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⑲  

     「글쎄요, 민족자결주의는.」
    하고 백악관 비서실장 튜멀티(Joseph Tumulty)가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백악관의 비서실장실 안에서 튜멀티와 단둘이 마주 앉아있다. 비서실장 독대인 셈인데 이만하면 나에게 최상의 예우를 갖춰 준 셈이다.

    그러나 지금 백악관 밖에는 뉴욕 국민회 회장 윤기술과 워싱턴회장 박명옥, 필라델피아에서 달려온 김병구까지 10여명의 교민이 기다리고 있다.

    튜멀티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6년 전의 6월 30일,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시거트 별장의 만찬장에서도 튜멀티는 이런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호의가 담긴 시선이다. 그때 나는 둘러앉은 측근들 중 국무장관, 국방장관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튜멀티가 가장 핵심인 비서실장이 되었다.

    튜멀티가 말을 이었다.
    「리, 솔직하게 말씀 드리지요. 대통령이 연두 교서에서 말씀하신 민족자결주의는 조선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나는 잠자코 튜멀티를 보았다. 짐작은 했지만 가슴이 쇳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백악관 앞에서 기다리는 교민들의 얼굴도 차례로 떠오른다.

    튜멀티가 둘이 있는데도 목소리를 낮췄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민족에 따라 여러개 국가로 분리시켜 후환을 없애려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오프 더 레코드 따위의 용어도 없었지만 튜멀티는 나에게 일급비밀을 털어놓고 있다.
    「조선의 위임통치안」을 들고 온 내 절박한 모습이 안타까웠던 것 같다.

    튜멀티의 말이 이어졌다.
    「발칸반도나 동유럽 패전국 영토의 소수민족 해방이 이번 「민족자결주의」의 목표입니다. 리.」
    「고맙습니다. 튜멀티.」

    머리를 숙여 보인 내가 물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변함이 없습니까?」
    「현재로서는.」

    외면한 채 튜멀티가 말을 이었다.
    「러시아의 태평양 진입을 막는 우방으로 일본이 필요하거든요.」
    「지난 3월 1일에 조선 땅에서 일어난 내란을 아십니까?」
    나는 내란이라고 표현했다.

    그러자 튜멀티가 머리를 끄덕였다. 차분한 표정이다.
    「예, 지금은 다 진압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수천명이 죽었습니다. 수십만명이 궐기를 했구요. 그런데 일본군은 비무장 군중들에게 발포를 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나는 튜멀티의 공허한 눈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족자결주의」가 어디를 대상으로 한 것인가를 말해 준 튜멀티다. 그쯤하면 알아들어야 할 위인이 딴 소리만 한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내가 백악관을 나왔더니 기다리고 있던 교민들이 우르르 몰려와 나를 둘러쌌다.
    「대통령 만나셨습니까?」
    누가 묻길래 나는 머리부터 저었다.

    문득 14년 전인 1905년 민영환으로부터 고종의 밀서를 받아 루즈벨트를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루즈벨트는 필리핀과 조선 땅을 미국과 일본이 나눠 갖기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해놓고서 나에게는 청원서를 국무장관을 통해 정식으로 접수시키라고 했었다. 그때보다는 낫지 않은가?

    내가 동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비서실장한테 청원서를 접수시켰고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발칸반도의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동포들은 잠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생기를 띤다.

    백악관 비서실장을 만난 것만 해도 큰 일을 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