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⑯  

     그날 이후로 나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장악했다. 나는 권력이란 국민의 지지가 바탕에 있어야 형성된다고 교육받았으며 체험을 한 사람이다.

    하와이에 온 후에 나는 학교와 교회, 그리고 잡지 발간 일에만 몰두했어도 그것이 바로 내 뿌리가 되었다.
    나는 하와이 유인도 8곳을 샅샅이 훑고 다니면서 교육 사업을 했고, 계몽 강연을 했으며 독립에 대한 소망을 함께 나누었다.

    교육받지 못하는 소녀들을 데려와 기숙학교에 넣었으며 노동자들을 위한 한글 잡지를 나 혼자 만들어 배포했다. 내가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를 장악하기 위해서 이랬겠는가?

    국민회의 회비 횡령 사건으로 전현직 임원 사이의 소송이 이어지면서 회비 입금 자체도 허공에 뜬 상태가 되었을 때 내가 하와이 한인 교회에 나가 소리 쳤다.
    「대한인국민회 회비를 내 구좌로 입금하시오!」

    그랬더니 전년도보다 더 많은 회비가 입금되었다. 그러나 나는 국민회 운영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당시 국민회 중앙총회장은 안창호였고 교민 대다수가 거주하는 하와이총회에서 박용만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잘 된 인선이었다.

    안창호는 나보다 세 살 연하인 1878년 생으로 당시 38세였는데 한인여학교 신축공사 낙성식에 참석해 축하해 주었다.

    「교육 사업에 성과를 올리셨습니다.」
    식을 마친 우리가 새 회의실에 둘러앉았을 때 안창호가 새삼스럽게 인사를 했다.

    안창호는 평남 강서 출신으로 언변이 유창하다. 목소리의 고저(高低), 강약을 조절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그의 연설을 들으면 가슴이 뛴다. 그리고 친화력과 포용력이 강해서 주의에 사람들이 모인다. 나하고는 다른 성품이다. 더구나 조직력이 뛰어나 흥사단(興士團)이란 단체를 결성했는데 대부분 서북지방 청년들로 안창호에 대한 충성심이 절대적이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박용만이 거들었다.
    「형님께선 이곳에서 배운 여학생들이 모두 외교관이 되어 세계 각국의 왕, 대통령을 설득하거나 그것도 안되면 부인이 되어서 조선 독립에 기여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와, 하고 웃었지만 나하고 안창호는 쓴웃음만 지었다. 그러고 보니 독립 방법에 대한 세가지 유형의 운동가가 다 모인 셈이 되었다.

    박용만은 무력(武力) 독립이야말로 당당히 주권을 찾는 방법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안창호는 자주독립은 교육을 통한 국민운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나는 외교의 중대성을 끈질기게 강조했으니 박용만이 농담으로 그렇게 말 할만 했다.

    안창호가 다시 나에게 말했다.
    「제가 세운 평양의 대성학교가 생각나는군요.」

    그렇다. 안창호는 평양의 대성학교뿐만 아니라 조선 최초의 남녀공학인 점진학교도 창설했다. 교육열에 대해서도 나보다 낫다.

    그때 다시 박용만이 거들었다.
    「형님께서 하와이사단을 만드신다면 하와이 조선인 대통령이 되실 텐데요.」

    주위의 사람들이 다시 웃었고 나와 안창호의 시선이 마주쳤다. 안창호의 얼굴에도 쓴웃음이 배어나와 있다. 박용만은 정말 장군이 되어야만 한다. 임기응변뿐만 아니라 일거삼득을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를 비꼬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안창호에게도 면박을 준다. 흥사단 대신 하와이사단을 내 놓은 것이다. 하와이 조선인들이 모두 내 수족이 되어있다고 주위 사람들까지 비꼬는 일거삼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