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서 김만복 같은 이들 방치, 국정원 무기력카터, ‘인권’ 내세워 CIA 숙청후 10년간 혼란...같은 꼴
  • 2007년 12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자 전-현직 정보 관계자들은 ‘무능해진 정보기관’이 제 모습을 찾을 거라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3년이 흐른 지금도 국정원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DJ시절 특채된 이들을 포함, 김만복 前원장 같은 이들이 윗자리에 남아 있는 ‘후진(後進) 국정원’이기 때문이다. 

    은퇴 앞둔 김만복 '부활'...초고속 승진

    지난 13일 김만복 前국정원장이 일본의 좌파 잡지 <세카이(世界)>와 인터뷰한 기사가 보도돼 논란이 일었다. 김만복 前원장은 인터뷰에서 ‘북한의 연평도 도발은 이명박 정부가 자초한 것’ ‘김태영 국방장관이 퇴임하게 된 건 국회에서 군대 다녀온 사람이면 다 아는 이야기라고 발언해 청와대 인사들이 분노했기 때문’ ‘천안함 폭침에 대한 한국 정부의 조사 결과는 믿을 수 없다’는 등의 말을 내뱉었다. 김만복 前원장은 이에 더해 한미일 삼각동맹 건설과 북한 인권에 대한 문제 제기까지 비난하는가 하면, 심지어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대화내용까지도 공개했다.

    김만복 前원장의 인터뷰가 보도되자 언론과 안보 관계자들은 크게 분노했다. 전직 국정원 요원 모임인 ‘양지회’는 16일 그를 제명 조치했다. 그의 발언이 북한 정권과 從北親中세력들의 주장과 흡사했던 것도 문제였지만 어떻게 저런 생각을 가진 자가 국가정보기관의 수장(首長)이었냐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보 관계자들에 따르면 김만복 前원장의 문제는 이미 여러 차례 거론된 바 있다고 한다. 
    또한 이영민 ‘자유언론수호포럼’ 대변인은 그가 <동아일보>기자로 일하다 1960년대 말 시국사건담당부서인 제6국이 만들어질 때 ‘특채’됐다고 주장했다. 2006년 11월 원장 취임 당시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내부인사가 원장이 됐다’고 말했다. 당시 정부는 그가 1974년 중앙정보부 공채로 입사했다고 밝혔다.

    그 다음으로 공개된 김만복 前원장의 약력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부터다. 2001년 계급정년을 앞둔 그는 세종연구소로 발령난다. 그는 여기서 이종석 前통일부 장관(당시 북한연구실장)을 통해 ‘부활’한다. 盧정권 출범 후 그는 국정원 단장으로 복귀한 뒤 청와대 NSC 정보관리실장(1급)을 맡는다. 그는 2004년 2월 국정원 기조실장, 2004년 11월부터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간사를 맡게 된다. 이어 그는 국정원 제1차장으로 승진한 뒤 2006년 11월 국정원장이 된다.

    노무현정권 출범직후 대북심리전 중단 경위는?

    김만복 前원장이 기사회생과 초고속 승진, 그리고 국정원장 발탁에 대해 정보 관계자들은 “은퇴를 앞둔 인사가 이렇게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었던 건 당시 권력층의 비호 덕분”이라고 잘라 말한다.

    정보 관계자들은 2006년 11월 김만복 씨가 국정원장에 취임한 뒤 김승규 전임 원장이 심혈을 기울여 수사하던 486간첩단 ‘일심회’ 사건 수사가 흐지부지된 것도 그렇고 대북 심리전이 허무하게 중단된 것도 모두 김만복 前원장이 자신을 살려준 盧정부의 핵심세력과 ‘코드 맞추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지난 14일 <조선일보>에는 안희경 장군(예비역 준장, 해병대)이 “2003년 3월 盧정권 출범 직후 이종석 당시 NSC 사무처장이 합참 민사심리전차장인 나와 김만복 국정원 심리전 단장을 청와대로 불러 대북심리전의 즉각 중단을 요구했다. 나는 절대 반대를 외쳤지만 김만복 단장은 적극 찬성했으며, 이후 김만복 단장은 청와대에 입성했고, 국정원장까지 했다”는 내용의 개인광고까지 냈다. 반면 김만복 前원장과 그 측근들은 이런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당시 국정원이 어떤 성과를 냈는지 몰라서 그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만복 前원장 당시 국정원 활동을 옆에서 목격한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당시 우리나라 정보능력은 엉망이었다.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2007년 샘물교회 선교단의 아프간 피랍 당시 활동, 마부노 1, 2호 피랍 당시의 대처 능력, 중국관련 정보활동, 테러단체들을 감시하던 수준 등은 솔직히 ‘경악’할 수준이었다.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 많은 주장과 해석이 있지만 정보 관계자들은 김만복 前원장을 비호하던 ‘권력’들의 선입견을 가장 큰 원인으로 본다. 그 ‘권력들’은 국가정보기관을 ‘권력의 개’이자 ‘무소불위의 초법적 기관’이라고 상상했던 탓에 자기들 명령에 따르지 않는 직원들을 내쫓는 등의 행패로 국정원을 '후진(後進) 국정원'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국정원 직원의 '줄서기'는 1992년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권력에 의한 국정원 숙청과 줄서기'는 DJ정권 시절 때부터다. 1997년 대선 직전 E씨와 K씨 등 고위간부들은 DJ진영에 기밀 정보를 들고 가 '줄서기'를 했다가 파면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DJ정부가 들어서자 얼마 뒤 화려하게 복귀해 승승장구했다. 또한 특정지역 출신 수백 명이 국정원 주요 보직을 차지했다. 김만복 前원장의 경우도 이런 사례의 연장선상이라는 해석이 많다.  

    '후진 국정원' 개혁 시급... ‘카터의 CIA 학살’ 연구해야

    국정원의 사정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때문에 현 정부 인사들에게 ‘국정원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정원 정상화’는 쉬운 게 아니다. 국가안보의 전체적인 틀과 기능을 파악하고 있어야만 문제가 생긴 곳을 수정할 수 있다. 반면 현 정부는 ‘안보전략 전문가가 없다’는 말을 늘 들어왔다.  

    한편 김만복 前원장의 ‘망언 인터뷰’ 이후 일각에서는 DJ정권 시절 580여 명의 대공요원들을 쫓아낸 ‘국정원 대학살’에 대한 이야기도 점차 부각되고 있다. 대공요원들 대신 자리를 메운 자들 중 다수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려 노력하지만 일부는 지금도 ‘김만복 前원장’과 같은 식으로 일하고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美카터 행정부 시절의 ‘CIA 대규모 숙청’과 같은 사례를 연구해 국정원을 고치는 것이다. 카터 행정부는 집권과 동시에 인권을 내세워 CIA 요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수천 명의 공작요원과 정보요원이 거리로 내몰렸다. 일부 요원들은 중남미 마약조직에 몸을 의탁했다. 이후 레이건 행정부가 CIA를 원상회복하려 했지만,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이런 사례라도 연구해 국정원을 ‘정상화’하는 일이 시급하다. 더 이상 ‘안보 전문가 부재’를 핑계로 국정원을 가만 놔둬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