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⑭  

     한인기숙학교를 중앙학교로 이름을 바꾼 나는 남녀공학을 실시했는데 한인 최초의 남녀공학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학생 기숙사를 세웠다. 그래서 그 기숙사로 내가 하와이에 왔을 때 카우아이(Kauai)섬 교회에서 만난 김미옥이도 데려올 수 있었다.

    나는 또한 경성에서 최상호를 초청하여 하와이 YMCA를 결성했다. 교민을 위한 선교와 교육 그리고 선교조직 활동에 전념한 셈이다. 이것은 내가 대한제국 시대에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서 계몽사업의 선두에 섰던 분위기나 같다.

    목회 활동처럼 교민의 단합과 정신 고양에 최적의 장소는 없는 것이다. 내가 하와이에 온 후로 교인이 배로 증가했으니 감리교 본부는 만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와이 섬에서 정육점을 하는 교민 안수일이 나를 찾아왔을 때는 오후 3시쯤 되었다.

    태평양잡지 원고를 쓰고 있던 내가 자리를 권하고는 중년의 안수일을 보았다. 안수일은 1903년 초에 사탕수수 노동자로 부부와 두 아들, 딸과 함께 이민 온 후에 악착같이 일을 해서 10년 만에 시내에 정육점을 두 개나 소유한 사업가가 되었다.

    20대의 두 아들은 겨우 국문을 읽는 처지로 정육점에서 일하지만 딸 선경이는 지금 중앙학교 학생이다. 안수일은 내 교육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후원자인 것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40대 중반의 안수일이 똑바로 나를 보며 말했다.

    안수일은 충청도 보은 출신의 양반이다. 아버지가 진사였지만 찢어지게 가난해서 식구들이 하루 먹으면 이틀 굶고 지내다가 결국 어린 세 자식을 끌고 이민선을 탔다. 그리고는 이곳에서 천민이 하던 정육점을 차린 것이다.

    안수일이 말을 이었다.
    「어제 학교 성금으로 낼 돈 5백불을 아들놈이 국민회 총무가 성금을 모으러 왔을 때 줘 버렸네요. 그래서.」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은 안수일이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내가 아침에 총무를 찾아가 그 돈이 교사 신축비로 갈 돈인데 잘못 전해졌다고 했더니 알았다면서 곧 교장선생님께 전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가슴이 무거웠지만 인사는 했다.

    돈과 가깝게 있으면 언제나 잡음이 일어나는 법이다. 나는 가능하면 돈과 멀리 떨어지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언제나 가난했지만 마음은 편했다. 불편한 채 돈을 쥐고 있지는 못하겠다.

    내 인사를 받았어도 안수일은 개운한 표정이 아니다. 다시 안수일이 말을 잇는다.
    「오늘 저녁때까지 교장선생님께 돈을 전해 드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알고 계시지요.」
    「이렇게 수고를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안선생님.」

    다시 내 인사를 받은 안수일의 얼굴이 조금 펴지기는 했다.
    그러나 안수일의 우려가 맞았다. 그날 오후는커녕 일주일, 열흘이 지나도 국민회 총무 김응겸한테서는 연락도 오지 않았다.

    국민회 간부들이 회비를 횡령한다는 소문이 오래 전부터 돌았고 나도 교민들로부터 많이 들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회비는 회비대로 걷고 간부들의 본토 출장비, 본토 중앙총회의 행사비 등 각종 성금을 따로 걷었는데 회비보다 많았다. 그러나 연말 결산도 임원 몇 명만 모여 끝내고는 신문에 발표 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보름이 지났을 때 내가 국민회 사무실로 김응겸을 찾아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벌써 입금이 끝난 것이라 곤란합니다. 국민회 성금으로 되어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