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본에도 서당이 있었다?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1.01.04 16:28:06

하버드대학 교수를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는 생전에 미국인 최고의 일본 연구가로 꼽혔다. 부인이 일본 여성이며, 한 시절 주일 미국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 라이샤워 교수가 잘라 말하기를 “세계 최초로 조직적인 관비(官費) 해외 유학생을 파견한 나라가 일본이다”고 했다. 그가 일본에서 펴낸 책 <라이샤워의 일본사>(文藝春秋 발간)에 나온다.
라이샤워 교수가 지적한 관비 해외 유학생이란 쇼토쿠(聖德) 태자가 수나라로 파견했다는 견수사(遣隋使)를 가리킨다. 쇼토쿠 태자는 미개한 일본을 발전시키기 위해 두 가지 방도를 취한다. 하나는 한반도를 통해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미 불교와 한자 등이 신라, 고구려, 백제로부터 도입되어 있었다. 쇼토쿠 태자에게 <법화경>을 직접 가르친 스승은 다름 아닌 고구려의 혜자(惠慈) 스님이었다.
그렇게 앉아서 배우는 게 성에 차지 않았던지 중국으로 곧장 사람을 파견했다. 서기 607년의 견수사가 처음이었고, 수나라의 역사가 짧았던지라 3번 밖에 보내지 못했다(중국 쪽 기록으로는 4번).
그러나 쇼토쿠 태자가 한 번 열어놓은 국비 해외 유학의 길은 계속 이어졌다. 당나라로 보낸 견당사는 630년에 시작하여 이후 260여 년 동안 10여 차례나 파견되었다. 매회 규모가 달랐지만 수 백 명에 달하는 각 분야의 인원이 몇 척의 배에 나눠 타고 갔으며, 길게는 몇 년씩 해당 분야의 학문이나 기술을 연마했다. 개중에는 중국 땅에 눌러앉아 버린 경우도 간혹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중국으로 보내던 해외 유학이 서양으로 방향을 획 튼 것은 19세기 중엽의 메이지유신이 계기가 되었다. 이제까지 한반도와 중국대륙에서 문명을 배우던 일본이 태도를 돌변하여 미국과 유럽에서 가르침을 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첫 대규모 유학단은 1871년 11월에 파견한 구미(歐美) 사절단이었다.
정식 명칭은 사절 단장이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의 이름에서 딴 이와쿠라 사절단이었다. 유학생 60명에다 메이지 정부의 각료 3명(전체 각료는 7명이었다), 그리고 각료급 실력자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함한 108명의 사절단은 당초 10개월 일정을 1년이나 더 연장하면서 서양 문물에 탐닉했다.
물론 이때에도 일본인들은 예전과 다름없는 방법을 구사했다. 즉 해외 유학생 파견과는 별도로 수많은 외국인 전문가를 국내로 불러들여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영역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온갖 분야가 다 망라되었다. 가령 군대를 육성할 목적으로 영국과 독일 군인을 초빙했다. 해군은 영국군, 육군은 독일군에게 교육을 맡겼다니 그 치밀성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수도로 터 잡은 도쿄 중심가가 큰불로 잿더미가 되었던지라 아름다운 도시로 꾸미느라 영국인 건축가 토마스 워틀스를 모셨다. 그가 설계한 긴자(銀座)는 프랑스 파리를 본뜬 가로(街路)에다, 영국 조지 왕조풍의 건축물이 가미되었다. 초등학교에서 중등교육까지의 신식 교육은 미국식을 채택했다. 미국 교육학자 데이비드 머레이(David Murray)를 불러와 기틀을 다졌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외국에서 불러들인 전문가가 무려 1만 명이 넘었다면 할 말 다했다. 영국인이 6천 여 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3천 명 가까운 미국인, 9백여 명의 독일인, 6백여 명의 프랑스인, 그리고 40여 명의 이탈리아인이었다. 당시의 일본 인구를 약 3천5백만 명으로 추산하자면 얼마나 많은 외국인이 일본 땅으로 쏟아졌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겠다.
일본이 이처럼 근대국가를 지향하기 전, 그러니까 에도(江戶)시대(1603~1867년)에는 두 종류의 교육기관이 있었다. 하나는 조선시대의 향교처럼 관에서 세운 공립 교육기관인 ‘한꼬’(藩校)였다. 각 지역 영주들이 다스리던 곳이 ‘한(藩)’이었고, 3백 가까운 한에서 세운 학교인 한꼬의 숫자 역시 비슷했다. 한꼬에는 저마다 그럴싸한 이름을 붙였는데, 지금의 북동부 모리오카(盛岡) 지방에 1636년에 세워진 한꼬는 ‘작인관(作人館)’이라는 흥미로운 이름이었다. 그렇지, 학교란 인간을 만드는 곳일 테니까..... 그밖에는 명륜관(明倫館), 홍도관(弘道館)이란 간판이 많았다.
한꼬에는 양반의 자제, 그러니까 무사 계급의 자녀들이 다녔다. 교육기간은 일정하지 않았으며, 교양과 도덕, 그리고 무예를 주로 가르쳤다고 한다. 이에 비해 우리의 서당 격이라고 할 사립학교는 ‘데라코야(寺子屋)’라고 불렸으며 전국 각지에 2만여 개가 있었다. 농부나 상인의 자녀를 대상으로 읽기와 쓰기, 그리고 주산을 곁들인 산수를 가르쳤다. 데라코야의 경영자는 동네에 있는 절의 주지도 있었고, 더러 사무라이가 부업으로 연 곳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른바 국립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설립된 시기는 메이지(明治)유신 직전인 1863년이었다. 이미 통치력이 고갈될 대로 고갈된 에도 막부가 세운 개성소(開成所)가 그것이었다. 여기서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이른바 ‘양학(洋學)’을 가르쳤다. 또 같은 해에 서양 의학을 다루는 의학소(醫學所)를 별도로 설립하기도 했다. 메이지유신 후 이 두 학교를 합쳐서 도쿄대학을 창설했다(1886년에 제국대학으로 명칭이 바뀜).
일본이 서양식 학제를 정식으로 도입한 것은 1872년이었다. 당시 메이지 신정부는 “모든 마을에 불학(不學)의 가정이 없고, 모든 가정에 불학의 인간이 없도록 기한다”고 선언했다. 그 후 1900년에는 여섯 살부터 4년 동안의 의무교육 제도를 시행했고, 1907년에는 이를 다시 2년 더 늘렸다. 일본이 오늘날처럼 중학교 3학년까지 9년간의 의무교육을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이다.
여기서 잠깐 일본의 대학교육 역사와 사설학원인 ‘주쿠(塾)’에 관해 언급하기로 하자. 앞서 말한 대로 메이지유신 직후 근 2년 가까이 미국과 유럽을 돌아본 구미사절단, 그들은 새 국가건설을 위한 합숙 연수여행을 떠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각자가 견문한 신기한 서양문명을 놓고 밤이면 숙소에서 머리를 맞대고 긴 시간 서로 토론을 벌였다. 그래서 신흥국 일본을 일으키기 위한 보다 나은 방안을 짜내곤 했던 것이다.
그 무렵부터 일본은 외교적으로 영국과 가까웠다. 하지만 사절단의 토론에서는 “국가건설의 방향은 독일식을 따라야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전말은 이랬다. 영국의 경우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산업혁명에 성공했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이룬 다음 영국의 시행착오를 뛰어넘을 방도를 찾았다. 그것은 우수한 관료를 양성하여 우매한 백성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래야만 앞서가는 영국을 뒤쫓을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고, 그의 예견은 적중했다. 일본 사절단으로서는 일본이야말로 그 같은 비스마르크 방식을 본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럽을 좀 더 돌아다니며 공부하고 싶었으나 본국의 빗발치는 성화에 못 이겨 사절단은 귀국했다. 그 동안의 견문을 바탕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내각제를 도입하여 의회를 세운 뒤 초대 국회의장에 취임했다. 도쿄대학을 제국대학으로 개명하여 비스마르크식 인재양성에 착수했음은 물론이다. 처음에는 단 한 개로 시작했으나 턱없이 모자라 각지에 또 다른 제국대학을 설립하면서 이름에다 지명을 붙였다. 도쿄제국대학, 교토제국대학, 그리고 훗날 식민지 한국에는 경성제국대학이 생겨났다. 이처럼 일본의 국립대학이 학문연구보다 관료양성을 첫 번째 목적으로 했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롭다.
사설학원 주쿠의 등장은 공립학교였던 한꼬에 대한 대항 의식의 산물이었다. 큰 대접을 못 받던 유학자(儒學者)가 신분질서 타파를 겨냥하여 주쿠를 운영했다는 주장도 있다. 에도시대 초기에 일본 양명학의 시조라는 나카에 도주(中江藤樹)가 일찌감치 한학 주쿠를 차렸다. 그 뒤를 이어 국학 주쿠도 선보였고, 에도 말기에 가면 독일인에 의한 양학 주쿠가 문을 열기도 했다.
이들 주쿠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19세기 말의 사상가 겸 교육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세운 것을 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것이 발전하여 오늘날 일본 양대 사학의 하나로 우뚝 선 게이오(慶應)대학이 탄생했으니까 말이다. 게이오대학의 정식 명칭이 게이오‘기주쿠(義塾)’대학인 것이나, 학생을 ‘주쿠세이(塾生)’이라고 부르는 등 ‘주쿠’라는 글자가 포함된 것이 다 그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는 주쿠라고 피해갈 리 없었다. 현재 일본에는 피아노나 수영 등 취미와 특기의 영역을 교습하는 주쿠에 코흘리개들이 몰리고 있다. 또한 오로지 입시에 대비하여 과외수업에만 몰두하는 ‘학습 주쿠’의 기세도 여간 아니다. 그 점, 한국이나 일본이나 대동소이하다.
일본의 학교라고 해서 문제점이 없을 리는 없다. 우리에게도 전염되어 왕따라는 용어를 낳은 ‘이지메’ 문제, 게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학생들이 자꾸 늘어나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 일본어로 ‘후토코(不登校)’라 불리는 이들 학생의 숫자가 자그마치 13만 명, 초중고 한 학급에 한 명 꼴을 넘어섰다니 사회문제가 되고도 남을 현상이다. 한국의 자퇴 학생은 주로 내신 성적 문제나 해외 유학 붐으로 발생한다지만 일본의 ‘후토코’는 다르다. 일본정부 조사로는 절반가량이 급우들과의 마찰이 원인이고, 나머지는 성적 부진과 교사와의 관계라고 한다.
어쨌거나 일본인의 교육열도 알아주어야 한다. “일본에서는 거지도 읽고 쓸 줄 안다”고 으스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의 말을 통계자료가 입증한다. 취학률이 초․중등학교 1백%, 고교 97.59%, 대학 49.9%, 대학원 14.0%이다(2004년도). 10명 가운데 6명 이상이 유치원을 거치기도 한다.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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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y2cho8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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