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30)

     이동녕(李東寧)에게 국무총리서리를 맡긴 나는 떠날 준비를 했다.
    대통령직도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이동휘가 요구하는 임시정부 해산이나 같게 된다.
    형식이나마 임정의 체제는 갖춰 놓아야 될 것이었다.

    상해를 떠나기 전날 밤, 간부급들만 알고 있었으므로 식당에서 송별회를 겸한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였다. 경무국장 김구가 나를 따라 숙소로 들어왔다.

    「백범의 일이 막중하오.」
    내가 인사치레로 말했더니 김구가 정색한 얼굴로 말을 받는다.
    「각하께선 대외 활동을 하셔야 됩니다. 상해는 우리한테 맡기십시오.」

    송별회에서는 김구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김구는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이다.

    숙소의 소파에 마주보고 앉아 김구가 말을 이었다.
    「이제 떠나시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되겠습니까?」
    「독립이 되는 날.」
    내가 입버릇이 된 말을 했다.

    가슴이 먹먹해졌고 그 순간 이 진실한 사람에게 묻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백범, 6개월 동안 내가 이룬 일이 없소. 그리고 따르는 동지도 없소. 내가 대통령으로써 자질이 부족한 것 아니오?」
    그러자 김구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눈빛이 번쩍였다.

    김구는 경무국 요원과 함께 임정 공관을 염탐하러 온 첩자나 이중첩자 또는 임정 간부를 헤치려던 일본 자객 수십명을 처단했다고 한다. 나에게 직접 보고를 안했지만 임정에서 김구가 지휘하는 경무국이 가장 바쁘다.

    김구가 입을 열었다.
    「각하께선 조선 민중의 대통령이십니다. 임정 안의 참새 떼들한테 구애받으실 것이 없습니다.」

    눈만 크게 뜬 나에게 김구는 말을 이었다.
    「지도자는 외로운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하께선 누구한테 신경 쓸 필요도 없으셨던 겁니다.」
    「백범답지 않은 말씀이구려.」
    「각하의 독선과 고집은 각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포용력이 부족한 것 같소.」
    「그랬다면 임정은 난장판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두 파당을 끌고 임정 안에 들어왔을 테니까요.」
    「도산을 견제하려는 잠재의식이 있었던 것 같소. 도산의 조직력과 친화력 그리고 포용력이 부러웠기 때문이오.」
    「흥사단을 이끈 도산이 정권을 잡는다면 공산당과 이동휘는 원수가 되어 떨어져 나갔겠지요. 흥사단은 도산에게 무기도 되지만 약점도 됩니다.」

    거침없이 말한 김구가 길게 숨을 뱉는다.
    「각하, 언젠가는 우리가 다시 모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건강하셔야 됩니다.」
    「고맙소, 백범.」
    「아우라고 불러주십시오.」
    「고맙네, 아우님.」

    내가 김구의 손을 잡았고 김구도 마주 잡았다.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 없는 이별이었지만 내 가슴은 그것으로 든든해졌다.
    그동안의 소외감, 서러움이 김구의 위로로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나는 손을 쥔 채 김구를 현관 밖까지 배웅했다.

    그날이 1921년 5월 27일 밤이었던 것 같다.
    방으로 돌아온 내가 가방에 옷과 책을 챙기면서 문득 날짜를 꼽은 다음 내 나이를 떠올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니까.

    내 나이 47세가 되었다.
    처자식도, 부모형제도 없는 혈혈단신의 인생이 또다시 혼자 짐을 꾸린다.
    조국까지 잃은 방랑자 신세가 되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밤에 나는 6개월간 머물렀던 상해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