중 李承晩 박사의 입에서 ‘망명’이란 단어가 나왔다는 기록 역시 전무하다. 필자가 직접 확인한 당시 증인들에게서도 공통적인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 하와이에 도착해서 李박사가 처음 한말도 “2~3주 쉬다 갈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5년 2개월간 하와이에 머물렀던 李박사의 望鄕(망향)은 망명자로서 라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강제로 유폐된 심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李박사는 자신이 ‘망명객’이란 생각을 눈을 감을 때까지 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망명을 해야 할 만큼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보여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많은 家臣(가신)들이 거짓보고로 둘러대며 부정과 축재를 일삼는 동안 당신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동분서주하며 國事(국사)를 돌보았다고 자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망명설은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일까? 당시 李承晩 박사의 망명길을 지켜 본 禹石根씨(우석근·경호원으로 근무. 이후 건축업)의 중앙일보 1986년 3월8일자 證言(증언)을 참조해 본다.
     
      “한달 후에 올테니 집 잘 보게”
     
      <李박사가 梨花莊에 오신 지 한 달쯤 됐을 때다. 새벽 1시가 되어 경호원들이 교대를 할 무렵 李박사는 우리들에게 상오 7시에 차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나와서 차를 준비하며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정동교회 가시는 날도 아니고.... 우리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아침 7시 정각에 李박사는 예전과 다름없는 옷차림으로 나타났다. 산책을 좀 하시는 게 어떠냐고 하니 그동안 많이 했으니 됐다면서 “시간이 급하니 김포 공항으로 가세”하신다.
      직원들이 모두 梨花莊 잔디밭에 도열해 있다고 하자, 그는 계단을 내려오며 “늦어도 한두 달 후면 돌아 올테니 집 잘 봐주게”하신다. 또 돌다리를 건너며 “내가 잠깐 떠나야만 국내가 조용해져”하신다.
     
      차를 타고 梨花莊 문을 나서니 이미 신문사 차가 와 있었다. 김포지역에 들어서자마자 號外(호외)를 뿌리기 시작했다. ‘李박사 망명’호외였다. 김포공항엔 許政(허정) 내각수반과 李壽榮 외무차관 등이 나와 있었다.
      당시 기내에선 세관원들이 들어와 소지품 검사를 했다. 그때 짐이라곤 李박사 옷과 부인 옷이 들어 있는 트렁크 2개, 샌드위치와 마실 것, 평소에 쓰던 타이프라이터 한 대 등 모두 가방 네 개였다.
      조종사들이 식사를 하느라 한 시간 가량 시간이 있었다. 기자들이 몰려와 회견요청을 했으나 李박사는 “내가 아무 말 않고 조용히 떠나야 한다”고 했으며 부인은 “아이 러브 코리아“하며 우셨다.>
     
      이 증언을 보면 망명하는 대통령의 모습 그대로가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측근들의 해석은 다르다. 養子 李仁秀 박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망명은 아니었다고 봐요. 늦어도 한두 달 후면 돌아올 것이라고 하셨고, 내가 훗날 미국에서 뵈었을 때도 망명이라 생각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 취재한 내용을 보면 영락없는 망명객의 심정이라고 보면 영락없는 망명객의 심정이라고 독자들이 이해할 만합니다만...
     “선입견을 가지고 취재를 했기에 그런 일이 빚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망명을 하셨다면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 나섰을 리가 없지요. 중요한 서류와 기록물들을 모두 梨花莊에 그대로 놔 두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김포공항에서 기자들에게 “내가 아무 말 않고 조용히 떠나야 한다”고 하신 것과 프란체스카 女史(여사)가 눈물을 흘리며 “아이 러브 코리아”라고 하신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李박사님은 당시에 정치를 그만 둔 입장에서 말씀을 삼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주위에서 휴양삼아 하와이로 잠깐 가시도록 권고했고, 국내 정세도 계속해서 시끄러웠잖습니까? 프란체스카 女史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기자들이 자꾸 질문을 하니까 당신의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는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전부였을 겁니다.”
     
      -당시 이런 상황을 기록해 둔 그 분들의 자료가 있습니까.
      “상황 기록이라기보다는 회고록이라 해야 하겠지요. 프란체스카 女史의 ‘대통령의 건강’이란 책에 이 부분이 실려 있습니다.”
     
     프란체스카 女史의 기록
     
      필자가 구해 본 프란체스카 女史의 자전적인 책 ‘대통령의 건강’에 실려있는 하와이로 떠나는 날의 묘사는 확실히 경호원들이나 기자들이 본 것과 달랐다. 우선 그 부분을 발췌해보자.
     
      <(대통령 직을 물러난 이후) 일요일에는 정동교회에 가서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보았다.
      梨花莊에서 대통령의 일상생활은 별 불편이 없었지만 대통령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하와이로 가서 한두 주일 쉬고 오시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측근의 제의를 받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몹시 큰 타격을 받았던 노인의 건강을 위해서는 전지요양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의사의 제의가 있었다. 지금 여기서는 그 당시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없지만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5월24일 하와이 동지회장 崔伯烈(최백렬)씨로부터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휴양을 하실 수 있도록 체류비와 여비 일체를 부담해 드릴 테니 하와이를 다녀가시도록 하라는 내용의 초청 전보를 받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2주일 내지 한 달 정도 하와이를 다녀올 수 있는 짐을 챙겼다.
     
      5월29일 상오 7시 우리는 梨花莊을 출발했는데 떠나기 앞서 대통령은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늦어도 한 달 후에 돌아올 테니 집을 봐줘”하고 부탁했다.
      김포공항으로 가는 연도에는 평화스로운 초여름의 농촌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논에 가지런히 심어놓은 모를 바라보며 대통령은 풍년을 비는 시를 한 수 읊었다.
      공항에는 許政 수반과 李壽榮(이수영) 외무차관이 나와 있었다. 비행기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 간 동안 기자들이 비행기 안으로 와서 회견 요청을 했으나 우리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 기내에서는 세관원들이 들어와서 우리의 소지품을 모두 검사하였다. 우리의 짐은 전부 4개였는데 대통령의 옷이 들어 있는 트렁크 하나와 내 옷과 소지품을 챙겨넣은 트렁크 그리고 마실 것과 점심과 약품이 든 상자와 평소에 쓰던 타이프라이터였다.
      세관원이 보지 않은 것은 내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라이터였다. 그 라이터는 내가 梨花莊 현관을 나오기 전에 응접실 탁자 위에서 무심코 집어넣은 것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대통령이나 나에게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것을 집어넣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며느리 曺惠子씨에게 들려준 시어머니의 이야기
     
      필자는 梨花莊을 몇 차례 오가면서 李仁秀 교수의 부인 曺惠子(조혜자)씨로부터 당시 상황에 관계된 시어머니 프란체스카 女史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중 괄목할 만한 이야기는 1986년에 실린 경호원 우석근씨의 증언과 관계된다. 우씨의 증언은 거두절미되어 실린 것이고 사실은 “아이젠하워가 올 때 내가 있으면 국내가 시끄러워져”라는 말이 빠진 것이라고 했다. 그 말 뒤에 이어서 “잠깐 다녀오겠다”고 했음은 프란체스카 女史가 며느리에게 단단히 일러 준 대목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李박사는 아이젠하워의 訪韓(방한)을 피할 겸 휴양도 할 겸 하와이로 떠난 것이 된다. 망명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와이에 도착한 뒤 한 달 간의 생활을 회고한 프란체스카 女史의 글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대목이 나온다.
     
      <하와이에 도착한 후 독립운동 당시의 옛 동지들과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게 된 대통령은 한결 즐거운 듯하였고 건강도 좋아지는 듯싶었다... (중략)...우리가 예정했던 하와이 체류가 한 달이 지나자 대통령은 한국에 돌아올 생각으로 崔佰烈씨 등 우리를 초청해 준 인사들과 상의를 했으나 모두가 아직은 요양을 더 하시도록 만류를 거듭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권고는 당시의 국내사정을 알고 하는 이야기였으나 이 당시 완전히 정치를 떠난 한 고령의 노인으로서,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대통령에겐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부분은 당시 초청장을 내고 준비한 崔佰烈씨에게 들어야 풀리는 문제이지만 그 분은 이미 작고했다. 그래서 필자는 현재 허리 수술로 하와이의 한 병실에 입원중인 吳重政씨(오중정·당시 하와이 총영사.72세)와 간단한 전화 인터뷰를 시도했다.
     
     조국은 그를 매정하게 버렸다
     
     -崔佰烈씨가 초청장을 보내게 된 경위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사실은 내가 외교행랑편으로 편지를 받았습니다. 당시 許政씨가 정부를 이끌고 있을
     때였지요. 그 분도 한 3주간 요양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 왜 그랬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재정보증서와 초청장을 보내라고 했어요.
      그래서 李박사의 제자였던 윌버트 최씨와 崔佰烈씨 이렇게 셋이서 상의해서 보내긴 했지요.”
     
      -李박사님은 그렇게 해서 하와이로 가신 것이로군요.
      “그것도 아닙니다. 초청장은 흐지부지 됐고 휴가처럼 그냥 들르는 것처럼 오셨더랬어요.”
      -그런데 3주가 지난 뒤에도 李박사의 귀국이 거부된 것은 당시 許政 정부가 거부했기 때문입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許政씨는 하와이 기독학원을 李박사가 운영하고 계셨을 때 선생으로 와 있었어요.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되는데 그럴 수가 있을까요. 당시 여론 때문에 못들어가신 걸로 압니다.”
     
      -그렇다면 李박사가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그 분이 살아생전에 귀국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있었습니까.
      “아무도 몰랐지요. 우리도 그 후에 무척 노력했지만 허사였어요.”
      -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시 우리나라 상황이 어려웠으니까 그랬을 거라고 봐요. 여론도 그렇고...”
      -하와이 계실 때 국가로부터 전직 대통령에 관한 예우 차원에서 돈이 지급되었습니까.
      “그런 건 없었지요. 그저 여기서 교포들이 조금씩 모은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셨어요.”
     
      필자는 首班(수반)이었던 許政씨의 회고록‘내일을 위한 증언’을 살펴보았다. 다소 대화의 내용엔 차이가 있으나 확실한 것은 “곧 돌아오겠소”였다. 당시 李박사의 하와이行에 관련된 모든 진행은 ‘휴양을 목적에 둔 外遊(외유)’에 초점이 맞춰져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언론과 정치권(민주당과 군사정부)이 창조한 ‘단어’로 말미암아 ‘망명’이 기정사실로 되어갔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부부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追放(추방)이나 幽閉(유폐)된 것은 아니었을까? 망명은 스스로 몸을 피하는 自動詞이고 追放과 幽閉는 他動詞(타동사)에 속한다. 그에 의해 建國(건국)된 祖國(조국)이 그를 매정하게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시각을 견지하면서 필자는 李承晩 박사의 하와이 생활을 재구성해 보았다. 
      
     제2부 孤島 하와이
     
      호놀룰루 비행장, 대통령의 예우를 갖춘 환영
     
      李박사 부부를 태운 전세기가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1960년 5월29일
     오후 2시 30분. 공항에는 ‘하와이 한인 동지회’교포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하와이 총영사인 吳重政씨가 대표로 나갔다.
      그 당시 李承晩 박사는 공식적으로 대통령이 아니어서 미국측과 의전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총영사 吳重政씨가 비공식적으로 미국측에 대통령의 예우를 간청했고, 미국측은 쉽게 응락해 주어 세관검색을 생략했다. 고국을 떠날 때 샅샅이 검색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 내외가 교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1960)
     
      吳총영사는 美 육군과 태평양 사령부 당국을 통해 李박사 부부에 대한 警備(경비)문제를 의논했다. 그 결과 당시 한국에 파견된 해병대 부사령관 매기 중장을 경호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 모든 것이 비공식 채널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기서 하와이 교민측은 北韓(북한)의 암살공작에 대한 우려를 심각하게 제기했고, 미국측은 이 때문에 공항 옥상에 기관포를 거치시키기도 했다.
     
      내·외신 기자 100여 명과 함께 비행기에 올라간 총영사 吳重政씨가 맨 처음 본 광경은 텅 빈 기내의 맨 가운데 줄 좌석에 노 부부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吳重政씨가 인사를 드렸더니 반가워하면서 “내가 여기 좀 쉬러 왔어, 한 3주일 쉬고 갈 거야, 吳영사”라고 했다.
     
     경호 관계자들은 트랩에서부터 출구까지 李박사 부부의 통로를 만들면서 환영인파와의 거리를 유지하도록 안전선을 그어 놓았다.
      그런데 트랩에서 내린 李박사는 “이게 무슨 말이야, 내 동포에게 내가 못 간다니”하면서 그냥 군중 속으로 파묻혀버렸다. 당시 미군 사령관과 총영사 吳重政씨 등 경호를 책임진 사람들은 이 때문에 아연실색하며 식은 땀을 흘렸다.
     
      하와이에 도착한 날 당시 한국에서 만들어 낸 뉴스는 李박사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전해주고 있었다.
      李박사가 하와이에 도착한 1960년 5월29일자 하와이 애드버타이저 紙(지)는 李承晩박사가 호놀룰루로 망명했다는 사실과 함께, 한국의 김용갑 재무부 차관이 李承晩 박사가 집권 12년 동안 1990만 달러를 유용했다는 내용으로 李承晩 박사를 기소했다는 사실를 보도하고 있었다. 모두 한국의 언론에 보도된 내용들이었다.
      애드버타이저 5월30일자 신문에는 당시 85세의 고령이었던 李박사가 한국 정부에서 주장하는 유용설과 망명설을 전면 부정하며 “난 단지 쉬러 왔을 뿐”이라고 주장한 내용이 실려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