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해 전, 한국 매스컴에 조그맣게 보도된 하나의 사고 소식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 있을지 모르겠다. 일본이 차세대 초음속 여객기(SST)를 개발해 왔으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행해진 실험비행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뉴스가 그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한국인들은 필경 ‘놀라움’과 ‘안도’가 가슴 속에서 교차하지 않았을까 싶다. 놀라움은 일본이 벌써 초음속 여객기에까지 손을 대고 있다는 점이겠고, 안도는 그나마 다행히(?) 실패하고 말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케케묵은 격언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으리라. 첫술에 배 부르랴는 속담의 뜻을 모르는 일본인도 없을 것이고.... 당시의 일본 항공우주기술연구소(NAL)는 이미 실패를 예상이라도 한 듯 2대의 실험기를 만들어 놓았고, 4번의 실험비행을 더 예정하고 있다고 했다. 다각도로 실패의 원인규명에 나선 그들인 만큼, 언젠가는 성공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아는 초음속 여객기는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 개발한 콩코드이다. 일본이 개발에 매달리고 있는 SST는 콩코드에 대신할 새로운 초음속 여객기로, 2015년의 실용화가 목표라고 한다. 현재까지 나와 있는 자료를 살펴보니 SST는 콩코드의 3배인 3백 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고, 항속거리도 두 배나 된다. 따라서 이 일본제 초음속 여객기가 하늘을 누비게 되는 날이면, 예컨대 어학연수를 떠나는 한국 유학생을 서울에서 뉴욕까지 5시간 30분 만에 데려다 준다.
    게다가 H2A 로켓 발사에 성공한 다음,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로 통합된 초음속 여객기 담당 파트에서는 SST를 더욱 발전시킨 야심 찬 계획을 새롭게 내놓았다. 수소 연료를 사용하는 극초(極超) 음속 비행기라고만 밝힌 이 여객기는 비행 속도 마하5로, 도쿄와 로스엔젤리스 사이를 2시간에 주파할 것이라고 했다. 현재의 계획으로는 2025년까지 실험을 마친 뒤 2030년부터의 실용화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다들 잘 알다시피 일본은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다. 세계에서 최초로 원자폭탄까지 맞은 다음에야 항복했다. 우리가 광복절로 기리는 8월15일, 바로 그 날이 그들에게는 패전의 날이다. 일본 땅에 상륙한 맥아더 장군의 점령군 사령부는 전쟁에 협조한 군수산업체에 철퇴를 가했다. 특히 첨단과학에 속하는 항공분야는 철저하게 봉쇄  당했다. 전쟁 당시 일본 해군이 자체 기술로 개발한 ‘레이센’이라는 이름의 성능 좋은 전투기의 공격에 미군이 애를 먹었던 탓이었다.
    레이센의 정식 명칭은 ‘영식(零式) 함상 전투기’였다. 1940년 첫 기종이 선보였는데, 초경량에다 항속 거리가 길고 무엇보다 몸놀림이 가벼워 그야말로 벌처럼 쏘고 나비처럼 날았다. 레이센에 혼쭐이 난 미군 조종사들은 ‘신비적인 공중전 성능!’이라면서 혀를 내둘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료에 의하면 레이센은 진주만 기습공격에 78기가 동원되었다. 그 중 불과 9기가 격추되었던 데 비해 하와이 기지에서 날개를 접고 있던 미군기는 모두 3백11기 가운데 간신히 79기만 살아남았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말기에 레이센은 격무에 시달리면서 차츰차츰 최첨단 전투기로서의 빛을 잃어 갔다. 패전할 때까지 총 1만 370기의 레이센이 제작되었는데, 그 중 8% 가량만 남기고 나머지는 젊은 조종사들과 더불어 죄다 이슬로 사라졌다.
    그 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발효로 일본이 완전한 주권국가가 된 1952년까지 일본의 항공 산업은 캄캄한 암흑기였다.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항공과학은 다른 분야와 달라 5년의 공백기가 50년의 기술 후퇴를 가져온다”는 말이 정설처럼 나돌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이제 그 엄청난 공백을 메우고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가? 사무라이 정신 덕일까, 예의 바르고 친절하다는 민족성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직업의 귀천 없이 한 우물만 죽어라 파는 외곬이 많아서일까? 곰곰 따져서 벤치마킹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으리라.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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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y2cho8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