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建國 記憶의 60년간의 行步
                                      李榮薰(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1. 問題提起

    大韓民國은 언제 세워진 나라인가? 대한민국의 建國日은 언제인가?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자기 나라가 세워진 날을 기념하는 獨立紀念日(Independence Day)을 두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건국일 또는 독립기념일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光復節이 그날이 아닌가?

    대부분의 한국인은 광복절을 그들이 日帝의 억압으로부터 解放된 것을 기념하는 날로 기억하고 있다. 달리 말해 광복절은 곧 解放節이다. 그날에 대한민국이 세워졌다는 의식은 분명치 않거나 거의 없는 편이다.
    2008년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백과에서 ‘대한민국 건국절’이란 項이 생겼다. 그 내용을 보면 “대한민국의 건국을 기념하는 날로서 아직 정식 기념일로 인정되고 있지는 않다. 이에 관한 논쟁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세계가 참고하는, 약 250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는 백과사전에서 대한민국은 건국일이 없는, 그에 관한 논쟁만 있는, 나라로 나와 있다. 대한민국은 아직 자신의 생일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正常國家라 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세계의 주요 국가들, 특히 대한민국의 성립과 역사적으로 깊은 연관을 맺었던 국가들의 광복절 이해는 다른 것 같다. 예컨대 금년의 광복절을 맞아 美國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정부에 대해 “8·15 광복절(Korean Independence Day)을 맞아 미국 국민을 대신해 한국에 축하를 전하고 미국 및 전 세계에 있는 한인들에게도 축하를 전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왔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 지난 62년 동안 우리 양국은 강력하고 지속적인 동맹을 향유해 왔다”라고 兩國의 역사를 회고하였다. 여기서 명확하듯이 미국은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독립하였으며 광복절은 그것을 기념하는 한국의 獨立紀念日(Independence Day)이라는 이해를 갖고 있다.

    실은 이러한 미국의 광복절 이해는 오래전부터 연례적으로 되풀이되어 온 것이었다. 예컨대 1968년의 광복절을 맞아서 미국의 딘 러스크 국무장관은 “대한민국 수립 20주년에 즈음하여 한국국민과 한국정부에 보내는 축하메시지를 발표하였다”고 동일자『朝鮮日報』는 보도하였다. 동 신문은 영국의 엘리자베스여왕도 한국의 ‘건국20년’을 축하하는 電文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이 같은 國外의 사정을 고려하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신의 건국일이나 독립기념일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원래 그런 날이 있었지만 한국인들이 지난 60여년의 세월에서 그것을 잊어버렸거나 다른 기억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유력하게 제기할 수 있다. 어쨌든 오늘날 한국인들은 자신의 건국사에 대해 서로 상이한 이해를 갖고 있으며, 그것은 한국인들이 일상적으로 노정하고 있는 정치ㆍ사회의 분열 내지 갈등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예컨대 2008년 새로 들어선 李明博 정부가 그 해의 光復節을 ‘建國60周年’으로 기념하고자 했던 공식 式典과 각종 기념행사에 野黨은 불참하였다. 당일 야당은 별도의 장소에서 별도의 기념식을 가졌다.
    이는 한국정치사에서 前例가 없는 일이었다. 야당은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미 1919년 上海臨時政府의 수립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야당 국회의원과 그에 동조하는 사회단체와 역사학자들은 憲法裁判所에 정부의 ‘건국60주년’을 기리는 각종 행사가 違憲이라는 憲法訴願을 제기하였다.

    光復會라는 사회단체도 동일한 반응을 보였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위탁을 받아 박효종 등이 지은『건국 60주년 위대한 국민 새로운 꿈』이란 책자가 그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 책에서 박효종 등은 3ㆍ1운동으로 성립한 大韓民國臨時政府가 民主共和制를 기본 이념으로 설정함으로써 自由民主主義의 이념이 한국인의 정치의식으로 자라는 계기되었다고 하여 임시정부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다음, “그러나 임시정부는 자국의 영토를 확정하고 국민을 확보한 가운데 국제적 승인에 바탕을 둔 독립국가를 대표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이 대목을 두고 임시정부를 받들고 있는 광복회가 크게 반발하였다. 광복회의 회원들은 독립운동의 종사한 그들의 공적을 기려 정부가 그들에게 수여한 建國勳章을 반납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극단적인 반발에 부딪힌 문화체육관광부는 전국의 학교나 기관에 이미 배포한 위 책자를 회수하는 것으로 광복회를 무마하였다.

    결과적으로 ‘건국60주년’을 기리고자 했던 이명박 정부의 입장은 일부 국민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다수 국민이 그에 반발했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일부 국민이 강하게 반발함으로써 국민 일반으로부터 넓은 동의를 얻지는 못하였다. 광복회의 반발에 정부가 쉽게 양보하였듯이 정부의 당초 입장도 그리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 野黨과 光復會가 책임 있게 대안을 내세운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1919년 우리 민족이 日帝의 지배로부터 獨立을 선언한 3ㆍ1운동과 뒤이은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대한민국이 세워졌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오늘날 대한민국의 4대 국경일 가운데 三一節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일인 것이다. 아니면 좀 더 구체적으로 上海에서 (統合)임시정부가 성립한 1919년 9월 11일이 대한민국의 진정한 건국일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주장까지는 제기되지 않았다. 삼일절에 관한 국민적 기억도, 두산백과사전이나 네이버 백과사전에 의하면,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로만 되어 있지 대한민국의 건국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2008년 11월 憲法裁判所는 야당 등이 제기한 헌법소원을 裁判部 전원 일치로 기각하였다. 이로써 '건국60주년'을 부정하고자 했던 야당 등의 주장은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그렇지만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건국60주년’의 각종 행사가 국민의 基本權을 침해했다는 야당 등의 주장에 대한 法理的 판단으로서 그 모순을 지적한 것이었지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1948년 8월 15일로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판단은 司法府의 업무라기보다 국민적 동의가 요구되는 政治의 영역이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歷史學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국의 역사학은 2008년 내내 이상과 같은 논란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편이었다. 그 점에서 논쟁은 아직 종결을 본 상태가 아니며, 해마다 광복절을 맞아 또는 언제라도 계기가 주어지면 다시 부활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는 실정이다. 

    한 나라의 建國史에 대한 국민적 기억은 그 나라의 建國理念에 대한 국민적 동의와 참여가 형성되는 기초적 조건을 이룬다. 그에 관한 국민적 기억이 분열해 있음은 건국이념에 대한 국민적 동의와 참여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를 반영할 수 있다. 한국의 사회와 정치가 비생산적인 갈등으로 언제나 소란스러운 것도 건국사에 대한 국민적 기억이 분열되어 있는 데 그 주요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이 국민적 과제로 추구하고 있는 先進國으로의 진입도 안정적인 국민적 통합의 바탕 위에서 추구될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지금과 같은 건국사에 대한 국민적 기억의 분열은 바람직한 상태라고 할 수 없다. 그 점에서 與와 野를 떠나 또는 保守와 進步를 불문하고 지향하는 바의 차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본 논문은 이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현실이 초래된 역사적 경위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1948년의 ‘대한민국정부수립’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이 지금까지 60년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추적하고자 한다. 時間帶마다 역사의 무대에서 활동했던 정치가나 이를 지켜 본 일반 국민의 기억을 가급적 원형 그대로 복원해 내는 것이야말로 혼란을 극복해 가는 捷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이 논문은 1945년 8월 15일 이후 지난 65년간의 『東亞日報』를 기본 자료로 하여 동 신문에서 ‘해방’, ‘광복’, ‘독립’, ‘건국’, ‘정부수립’ 등의 용어가 누구에 의해 어떠한 의미로 쓰였는지는 포괄적으로 조사하였다. 1948~1959년간은 정부의 기관지 역할을 한『서울新聞』도 참고하였다.


    2. 建國 談論의 만발(1945~1948)

    우선 우리 민족이 日帝의 壓制로부터 풀려 난 1945년 8월 15일에 대한 기억이 어떠했는지부터 검토하자.
    그날은 ‘解放’이었다. 1946년 8월 15일은 ‘제1회 해방기념일’이었다.『동아일보』는 해방 기념의 식전이 열렸다고 하면서 4면의 타이틀을 “오직 한 길 독립에로”, “독립의 날을 열망하며”로 달았다.
    기념식에서 개회사를 한 吳世昌은 해방을 가져다 준 聯合軍에 대해 감사를 표한 다음, 연합군이 약속한 ‘독립의 길’로 전진하자고 하였다.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金九는 美軍政에 아부하지 말고 자력으로 ‘완전독립’을 이룩하자고 호소하였다(『동아일보』1946년 8월 16일, 이하 신문명은 생략하고 46.8.16.으로 약기함, 서울신문이나 다른 신문에 대해서는 ‘서울’, ‘조선’ 등으로 신문명을 표기함).

    마찬가지로 1947년 8월 15일은 ‘해방2주년기념일’이었다. 李承晩은 美蘇 양국이 약속을 이행하여 한국을 ‘자주독립’하게 하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다시 김구는 ‘自律政府의 戰取’에 전 민족이 재단결하라고 촉구하였다. 당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은 한국의 ‘자유독립’을 보장한다고 하였다(47.8.16.).

    이처럼 해방의 기쁨은 ‘獨立’에 대한 열망과 함께 경축되었다.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완전독립’ 또는 ‘자유독립’이었다. 그 근거로 지목되고 또 하지 사령관도 再闡明한 聯合國의 약속은 주지하듯이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12월 1일 미국, 중국, 영국의 연합국 수뇌가 발표한 카이로선언에서 이루어졌다. 이 선언은 한국 문제와 관련하여 “위의 세 열강은 한국의 奴隸狀態에 유념하면서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게 되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정하였다”고 하였다. 뒤이어 1945년 9월 7일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38도선 이남에 美國軍을 진주시키면서 한국인에 대해 발한 布告令에서 위의 카이로선언을 재확인하고 점령의 목적이 거기에 있음을 천명하였다. 9월 18일에는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이 “한국 해방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 마지막 부분에서 “이 해방의 순간에서 우리는 앞에 가로놓인 어려운 과제를 생각합니다. 偉大한 國家를 세우는 일이 지금 미국, 중국, 영국 그리고 소비에트의 도움으로 막 시작되었습니다. 이들 네 나라는 한국이 자유롭게 되고 독립하게 됨에 동의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당시 한국의 국제적인 법적 지위는 일제의 압제 하에서 ‘奴隸狀態’에 있다가 연합국의 도움으로 풀려나 자유와 독립의 국가를 세우는 과제를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1, 2회 해방기념일을 맞아 유력 정치인들이 발표한 성명도 이 같은 상황과 국제적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고,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이 확인해 준 ‘자유독립’도 그러한 근거에서 나온 것이다. 요컨대 해방 이후 민족의 앞에 놓인 과제는 자유와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것, 트루만 대통령이 이야기한 “偉大한 國家를 세우는 일”(building of a great nation)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이러한 상황 인식과 그를 규정한 국제적 조건을 둘러싸고 국외는 물론 국내에 걸쳐 異論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해 이미 세워진 國家가 健在하다거나 앞으로 세워질 것은 그 국가의 새로운 政府일 뿐이라는 주장은 당시의 그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제기되지 않았다.

    당시의 한국인들은 자유와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두고 ‘建國’이라고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에서 1948년 8월 15일의 ‘정부수립’까지는 이 같은 의미의 建國 談論이 만발한 기간이었다. 좌파나 우파 할 것 없이 이 점에서는 동일하였다. 해방과 동시에 中道左派의 呂運亨이 중심이 된 建國準備委員會의 결성이 그 좋은 사례이다. 그해 12월 臨時政府의 還國은 건국 담론을 연 중대 계기였다.
    미국은 시종일관 임시정부를 亡命家들의 단체로 간주하였으며, 이에 임시정부는 개인자격으로 환국할 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수행원과 더불어 제일 먼저 귀국한 임시정부의 주석 金九는 도착 다음 날 발표한 성명에서 “全國的 普選에 의한 정식 정권이 수립되기까지의 국내 過渡政權을 수립하기 위하여 국내의 각 계층, 각 혁명당파, 각 종교집단, 각 지방대표의 저명한 民主領袖會議를 소집하도록 적극 노력할 것”과 “국내 과도정권이 수립된 즉시에 본 정부의 임무는 완료된 것으로 인정하고 본 정부의 일체 직능 및 소유 물건은 과도정권에 교환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처럼 환국한 임시정부는 그 자신을 하나의 국가를 대표하는 정부라고 自任하지 않았고, 過渡政權이라도 세워지면 스스로 해산할 의향을 지닌 團體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였다.

    뒤이어 임시정부의 전 國務委員이 환국하였다. 전 국민이 주시하는 가운데 그들은 서울 京橋莊에서 환국 후의 첫 國務會議를 가졌다. 회의를 마친 다음 趙 외무장관은 대기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임시정부를 일본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해 온 ‘民族運動의 工具’와 ‘建國運動의 工具’라고 규정하였다. 연후에 임정이 “이 강토 안에 建國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또는 “우리 민족이 요망하는 政府樹立을 담당할 기관”임을 천명하였다(45.12.7.). 여기서 천명된 임시정부의 입장은 먼저 들어온 김구 일행이 발표한 성명에서보다 훨씬 강화된 것이었다. 요컨대 앞으로 있을 ‘건국’ 또는 ‘정부수립’은 임시정부가 주도하겠다는 의지가 강력히 표명되었다.

    뒤이어『동아일보』는 임시정부가 1941년에 발표한 ‘建國綱領’에 대한 해설 기사를 3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三均主義에 기초한 건국강령은 건국과정을 3단계로 설정하였다. 제1기는 敵의 통치기구를 국내에서 완전히 撲滅하고, 中央政府와 中央議會의 정식 활동으로 主權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단계이며, 제2기는 三均制度를 골자로 한 憲法을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와 大生産機關의 國有가 완성되는 단계이고, 제3기는 建國의 完成期로서 군사, 교육, 행정, 생산, 위생, 경찰, 농․공․상, 외교 등 모든 방면에서 건국에 관한 일체의 기초시설을 성취하는 단계이다(45.12.17~19.)

    이처럼 임시정부는 일제의 억압에 맞서 독립과 건국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해 온 단체였으며, 그 권위에 기초하여 장차 단계적으로 수행될 건국 과정을 주체적으로 수행할 것을 자임하는 단체였다. 임시정부 자신이 이미 건국을 수행하였으니 국내의 모든 정치단체는 임시정부의 권위에 服屬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 번도 펼쳐진 적이 없었다.

    이 같은 임시정부의 기본 입장은 臨政의 주요 인사들이 환국 이후에 펼친 各樣의 정치활동에서도 잘 확인되고 있다. 김구 주석은 1946년 12월 獨立戰線에 초석이 될 건국실천자를 양성하고 지도하는 建國實踐員養成所를 설치하기 위한 준비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46.12.8.). 李始榮 국무위원은 1946년 5월 三一建國同志會의 발기를 주도하였다(46.5.8.). 이는 당파를 초월하여 전 민족적으로 3ㆍ1운동의 정신을 영원히 계속하여 자주독립의 완성을 기하자는 취지였다. 여기서도 독립과 건국을 장래의 과제로 설정하고 준비하는 임정 요인들의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국내의 다른 유력 정치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947년의 3ㆍ1절을 맞아서 安在鴻은 『동아일보』에 ‘三一精神과 建國救民’이란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그는 階級과 宗派를 초월한 전 민족적 자유와 독립을 위한 운동이 3ㆍ1정신임을 밝힌 다음, 이 정신에 기초하여 ‘자주적 건국’ 또는 ‘완전한 자주독립’을 성취하자고 주장하였다(47.3.1.).

    임시정부의 환국을 계기로 건국 담론은 정치 영역을 넘어 사회, 경제, 문화의 모든 방면에 걸쳐 활짝 만발하였다. 지저분한 서울거리를 청소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朝鮮建國靑年會가 결성되거나(45.12.14.), 생필품 배급을 담당할 建國産業聯盟이 조직되기도 했다(45.12.18.). 稅務行政과 관련해서 납세는 “건국에 협력하는 일”이므로 기한 내에 세금을 내자든가(45.12.14.), ‘建國稅政’의 만전을 기하기 위해 建國稅務週報가 발행되었거나(45.12.25.), “납세는 건국의 힘”이라는 슬로건이 내걸렸다(46.9.25.). 비슷한 예는 일일이 다 소개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허물어진 산업을 하루빨리 재건하여 ‘건국의 대업’을 성취하자거나(45.12.20.), 예금을 늘리기 위해 建國貯蓄運動을 벌리거나(45.12.20.), “저축 없이 건국 없다”라고 슬로건이 내걸리거나(46.8.21), 미군정청 鑛工局에 특허과를 설치하면서 “건국의 토대는 발명”이라 하거나, 衛生化學硏究所를 설치하면서 “건국은 실험실로부터”라고 하거나(46.2.8.), 해방 후 우리 손으로 처음 제작한 기관차를 가리켜 ‘建國1號’라고 이름을 붙이거나, 산업건설에 공헌을 근로자를 표창하면서 “건국에 노력하는 모범근로자”라고 하거나(47.3.19), 월남한 동포와 해외 歸還同胞에게 항구적인 직업을 주어 ‘건국의 役軍’으로 삼자고 하거나(46.6.3.) 등등이 이 시기에 만발한 건국 담론의 좋은 예들이다.

    건설될 국가의 기본 이념을 둘러싸고 民主陣營과 共産陣營 사이의 대립이 깊어짐에 따라 건국 담론은 점차 우파 민주진영의 정치적 슬로건으로 專有되면서 좌파 공산진영을 탄압하는 명분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를 당시에는 ‘建國治安’이라고도 불렀다. 1946년 1월 경기도는 ‘건국치안’을 확보하고 악질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중요 기관에 武裝警官을 배치하였다(46.1.22.). 동년 12월 경기도 경찰부는 명랑한 ‘建國道政’을 이루기 위해 불법 무리들이 가지고 있는 총기와 탄약을 강력 몰수한다고 하였다(46.12.1.). 1947년 6월 전남 長興警察署 소속의 方 警査는 좌익의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순직하였는데 “桑田이 碧海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건국의 초석이 되겠다”는 말을 남겼다(47.6.6.).

    건국 담론은 서울과 주요 도시만의 일이 아니었다. 건국 담론은 농촌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였다. 예컨대 1947년 4월 沃溝郡 瑞穗面에서는 면내 유지 200여 명이 建國自衛靑年團을 결성하였다(47.4.18.). 지방 당국은 동회와 번영회에 建國事業後援會費의 납부를 할당하였다. 建國事業費는 동회비, 야경비, 경찰후원회비, 소방후원회비, 청년단후원회비 등에 쓰였다. 농촌사회에까지 침투한 건국 담론은 그 강압적 성격으로 인해 농촌 주민의 불평 대상이 되기도 했다. 미군정은 해방 후의 경제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쌀의 강제수매[供出]를 시행하였다.
    1946년 9월 南勞黨은 이에 반발하는 농민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전남 장흥에 金冑現이란 선비가 있었다. 그의 일기에는 당시의 농촌상황에 절망하고 탄식하는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 예컨대 1946년 12월 17일자 그의 일기는 “양곡 공출령이 倭政 때보다 오히려 심하다. (중략) 이러고서도 建國인가, 이러고서도 獨立인가”라고 하였다.


    3. 政府樹立과 草創期(1948~1949)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그 일주일 전의 보도에 의하면 大韓民國政府樹立祝賀委員會가 오는 8월 15일을 기하여 ‘해방3주년’과 아울러 ‘정부수립’을 축하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국민 축하’를 전개하기로 하고 그 준비를 착착 진행 중에 있다고 하였다(48.8.7.). 이처럼 정부수립의 선포일을 8월 15일로 잡은 것은 3년 전의 해방의 기쁨도 함께 경축하기 위해서였다. 당일 中央廳 광장에서 열린 기념식의 광경을 전하는 잘 알려진 사진을 보면, 식장 정면에 ‘大韓民國政府樹立國民祝賀式’이란 플래카드가 길게 걸렸다. 그 아래에 두 장의 太極旗가 걸렸는데, 각각 달리 걸렸을 뿐 아니라, 태극기의 紋樣 자체가 잘못 그려져 있다. 이로부터 당시의 정부수립이 얼마나 엉성하게 준비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다.
     
    어쨌든 당일『동아일보』의 제1면은 중앙청 광장에서 장엄한 기념식전이 거행되어 “完全獨立을 萬邦에 선포”했다고 보도하였다. 제2면에서는 “해방4년 자주독립의 완전달성에 정부와 국민은 일체가 되라”라는 주문을 크게 달았다(48.8.16.). 서울만이 아니었다. 경축식은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충북 忠州 근방의 농촌사정을 전하는 한 儒生의 일기에 의하면 그날 ‘南鮮獨立建國式’이 거행되어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농악을 울리며 춤을 추고 술을 마셨다. 그 유생은 “南鮮 到處에 오늘처럼 놀지 않은 곳이 있으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하여 정치적 탄압이 심하였던 지역에서는 몇 달 뒤에나 경축식이 겨우 열릴 수 있었다. 어쨌든 해방의 기쁨을 독립의 열매로 맺고자 했던 민족적 염원이 1945년 8월 15일의 정부수립으로 일차 달성되었음이 그 날을 맞는 당시 한국인의 일반적 이해였다. 그 점을 당시의 신문과 개인일기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서두에서 소개한대로 1948년 8월 15일의 사건은 어디까지나 ‘정부수립’이며 대한민국의 ‘건국’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어서 여기서 당시의 ‘정부수립’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자세히 살피도록 한다.
    앞서 소개한대로 1945년 12월 환국한 임시정부는 스스로 “이 강토 안에 建國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또는 “우리 민족이 요망하는 政府樹立을 담당할” 기관임을 천명하였다. 이에서 분명하듯이 당시의 일반적 언어생활에서 ‘정부수립’은 곧 ‘건국’의 同語反覆이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을 기념하는 아치가 세종로 네거리에 세워졌다. 아치에 걸린 슬로건은 “慶祝大韓民國政府樹立”이었는데, 그 아래에는 영어로 “Long Live ! The Republic of Korea”라 하였다. 여기서도 명확하듯이 ‘대한민국정부수립’은 곧 '대한민국수립'이었다. 반복되고 있지만,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인들은 해방의 기쁨을 독립의 열매로 맺고자 했으며, 그러한 민족적 바램은 1948년 8월 15일의 정부수립과 세계를 향한 독립의 선포를 통해 일차 달성된 것으로 경축되었는데, 그것은 앞서 충분히 소개한 당시를 풍미했던 건국 담론이 전하고 있는 그대로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건국’이기도 했던 것이다.

    당시의 정부 당국자들이 1948년 8월 15일의 사건을 ‘정부수립’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이 같은 국내의 일반적 상식과 정서에 의해서만은 아니었다. 보다 중요하게는 그 사건을 가능케 했던 國際社會의 協約을 의식하고 그에 민감하게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당초 연합국 간에 한국을 독립시키겠다는 약속의 실행을 위해 美蘇共同委員會가 성립하여 臨時政府의 구성을 위한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였으며, 유엔 총회는 1947년 11월 14일 “유엔韓國臨時委員會의 설립과 한국 독립을 위한 계획 수립에 관한 결의”를 하게 된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1948년 3월 31일 전까지 成人의 普通選擧와 秘密選擧를 행하며, 임시위원회는 그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과 한국 인민의 자유와 독립의 즉각적인 성취에 관해 협의하며, 그 대표들이 國會를 결성하고 한국의 國民的 政府를 수립하도록 권고하며, 각 지역에서 선출되는 대표의 수는 인구에 비례해야 하며, 투표는 임시위원회의 관찰 하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이후 북한을 점령하고 있던 소련의 거부로 38도선 이남에서만 유엔한국임시위원회의 감시 하에 總選擧가 시행되고(1948년 5월 10일), 그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이 國會를 결성하고(1948년 5월 31일), 그 국회에서 憲法이 제정되어 선포되고(1948년 7월 17일), 마지막으로 유엔이 규정한 “국민적 정부를 수립”하는 일이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기념식으로 거행되었던(1948년 8월 15일) 일련의 역사적 과정은 널리 알려진 그대로이다. 다시 말해 1948년 8월 15일의 ‘정부수립’은 그 자체로 고립적으로 판단될 사건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유엔 총회의 “한국 독립을 위한 계획”에 근거하여 유엔한국임시위원회의 감시 하에서 주민의 총선거, 국회의 결성, 헌법의 제정, 정부의 수립이란 일련의 단계가 연속적으로 수행되고 마무리되는 총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다름 아니었다. 그 과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일반적 동의에 기초한 代議權力으로 근대 國民國家가 성립하는 建國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다시 말해 건국이 요구하는 일련의 법적 과정의 마지막 단계로서 정부수립이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회로부터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을 보고받은 유엔 총회는 1948년 12월 12일 한국 문제에 관해 “임시위원회가 관찰하고 협의할 수 있었던 한국의 범위에서, 한국 전체에서 인민의 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실질적인 統制와 司法權을 행사하는 하나의 합법적인 정부(대한민국의 정부)가 성립했음과, 이 정부가 임시위원회가 관찰한 한국의 범위에 있는 유권자의 自由意志의 유효한 표현이라 할 수 있는 選擧에 기초하였음과, 그 정부가 한국에서 그러한 정부로서는 유일하다는 것을 선언한다”고 결의하였다.

    요컨대 이 결의는 韓半島 내에서 다수의 인민이 살고 있는 지역 범위에서 自由選擧에 기초한 代議權力으로서 대한민국과 그의 정부가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성립하였음에 대한 국제사회의 보증과 확인을 의미하였다. ‘하나의 합법적 정부’(a lawful government)라는 어귀에 괄호를 붙여 ‘대한민국의 정부’(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라고 그 國號를 명확했음에 특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어느 지역을 통제하는 기능적 권력체로서 정부만이 아니라 그 정부가 소속하는 국민국가도 동시에 國際法的 實在로 성립하였음을 명확히 선포하는 의미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위 선언에 이어 유엔 총회는 회원 각국이 한국 정부와 관계를 맺을 때 이상과 같은 사실을 고려할 것을 권하였다. 그에 따라 1949년 1월 1일 미국정부가 최초로 한국정부를 승인하였으며, 뒤이어 자유진영의 대부분의 국가가 대한민국을 승인하고 國交를 수립하였다.

    1949년 8월 15일은 제1회 獨立紀念日이었다. 당일 정부가 주도하는 ‘독립1주년기념식’이 거행되었다.
    거기서 이승만 대통령은 오늘은 “民國 건설 제1회 기념일”이라고 그 날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였다(서울49. 8. 16). 당일의 기념식에 대해 『동아일보』는 “대한민국독립 첫돌마지”라는 타이틀로 보도한 다음, “독립1주년을 맞아서”라는 社說을 실었다. 4면에는 “환희! 오늘 독립의 날, 남북통일의 결의도 굳게”라는 제목 하에 각종 행사의 보도와 해설 기사를 실었다(49.8.16.). 독립의 기쁨은 뼈저린 민족 분단의 아픔이기도 하였다. 이에 獨立의 歡喜는 統一의 誓願이기도 했다. 동 신문은 당시 한국인이 공유했던 그러한 민족감정을 위와 같이 대변하였다.

    해방공간을 풍미했던 建國 談論은 정부수립 이후에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1949년 6월에는 대한민국의 建國理念을 선양하는 포스터가 공모되었다(49.6.4). 정부는 ‘독립1주년기념일’을 맞이하여 建國功勞勳章令과 襃章令을 대통령령으로 공포하여 해당자에 수여할 채비를 하였다(49.7.8.). 동년 7월에는 헌법발포1주년기념식을 맞이하여 ‘民主建國의 전진’에 관한 소개가 있었다. ‘건국1주년식’을 맞아서 건국에 도움을 준 맥아더 장군이 초대되기도 하였다. ‘건국’을 기념하는 야구대회와 배구대회가 열렸는데, 관련 기사에서는 ‘정부수립기념’, ‘독립1주년기념’이라고도 하였다(49.8.17,19.).

    반복되고 있지만, 이처럼 ‘건국’, ‘독립’, ‘정부수립’은 당시 한국인의 일상 언어생활에서 모두 같은 뜻의 반복이었다. 독립1주년을 얼마 앞두고서는 불 속 같은 더위 속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노동하는 근로자들을 가리켜 ‘建國의 鬪士’라고 칭송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49.8.11.). 동년 12월에는 제1회 建國公債가 인플레를 예방하고 국방과 치안의 막대한 경비를 조달할 목적에서 발행되었다.『동아일보』는 건국을 돕기 위해 공채의 인수에 협조하자는 취지의 기사를 두 차례 실었다(49.12.8,11). 건국공채는 1962년까지 12회에 걸쳐 발행되었다. 1950년 5월에는 국민의 헌금으로 마련한 비행기를 ‘建國號’라고 이름 붙였다.

    이 같은 건국 담론은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 이후 전쟁으로 인한 경제 피폐, 정치 분열, 사회 혼란 등의 과정에서 급격히 시들어 갔다. 예컨대 1945~1961년『동아일보』는 도합 234건에 걸쳐 건국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1945~1949년의 4년간에 120건이 집중되었다. 나머지 114건은 1961년까지 12년간에 걸쳐 산발적으로 나오는데, 그것도 建國公債나 建國大學校 등과 같은 고유명사가 보도되는 일환에 지나지 않았다. 건국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장기에 걸친 단계적 과정이라는 긍정적이며 미래지향적이며 담론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하에서 소개하는 광복절의 제정도 한 몫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4. 光復節의 제정과 모순(1949)

    1949년 6월 2일 ‘國慶日 制定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 法制司法委員會에 회부되었다.
    당초의 회부된 원안에 제시된 4대 국경일은 三一節, 憲法公布紀念日, 獨立紀念日, 開天節이었다.

    동 위원회는 논의과정에서 수정안을 마련했는데, 헌법공포기념일을 制憲節로, 독립기념일을 光復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1949년 9월 21일에 있었던 본회의에서 白寬洙 법제사법위원장은 수정 이유에 대해 “‘삼일절은 삼일절 그대로 두고, 헌법공포기념일이라고 하는 것은 헌법을 제정한 제헌절로 하자, 또 독립기념일에 대해서는 광복절이라고 명칭을 하자, 그리고 개천절에 대해서는 일자를 음력과 양력의 相違가 있으니 그것은 (중략) 이후 본회의에서 결정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의미로 수정한 것입니다”라고 설명하였다.

    이처럼 광복절은 당초 원안에서의 독립기념일이 명칭 변경된 것이었다.
    이는 백관수 위원장의 제안에 이어 金鳳祚 의원이 제헌절을 국경일에 넣지 말고 나머지 셋만 국경일로 하자고 수정 제안하면서 “삼일절과 독립기념일-그것을 ‘光復節’이라고 할런지 ‘獨立節’이라고 할런지- 개천절 이 세 가지만 독립 국경일로 하자”라고 말한 데서도 어느 정도 명확하다.

    당시 제헌의원들은 獨立紀念日을 光復節로 명칭을 변경하는 데 별 다른 이의가 없었고, 그런 가운데 양자를 같은 의미로 이해했다고 보인다. 이후 법률안을 逐條 審議하는 과정에서 제헌절을 국경일에서 빼야 한다는 주장이 마지막까지 제기되었으나 부결되었다. 제헌절은 수정안대로 명칭 변경되어 국경일로 제정되었다.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명칭 변경하는 수정안은 재석 108명 중 가 81, 부 4로 통과되었다. 기권이 23표나 있었으니 그리 흔쾌한 동의는 아니었던 셈이다.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당초의 독립기념일이 광복절로 바뀐 사연을 다 알 수는 없다. 법안이 계류 중인 1949년 8월 15일이 전술한대로 ‘제1회 독립기념일’로 경축되었음을 고려하면 이 같은 수정을 쉽게 납득하기 힘든 바가 없지 않다. 어쨌든 남아 있는 기록에 의존하는 한, 당시 법안을 심의했던 제헌의원들은 명칭의 수정에 그리 큰 거부감이 없었고, 그만큼 두 명칭의 취지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修正案의 채택은 이후 두고두고 이어지는 後患을 남겼다. 독립기념일과 광복절은 그 명칭의 相違만큼이나 그 역사적 含意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광복절에 독립기념일의 역사적 의의를 충분히 담기는 어려웠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동아일보』에 수많이 언급된 ‘光復’이란 용어는, 오늘날 보통의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일제의 압제라는 빛을 잃은 암흑의 역사를 부정하고 다시 이전 시대와 같은 光明의 역사를 회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1945년 8월 15일의 해방 또는 그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을 가리켰다. 몇 가지 예를 소개한다.

    1945년 12월 중국에서 임시정부가 환국하였다. 그때 동 신문은 환국한 우리의 大韓臨時政府가 해외풍상 27년에 "祖國光復에 一路直進"하였다고 찬양하였다(45.12.1.). 임시정부의 권위는 光復軍에 있었다. 동 신문은 중국 대륙에 수천의 광복군이 건재하다는 등의 보도를 자주 내었다(45.12.3, 6, 46.2.5.). 광복군과는 별개인 義烈團에 대해서도 그들이 ‘조국광복의 一片丹心’으로 17년에 걸쳐 ‘山戰水戰의 투쟁'을 벌였다고 찬양하였다(45.12.10.). 1947년 미국에서 徐載弼 박사가 귀국하였을 때도 그를 ‘조국광복의 투사’라고 칭송하였다(47.7.3.). 임시정부의 주석 金九는 광복의 상징이었다. 그가 1949년 6월 암살되었을 때『동아일보』는 그의 평생을 “光復에 애쓰신 거룩한 생애”라고 추도하였다(49.6.28.). 이 모든 용례에서 광복은 1945년 8월 15일에 있었던 해방 또는 그를 위해 일제와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의 의미였다.

    광복이란 말이 독립 내지 건국과 같은 미래지향적이거나 가치지향적인 취지로 쓰인 용례가 없지는 않았다. 1946년 2월 미국에서 8명의 名士가 귀국했을 때, 그들은 지금부터 ‘祖國光復’에 노력하겠다고 말했다(46.2.13.). 동년 3월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청년연맹이 결성되었다(46.3.10.). 1948년 3ㆍ1절을 맞이해서 이승만 박사는 “3ㆍ1정신을 더욱 발휘하여 조국광복 대업의 결실을 얻을 때까지 敢鬪하자”고 하였다(48.2.29.). 여기서 ‘조국광복’은 앞으로 성취할 독립 내지 건국의 취지였다.

    이처럼 광복의 용례는 복합적이었다. 제헌의회가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명칭 변경한 것을 굳이 이해하자면 광복이라 말이 담고 있는 이 같은 미래지향적 가치를 중시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당시 한국인의 일상적 언어생활에서 광복이란 말의 취지는, 지금도 그러하지만, 압도적으로 앞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일제가 이 나라를 倂呑하기 이전의 광명한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지향적 취지였다. 그러한 취지의 광복 용례는 민족의 경계를 넘어 보편화하고 있었다. 1950년 중국 본토에서 쫓겨난 자유중국의 蔣介石 총통이 “本土 光復을 맹서했다”는『동아일보』의 한 기사가 그 예이다(50.3.18).

    그렇지만 1948년 8월 15일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성립은 결코 단순한 원상회복으로 광복은 아니었다. 이에 관해서는 1956년에 光復軍 출신이며 『思想界』라는 영향력 있는 잡지의 발행인이었던 張俊河가 쓴 다음과 같은 논설이 正鵠을 찌르고 있다.

     [돌이켜 우리의 현실을 볼진대 8ㆍ15해방은 曠古의 ‘斷絶’이었습니다. 엄정한 의미에서 이것은 光復이 아니라 新生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역사적 유산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 있어서 封建的이었기에 이미 세계사의 현 단계에서는 化石으로 화해 버린 이들을 다시 들추어 현실에 활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제2차 대전의 결과 일어난 世界史의 단절과, 해방으로 생긴 民族史의 단절의 교차점에서 유산 없이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중략) 해방된 우리 민족은 결코 봉건 李氏王朝의 臣民도 아니요, 제국주의 日本 官權의 노예도 아니요, 기본 인권과 자유권의 보장을 강력히 요구하는 民主主義 사회의 自由人民인 것입니다.]

    이처럼 장준하에게서 解放은 엄밀히 말해 光復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曠古의’, 곧 전례가 없는, ‘斷絶’이었다. 그 단절로 인해 우리 민족은 封建的 李氏王朝의 臣民과 帝國主義의 노예 상태에서 民主社會의 자유인으로 바뀌었다. 이 같은 단절을 초래한 것은 1948년 대한민국의 성립이었다. 장준하는 1945년의 해방과 1948년의 건국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해방이라고 하였지만, 엄밀히 말해 위와 같은 단절이 생겨난 것은 1948년의 헌법제정과 건국에 의해서였다.

    連續이 아니라 斷絶이요, 光復이 아니라 新生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장준하는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여기서 그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면, 민주사회를 떠받치는 自由와 人權과 같은 기초적 가치와 이념들은 우리의 역사에서 자생적으로 성숙한 것이 아니고 외부 세계로부터 수입된 것이라는 사실이 역시 가장 중요하다고 하겠다.
    세계사에서 자유, 인권 등의 가치와 이념은 근세 서유럽에서 성숙한 뒤 1776년 美國의 독립을 통해 최초로 국가의 기초 이념으로 채택되었으며, 이후 몇 차례의 큰 물결을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우리 한국의 경우 자유민주주의 사상은 19세기말 開化期에 도입, 학습되다가 1919년 上海臨時政府의 헌법에서 장차 세워질 국민국가의 기초이념으로 성문화되었으며,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전술한 바와 같은 국제사회의 지원에 힘입어 1948년의 헌법제정을 통해 비로소 한국인의 사회적 정치적 삶을 규율하는 기초 질서로 성립했다고 하겠다.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확실히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대 단절이었다.

    필자도 이전에 1948년의 건국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를 논하면서 그것을 ‘文明史의 大轉換’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거기서 필자는 장준하가 강조했던 단절성만이 아니라 외래 가치와 이념을 수용, 학습, 실천할 수 있는 傳統文明의 對應能力을 강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건국 이후의 한국 현대사는 외래문명과 전통문명이 충돌하면서도 상호 融合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어쨌든 1948년의 건국은 일제가 병탄하기 이전의 조선왕조를 복구하거나 그 시대의 문명을 회복하는 사건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확실히 장준하의 지적대로 전례가 없는 일대 단절로서 커다란 新生이었다. 신생국의 前途가 어떠할지는 지극히 불투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수많은 나라들이 생겨났지만, 건국이념의 성취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함에 실패하여 거의 太半이 좌절하였다. 건국은 성취와 좌절이, 전진과 후퇴가 반복되는 불확정적인 선택 과정이다. 특별한 성취와 전진을 위해서는 제한된 자원을 전략적으로 선별된 목적에 집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따라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정치, 사회, 경제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社會的 力量과 政治的 指導力이 필요한 법이다. 대부분의 신생국은 그러한 사회적 역량과 정치적 지도력에서 실패하였다. 1948년에 신생한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일 수 있었다. 그러했던 建國의 희망과 긴장과 잠재적 갈등을 光復이란 과거지향적 표현에 온전히 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요컨대 1949년 9월 制憲議員들이 당초의 獨立紀念日을 光復節로 명칭 변경하였을 때, 그들의 정치적 의식 속에서 이상과 같은 건국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이해가 명확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건국의 혁명적인 의의는 뚜렷이 인식되지 못하거나 흐릿한 의식 상태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보다는 1945년 8월 15일에 있었던 해방의 환희가 여전히 기억에 생생한 감동으로 남아 있었다. 필자는 별다른 저항 없이 다수의 제헌의원들이 이미 제1차 기념식까지 가졌던 ‘독립기념’을 ‘광복절’로 명칭 변경하였던 데에는 이 같은 그들의 정치적 역사적 인식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생각한다.

    1950년 4월 光復節歌가 제정되었다. 당대를 대표하는 한학자 鄭寅普가 가사를 讚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1절)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로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룬님 벗님 어이하리. 이 날은 사십년 뜨거운 피 엉킨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절) 꿈엔들 잊을건가 지난 일을 잊을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에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 힘써힘써 나가세 힘써힘써 나가세

    여기서는 나라를 되찾은 광복의 기쁨이 復古的으로 노래되고 있을 뿐이다. 그 다시 찾은 나라를 길이 지키고 가꾸어 가자고 했지만, 무엇으로 지키고 가꿀지 그 나라의 기초 이념에 대해서는 ‘복’, ‘보람’과 같은 고루한 언급만 있을 뿐이다. “자유 대한 만세!”과 같은 진취적이며 미래지향적인 기상은 전혀 담기지 않았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漢學者답게 평생에 걸쳐 구사해 온 高踏的 套式으로 전통에 담긴 나라사랑을 노래했을 뿐이다.

    필자는 정인보가 새로운 국가의 기초 이념인 自由 價値를 충분히 이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1948년의 독립과 건국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였지만, 이 노래는 온 국민에게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필자의 개인적 경험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광복절의 제정은 1948년의 건국 사건을 망각하거나 부정할 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한 예상은 곧이어 발발한 6ㆍ25전쟁의 혼란과정에서 어김없이 구체화하고 있었다.


    5. 記憶의 혼동과 분리(1950-1959)

    건국의 주역인 李承晩 대통령은 광복절이 원래 독립기념일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15일 그는 전쟁 통에 임시수도 大邱에서 개최된 기념식에서 “제2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라는 제목의 기념사를 행하였다. 1951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임시수도 釜山에서 행해진 기념식에서 그는 “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라는 기념사를 행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우리가 지금 공산주의와 피를 흘리고 싸우는 것은 ‘국민의 자유’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역설하였다.

    그렇지만 그 해에 이미 광복절에 대한 민간의 이해는 달라져 있었다.『동아일보』는 1951년 8월 15일 ‘광복절 6주년’의 기념식이 임시수도 慶南道廳 내 國會議事堂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요인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고 보도하였다. 사설을 통해서는 “8ㆍ15 6주년을 맞아서” 우리는 민주통일과 민주화에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1.8.16.). 이처럼 동 신문으로 대표되는 민간의 기억은 당초 광복절이 1948년의 독립을 기념하는 것이라는 이해가 전혀 결여된 가운데 그것을 1945년의 해방을 기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광복이란 용어의 일반적 뜻을 생각하면 그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대통령의 기념사가 ‘제3회 광복절’이라고 명확히 했건만, 당시 임시수도의 어수선한 行政이 그 기념사를 문서로까지 만들어 기자들에게 전달했던 것 같지는 않다.

    1952년이 되어서는 대통령 자신이 기념사의 제목에서 ‘광복절’을 ‘독립기념일’이라고 달리 불렀다. 1953년의 기념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일의 기념식에 관해 『동아일보』는 대통령이 ‘독립제5주년기념일’을 맞이하여 北進統一의 결의가 불변임을 천명했다고 보도하였다(53.8.16.). 이렇게 1952년 이후가 되면 대통령 스스로가 법률로 규정된 ‘광복절’이란 국경일의 명칭을 폐하면서 원래의 ‘독립기념일’로 돌아가 있었다. 이로부터 그가 ‘광복절’이란 명칭에 문제가 있음을 심각하게 인지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광복절에 대한 민간의 이해는 그와 다른 방향으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추세로 굳어지고 있었다.

    1952년 8월 15일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오늘은 광복절이다. 대한민국을 수립한 이래 네 번째의 광복절을 맞게 되었고 해방 후 일곱 번째의 광복절을 기념하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52.8.15.). 광복절의 起年은 의심의 여지없이 1945년으로 설정되었다. 그런데 1953년이 되면 동 신문은 특이하게 광복절을 ‘해방절’로 칭하였다. 동년 8월 15일 동 신문은 “解放節에 際하여”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오늘은 해방절이다, 여덟 번째 맞는 해방절이다”라고 하였다(53.8.15.). 이처럼 1949년에 국경일로 제정된 ‘광복절’은 전쟁 통의 임시수도에서 아직 국민적 기억으로 정착하지 못한 가운데 사람에 따라 ‘독립기념일’, ‘해방절’ 등과 같은 상이한 칭호로 불리는 등, 혼란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전쟁이 끝난 1954년부터 이러한 혼란은 없어졌다.
    광복절을 ‘독립기념일’이나 ‘해방절’과 같은 異稱으로 부르는 일은 다시없었다. 광복절의 기년도 1945년으로 확정되었다. 그에 따라 광복절에 대한 국민적 기억도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해방의 기쁨에 대한 경축으로 굳어졌다. 광복절이 당초 ‘독립기념일’로 제정되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기억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제1공화국의 시대 1959년까지는 그 날에 정부수립, 곧 독립 내지 건국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잊지는 않았다. 매번의 광복절을 맞아 해방의 기쁨과 더불어 건국의 보람도 함께 경축되었다. 그렇게 광복과 건국에 대한 기억은 분리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1955년 광복절의 기념식에서 李起鵬 民議院 의장은 “오늘은 해방된 10년의 佳節임과 동시에 우리 대한민국을 수립한지 7년이 되는 祖國光復의 가절이다”라고 하였다(55.8.16.). 1957년 광복절에서 金炳魯 대법원장은 “우리는 4278년 이 날에 일본의 패망으로 자유를 찾았고 4281년 이 날에 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을 선포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55.8.16.).『서울신문』으로 눈을 돌리면, 1955년의 광복절을 맞아 오늘은 ‘민족 최대의 聖典’으로서 ‘광복10주년기념일’이며, ‘정부수립7주년기념일’이라고 하였다(서울55.8.15.). 1956년이 되어서는 이기붕 원장의 기념사를 소개하면서 “오늘은 광복 12주년, 정부수립 8주년을 겸하여”라고 하였다(서울56.8.15.).

    1950년대에 걸쳐 해마다 되풀이 된 광복절의 기념에서 두드러져 간 한 가지 현상은, 지금까지 조금도 쇠하지 않고 되풀이 되고 있는 한 가지 현상은, 民族統一에 대한 念願이 共同誓願의 형태로 외쳐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1949년의 ‘제1회 독립기념일’부터였다. 동년『동아일보』는 기념식전의 상황을 보도하면 1면에다 “한 번 뭉쳐 民國建設, 두 번 뭉쳐 民族統一”이란 큰 타이틀을 달았다. 이후 전쟁 중인 1953년의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北進統一의 결의를 천명했음에 대해서는 전술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부터의 광복절에서는 더욱 강력한 통일의 서원이 펼쳐졌다. 예컨대 1955년『동아일보』는 광복10주년을 맞은 기념사에서 이 대통령이 당시 제네바에서 진행되고 있는 평화회담을 비판하면서 “北韓 解放을 맹세코 달성”할 것이라 했다고 보도하였다(55.8.16.). 그에 대해 『서울신문』은 광복10주년 경축대회에서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합심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이 강토에서 몰아낼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고 보도하였다(서울55.8.16.).

    이 같이 광복의 기쁨을 통일의 서원과 결합하는 담론 체계에는 본의 아니게 1948년에 있었던 大韓民國의 건국을 忽待할 수밖에 없는 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원인이야 어쨌든 결과에서 볼 때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分斷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전쟁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피폐도 건국의 보람을 무색케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958년 광복절을 맞은『동아일보』의 사설에서 그러한 논리구조의 一端을 살필 수 있다.

    "異族의 지배에서 해방된 지 13년, 그리고 우리의 민족정권을 세워 놓은 지 10년을 기념하는  8ㆍ15날을 맞이한다. (중략) 이 10년을 회고해 볼 적에 우리는 착잡한 내외 정세의 變轉, 推移 속에서 대한민국을 오늘만한 정도로 수호 육성해 온 데 대해 자신과 안도를 느끼면서도 그 기본 과제인 南北統一의 大義를 아직은 이루지 못하고, 공동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쳐 철저한 민주화를 촉구하여 이 겨레가 영원히 발전하고 생동하게 진보할 수 있는 터전을 충분히 닦아 놓지 못한 데 대해 自責과 自愧를 금할 수 없는 바이다"(58.8.15.).

    이렇게 1950년대 대한민국의 현실은 논자에 따라서는, 특히 비판적 정신의 언론과 지식인사회가 보기에는, 自責과 自愧를 금할 수 없는 실정이기도 했다. 統一의 大義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다. 해마다 광복절을 맞아 되풀이된 통일의 서원에는, 그 밑바닥에 깔린 강렬한 민족주의 정서에는, 알게 모르게 1948년의 건국 사건을 貶下하거나 忽待하는 무의식의 코드가 작용하였다. 


    6. 政府樹立 10주년의 慶祝(1958)

    1958년은 대한민국이 성립한 이래 처음으로 政府樹立 내지 建國에 대한 국민적 경축이 있은 해였다. 광복과 건국이 분리된 기억의 구조 속에서 이 해만큼은 광복이 뒤로 물러나고 정부수립 내지 건국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후 40년간 다시없었다. 그 점에서 1958년은 대한민국의 建國史에서 특별한 해로 기억될 만하다. 당일의 ‘정부수립10주년’이란 명칭의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民國이 10년 전 이 날에 성립되었다”고 하였다(58.8.16.). 그는 1957년의 기념식에서도 “오늘은 우리 대한민국이 성립된 제9회 기념일입니다”라고 하였다(57.8.16.). 짐작컨대 그는 여전히 광복절보다 독립기념일이란 칭호를 선호했다고 보인다. 張勉 부통령의 기념사도 “건국 10주년을 맞이하는 금년의 광복절은 일층 뜻 깊은 날”이라 하였으며, 이기붕 의장도 “오늘을 일제 치하에 해방되어 민주독립국가 대한민국을 수립한지 10주년을 맞이하는 날”이라고 하였다. 정부는 건국10주년의 白書를 출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으며, 그에 따라 동년 10월 建國社라는 출판사에서 『建國十年行政畵報』가 출판되었다. 그보다 앞서 그해 3월 이승만 대통령의 83회 생일을 맞아서는 建國史畵編纂委員會가 결성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는『雩南建國十周年記念史畵』라는 사진첩이 발간되었다.

    友邦 각국도 ‘건국10주년’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전해 왔다(58.8.17.).
    여기서 해마다 광복절을 맞아 우방 각국이 전해 온 축하 메시지에 대해 잠시 살핀다.
    1952년 8월 17일의『동아일보』에 의하면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본인은 대한민국 수립 제4년을 맞이하여 귀하 및 한국인에게 미국민으로부터의 심심한 축하와 善意를 전하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52.8.17.). 이처럼 미국이 보기에 한국의 광복절은 대한민국의 수립, 곧 독립과 건국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1945년 8월 15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긴 勝戰紀念日에 해당하였다. 그날 이후 한국은 공식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점령 하에 들었다.
    미국으로서는 그날을 한국인들이 그들의 독립기념일보다 더 중요하게 기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광복절을 한국인이 그들의 독립을 기념하는 날로 이해하였다. 1

    954년 주한 유엔군사령관 존.E.힐 대장도 광복절을 맞아 “대통령 각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이 역사적인 기념일을 맞이하여 자유를 사랑하는 귀 국민에게 심심한 축하의 인사를 드리게 된 것을 본인은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라는 인사를 전하였다. 冒頭에서 소개하였듯이 이 같이 미국이 한국의 광복절을 맞아 독립 내지 건국을 축하하는 인사를 전하는 것은 2010년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건국10주년을 기리는 정부의 경축행사는 다양하였다. 그 중의 白眉를 이룬 것은 1948년 8월 15일에 출생한 ‘建國童伊’ 소년소녀 194명을 선발하여 여러 대에 꽃수레에 분승시켜 서울 시가를 행진하게 한 것이었다. 꽃수레는 정부의 각 부처가 한 대씩 만들었다.『建國十年行政畵報』가 전하는 사진자료에 의하면 재무부, 외무부, 내무부, 문교부, 법무부, 상공부, 보건사회부, 국무원사무국, 공보실에서 꽃수레를 만들었는데, 각기 그 모양이 달랐다. 각 수레에는 ‘慶祝政府樹立第10周年’의 슬로건이 붙었다. 서울 시내를 다니는 전차도 꽃전차로 단장되었는데, 거기에는 “건국제10주년기념”이란 슬로건이 걸렸다. 이외에 普信閣 타종과 三軍의 분열식이 있었으며, 저녁에는 남산공원에서 ‘시민위안의 밤’이 열리고, 뒤이어 화려한 불꽃놀이가 서울의 밤하늘을 장식하였다.

    이날『동아일보』는 ‘建國10周年特輯’으로 당일의 紙面을 가득 채웠다. 제3면에서는 ‘獨立 前夜의 역사적 배경’의 제목 하에 해방에서 건국까지 3년간의 波瀾萬丈했던 정치사를 요약하였다. 제4면에서는 ‘경제10년 浮沈’이란 제목 하에 10년의 경제사를, 제5면에서는 “明暗10년을 말한다, 建國 열 돌에”라는 자목으로 각양 사회상의 변화를 살폈다. 당일의 사설도 “건국1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면서”라는 제목이었다(58.8.15.).
    다음 절에서 소개하겠지만『동아일보』는 매 10주년마다 건국을 기리는 특집을 마련하였다. 1958년은 동 신문의 그러한 전통의 출발점을 이루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적극 참여한 시민계층에게 건국이란 사건은 잊을 수 없는, 매 10주년을 당해서는 한 차례 대대적인 경축의 대상이 되어야 할, 소중한 기억이었다.

    그렇지만 한국의 정치, 사회, 교육 전반에 걸쳐 건국에 대한 공식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광복과 건국이 분리된 기억의 구조에서 광복, 곧 해방만 일방적으로 경축되는 추세가 이후 40년이나 이어졌다. 그 사이 한 번도 1958년처럼 건국을 내세워 경축하는 정부의 공식 식전은 없었다. 그에 따라 1958년에 처음 고안되었다는 ‘건국동이’란 말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 대신 1945년에 태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해방동이’라 하는 말은, 그것이 언제 고안되었는지 알기 힘드나, 여러 國語辭典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건국동이’의 상실, 그것이 다음에서 살필 1960년대 이후의 역사였다.


    7. 公的 記憶의 상실(1960~1987)

    第1共和國의 정치적 실패를 상징하는 1960년의 4ㆍ19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공식적인 기억에서 망각되어 가는 장기추세의 시작을 알리는 중대 계기를 이루었다. 동년의 제15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尹潽善 대통령은 “8ㆍ15해방 후 독립의 염원은 성취되어 남한만이라도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李承晩 정부의 독재정치에 대한 4ㆍ19학생혁명으로 끝을 맞게 되었다”는 취지로 기념사를 하였다.

    동일자『동아일보』는 제1공화국을 ‘비열무쌍한’ ‘무안무치한’ ‘똥버리지와 같은’ ‘찰거머리와 같은’ 모리배와 위선배로 비난하는 朴斗鎭의 詩를 게재하였다(60.8.16.). 다음 날 尹 대통령은 金度演을 국무총리로 지명하는 담화에서 “建國 초창기의 국무총리로서 적격자라 생각한다”고 하였다(60.8.17.). 第2共和國의 성립을 ‘건국’이라 한 데에서 당시 한국인들의 언어감각에서 건국의 의미가 편의적이거나 다원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1959년의 開天節에서 趙容淳 대법원장이 ‘檀君할아버지의 건국이념’을 받들자는 취지의 기념사를 한 데서도 관찰된다(59.10.3.). 동일한 용례는 1961년의 개천절 경축식에 대한『동아일보』의 보도가 “弘益人間의 建國理念 다시금 銘心”이라 했음에서도 반복되었다.

    1960년 윤보선 대통령이 “남한 만에라도 독립의 염원이 성취되었다”고 한 건국에 대한 기억은 5ㆍ16이 발생한 1961년 이후부터는 공식영역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61년의 광복절 기념식에서 朴正熙 의장은 “민족적 대동단결로 16년 전 8ㆍ15 감격의 열매를” 거두자고 하였다(61.8.16.). 다음 해의 제17회 광복절에서 朴 의장은 광복절의 의미를 解放이라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서 보다 나은 삶을 위한 貧困으로부터의 해방과 暴政 하에 있는 北韓同胞의 해방이라는 적극적 의미로 받아들이자고 역설하였다(62.8.15.). 이 같은 적극적인 의미의 광복을 가리켜 1966년 그는 '제2의 광복‘이라고도 하였다(66.8.16.). 이처럼 이른바 ‘祖國近代化’의 구호와 北韓과의 體制競爭을 골자로 한 그의 광복절 해석은 이후 17년간에 걸친 그의 시대를 흔들림 없이 관철하였다.

    그 17년간에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공식적인 언급과 그에 대한 경축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매번의 기념사에 나타난 그의 역사인식에서 1945년 이후의 現代史는 해방의 감격과 환희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試鍊과 受難의 중첩이었을 뿐이었다. 예컨대 1968년의 제23주년 광복절 기념식에는 그는 다시 한 번 “지난 23년간의 우리 역사는 거듭된 좌절과 시련의 역사였으며” “우리 국민이 그 역량을 경제건설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쏟기 시작한 것은 지난 3~4년간에 불과하다”고 하였다(68.8.16.).
    그 해가 建國20周年이었건만 그에 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1970년 경축사에서 그는 다시 “지난 25년간의 광복 한국사는 한마디로 말하여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으며,” “혼돈과 정체는 급기야 두 차례의 政變의 소용돌이를 몰고 왔으며”, 연후에야 “民族中興의 前進 隊列이 정비되어 지금 成年 한국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中外에 과시하게 되었다”고 하였다(70.8.16.). 여기서 표출된, 그가 이룬 조국근대화의 성과에 대한 자신감은 곧이어 북한을 상대로 한 적극적인 통일정책으로 가시화하였다. 1972년 7ㆍ4南北共同聲明이 있은 직후의 광복절 기념사에서 박 대통령은 ‘남북 민족 대단결의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선언하였다(72.8.16.).

    이처럼 정부를 주체로 하는 公式 記憶에서 1948년의 건국 사건은 점점 잊어져 갔지만, 건국에 적극 참여한 민간사회마저 그러하지는 않았다. 1968년의 광복절을 맞아『동아일보』는 建國20周年을 기념하는 특집으로 紙面을 가득 채웠다. 우선 건국20년을 맞은 민족의 未來像과 관련하여 저명 학자 3인을 초빙하여 “건국 20주년을 결산함에 오늘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주제의 좌담을 마련하였다. 그 자리에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高永復은 “건국 이래로 國民形成 과정에 邁進해 온 것은 사실이나 國家와 일체감을 갖고 民族을 준거 집단으로 삼는 건실한 國民을 형성하는 데는 아직껏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건국사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었다. 동 신문의 시사만화「고바우영감」은 대한민국의 20년에 걸친 역사를 건국 당시를 “어린애 업힌 상태”, 건국 10주년을 “제법 큰 애 업힌 상태”, 건국 15주년을 “같이 선 어머니와 아이”, 그리고 건국 20주년을 “(어머니가) 이제 제가 안겨 살게”로 재미있게 그렸다(68.8.15.). 어린아이가 다 커서 이제 어머니를 보살피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다.

    10년 뒤 1978년의 建國30周年을 맞아서『동아일보』는 “우리 대한민국은 15일로 건국 30주년을 맞는다”고 하면서 이 기회에 ‘道德再建運動’을 추진할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였다(78.8.15.). 이후 동 신문은 ‘建國30년 世態30년’이란 제목 하에 30년에 걸친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의 변화를 심층 취재한 기획 기사를 8월 29일까지 10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이처럼 민간사회에서는 매 10주년을 맞아 건국에 대한 기억을 어김없이 살려내면서 이후 建國 談論이 부활할 수 있는 소지를 이어가고 있었다.


    8. 統一運動의 전개와 建國史의 왜곡(1988~2002)

    이른바 ‘민주화시대’에 접어든 1988년 이후 한국의 정치와 사회가 드러낸 두드러진 동향 두 가지는 反日 民族主義의 고양과 統一運動의 활성화였다. 1982년 日帝의 대륙침략을 정당화하는 日本 歷史敎科書의 기술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이를 규탄하는 민간사회의 반일 민족주의가 크게 고양되었다. 그 餘勢에 국민들의 자발적 성금이 모아져 1987년 天安에 웅장한 규모의 獨立紀念館이 건립되었다. 동 기념관에서 독립은 일제에 맞선 獨立運動을 뜻하였다. 1948년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독립, 곧 건국은 동 기념관의 기념 대상이 아니었다. 그 대신 중국에서 활동한 臨時政府의 독립운동이 주요하게 기념되었다.

    1987년 10월 제9차 憲法 改正이 이루어져 현행 헌법에 이르고 있다. 그 때 헌법 前文에 “우리 대한민국은 3.1運動으로 건립된 大韓民國 臨時政府의 法統”을 ‘계승’한다고 명시되었다. 이전의 헌법은 “우리 대한민국은 3.1運動의 崇高한 獨立精神을 계승”한다고 했는데, 제9차 헌법 개정은 위와 같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명시함으로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보다 뚜렷이 顯彰코자 했다. 이는 그해에 완공된 독립기념관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주요하게 기념하는 獨立運動紀念館으로 건립되었음과 밀접한 연관을 이루었다.
    때를 전후하여 都下 신문들은 그간에 연구가 소홀했던 獨立運動史에 관해 활발히 연재 보도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헌법 개정에 있게 되자 重京 臨時政府 출신인 金俊燁이 憲法改正委員會에 적극 접촉하여 위와 같은 헌법 전문을 이끌어냈다.

    반일 민족주의 고양이라는 시대적 분위기는 독립운동에 종사한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국가적 表彰으로 이어졌다. 1988년에 들어선 盧泰愚 정부는 1949년 최초로 제정된 이래 1989년까지 1,453명에게 수여된 建國勳章과 建國褒章을 1990년에만 3,522명이나, 1991년에도 1,112명에게 수여하였다. 뒤이어 1995년에는 金泳三 대통령이 1,073명에게 건국훈장과 건국포장을 추가로 수여하였다. 반일 민족주의의 고양은 1995년의 광복절 경축식에서 中央廳과 國立博物館으로 활용되어 온 舊 朝鮮總督府廳舍의 돔을 철거하는 의식에서 극히 상징적으로 연출되었다.

    같은 날 金大中 야당대표는 ‘絶世의 애국자’ 金九 선생을 기리면서 “미군정, 이승만박사 통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까지 결국 親日派 세력이 중심이 되어 이 나라를 지배해 온 역사”에 대한 ‘올바른 청산’을 요구하는 글을『동아일보』에 기고하였다(95.8.15.). 반일 민족주의의 고양이 의도하지 않게 大韓民國의 現代史를 친일파의 역사로 매도하고 그 올바른 청산을 요구하는 정치적 공세로 이어지는 단초가 이렇게 열렸다. 

    1988년의 광복절은 대한민국의 建國40周年이었다.
    건국에 참여해 온 민간사회는 어김없이 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동일자『동아일보』는 ‘建國40년 分斷40년’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건국40년을 총체적으로 조감하는 역사의 눈”은 “近代國家 내지 막강한 産業國家로 성장한 우리의 모습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88.8.15.).

    그렇지만 이 해의 광복절은 ‘민주화시대’를 이끈 통일운동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널리 기억되었다.
    그날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盧泰愚 대통령은 북한의 최고 책임자와의 회담을 제의하였다. 1990년의 광복절에서는 남북 간의 武力使用 포기, 不可侵協定 체결 등이 제안되었다. 이에 북한이 호응하여 1992년 1월에는 韓半島 非核化를 포함한 南北基本合意書가 교환되었다. 동년 8월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사할린에서 남ㆍ북한의 연예인이 모여 ‘광복절기념 統一藝術祭’를 열었다. 광복절을 전후한 통일 논의의 활성화는 이전부터 있어온 일이지만, 1988년 이후 한국의 집권세력은 경제적 근대화와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자신감에 뒷받침되어 이전보다 일층 적극적으로 통일정책에 제안하고 실천하였다. 獨立記念館은 전술한대로 獨立運動紀念館으로 세워졌다. 거기서 해마다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은 경축되지 않았다. 정부의 공식 기억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여전히 잊어진 상태였다. 忘却의 歲月은 계속되었다.

    고양된 통일운동의 진정한 주체는 大學과 民間社會였다. 1988년 7월 11개 在野團體를 중심으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민주단체협의회’(약칭 조통협)이 발족하였다. 동 단체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과 공조하여 동년 광복절에 연세대학교 民主廣場에서 8ㆍ15民族解放祭와 出征式을 가졌다. 식을 마친 그들은 板門店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북한학생 대표단과 회담하기 위해 교문 밖으로 진출하다가 이를 불허한 당국에 의해 2천 명 이상이나 연행되었다.

    이 같이 대두된 대학과 민간사회의 급진적인 통일운동에 북한은 적극 호응하였다. 1989년 독일 베를린에서 남한, 북한, 해외동포의 3자회담이 열렸다. 이들은 조국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남ㆍ북한과 해외동포에 걸쳐 정당, 사회단체, 개별 인사, 정부 당국을 망라하고자 한 祖國統一汎民族聯合(약칭 범민련)을 결성하였다. 1991년 1월에는 범민련의 남측본부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1999년까지 해마다 광복절을 전후하여 서울, 평양, 베를린 또는 도쿄에서 동시에 汎民族大會를 개최하였다. 1990년 제1회 대회의 양상을 보면 7월 27일 平和軍縮을 위한 국민걷기대회가 있었으며, 8월 3일에는 범민족대회추진본부 발족식을 가졌고, 13일에는 범민족대회 학술제, 14일에는 범민족대회 統一文化祭가 열렸으며, 15일 판문점에서 가진 汎民族會議로 마무리되었다. 12개 지역과 66개 부문에 걸쳐 연인원 20만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대회였다. 이 단체는 聯邦制 통일, 美軍 철수, 國家保安法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한국 정부는 이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1997년 대법원은 이 단체를 利敵團體로 판결하였다. 이들의 통일운동에 대해 1996년 8월 『동아일보』는 광복51년과 정부수립48년 동안 自由民主主義를 심고 지키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려온 국가가 “분별없는 일부 북한 盲信者들의 불장난”으로 흔들릴 수는 없다고 비난하였다(96.8.10.).

    이처럼 정부 당국과의 대립을 불사하면서, 나아가 민간사회의 분열을 초래하면서 대두된 대학과 민간사회의 급진적인 통일운동을 두고 그저 한국인들의 민족주의 감정이 고양된 탓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大韓民國의 建國史를 사실상 부정하면서, 韓民族 근ㆍ현대사의 正統性이 북한에 있음을 승인하는 歷史觀의 성립과 확산이라는 뒷받침이 있었다. 1985년 全斗煥 정부는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허용하여 마르크스, 레닌, 毛澤東 등의 저작을 자유롭게 읽고 출판할 수 있게 하였다. 1960년대 이래 강력히 추진되어온 ‘조국근대화’의 가시적인 성과가 한국의 집권세력으로 하여금 6ㆍ25전쟁 이후 오랫동안 사회의 底邊에 잠복해 있던 反體制勢力에게 그 같은 양보를 할 여유를 제공한 셈이었다.

    사상과 출판의 자유가 허락되자 한국의 근ㆍ현대사를 마르크스ㆍ레닌주의와 모택동주의에 입각하여 급진적으로 재해석하는 思潮가 대학과 지식인사회에 넘쳤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출판사 한길사가 여섯 권으로 완성한『解放前後史의 認識』이 그 대표적인 성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모두 100만 권 이상이나 팔려 나갔으며,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더없이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이 여섯 책을 관철하는 歷史觀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하의 식민지기에는 反帝ㆍ反封建 民主革命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운동이 민족의 지상과제였다. 해방 후 남한에는 美軍政 하에서 反民族勢力이 득세하여 이 같은 혁명이 좌절되었다. 반면 북한에는 혁명적인 소련군이 진주하여 혁명적 민중과 연대하여 반제ㆍ반봉건 민주혁명을 훌륭하게 수행하였으며, 이로써 북한은 민족의 民主基地가 되었다. 6ㆍ25전쟁은 북한이 미국의 식민지적 지배하에 있는 남한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해방과 혁명의 전쟁이었으나 미국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이후 한국에서는 미국의 지배 하에서 反民衆的 對外從屬의 모순이 심화되었다. 반면에 북한은 반제ㆍ반봉건 민주혁명을 거쳐 社會主義革命으로 나아갔다.

    이상과 같은 근ㆍ현대사 이해를 제시한 다음, 위 책은 한국의 革命的 民衆勢力을 향해 북한의 主體思想을 지도이념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1988년부터 대학생과 재야단체에 의한 급진적인 통일운동이 대두하고, 1990년에 이르러 남한, 북한, 해외동포의 연합으로서 汎民聯이 결성되어 1999년까지 해마다의 광복절을 맞아 聯邦制 통일, 美軍 철수, 國家保安法 폐지와 같은 급진적 구호를 내걸고 정부 당국과 거칠게 충돌하면서 汎民族大會를 강행하였던 데에는 이 같은 역사관이 커다란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9. 第2建國運動(1998)

    1998년에 들어선 金大中정부는 그 해의 광복절을 ‘政府樹立50周年’으로 공식 기념하였다. 이는 1958년의 광복절을 ‘정부수립10주년’으로 경축한 이래 40년간이나 없었던 매우 이례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한 일이 벌어진 데에는 이른바 ‘第2의 建國’이란 김대중 대통령의 國政改革論이 크게 작용하였다.
    1997년 말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金大中 당선자는 1998년 초부터 “民主主義와 經濟發展의 병행”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제2의 건국’을 주창하였다. 대통령 취임 이후인 3ㆍ1절 기념사에서 김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가 “臨時政府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유일한 정부”이며 자신의 정부로 인해 “임시정부의 國是가 실현”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정부에 체현된 역사적 정통성을 국민 일반에 주지시키고 그에 기초하여 國政 전반에 또 하나의 建國이라 칭할 정도의 일대 개혁을 추구하고자 했음이 김 대통령의 초기 구상이었다. 그러한 개혁의 슬로건으로서 ‘제2의 건국’이 채택되었을 때 거기엔 불가피하게 1948년의 ‘제1의 건국’을 인정하고 기념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 필연성을 안고 있었다. 1998년의 광복절이 ‘정부수립50주년’으로 경축된 것은 그 같은 전후 사정에 의해서였다.

    ‘정부수립50주년’의 기념식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또다시 국정의 총체적 개혁을 위한 ‘제2의 건국’을 제창하였다. 그에 대해『동아일보』는 ‘건국50년의 다짐’으로 시작하는 사설에서 ‘제2의 건국’을 제창한 金 대통령의 기념사가 제시한 대로 나라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98.8.16.). 이렇게 민간의 호응을 받으면서 시작된 제2건국운동은 전국적 범위에서 수만 명이 참가하는 第2建國委員會라는 단체의 조직으로 구체화하였다. 그렇지만 동 운동은 그에 상응하는 가치와 이념을 제시할 수 없었으며, 그에 대한 정치적 오해가 깊어지면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당초 김 대통령이 제시한 국정의 총체적 개혁은 1997년 말의 경제위기를 몰고 온 政經癒着, 官治金融, 不正腐敗, 문어발식 財閥의 개혁을 주요 대상으로 하였다. 개혁은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적이며 정책적인 것이었다. 요컨대 제2건국운동은 대한민국의 헌법이 기초하고 있는 自由와 人權이라는 이념과 그에 입각한 自由民主主義와 市場經濟體制라는 국가체제의 기본 틀을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이념이나 가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한 한계 속에서 제2건국운동은 실질적인 추진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 급속하게 시들어갔다.

    그 해 정부가 ‘정부수립50주년’을 경축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는 다양하였다. 韓國銀行은 ‘대한민국50년’을 기념하는 鑄貨를 발행하였다. 동 주화에 새겨진 영문 로고는 “The 50th Anniversary of the Republic of Korea”였다. 문화관광부는『대한민국50년 격동반세기』라는 寫眞資料集을 출간하였다. 이 책의 머리말은 “올해는 광복53주년, 대한민국 건국 및 정부수립 50주년이 되는 해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뒤이어 '대한민국 건국'이란 제목 하에서 1945~1948년의 정치사를  간략히 요약하는데, 거기서는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했다. 명실상부한 민주공화정시대를 연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의 ‘정부수립50주년’의 경축은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을 명확히, 아니 자명하게, 인정하였다.

    다른 한편, 統計廳은『통계로 본 대한민국 50년의 경세사회상 변화』라는 통계집을 출간하였다. 交通部는 ‘건국50주년기념’을 새긴 5종의 고속도로통행카드를 발행하였다. 이처럼 ‘정부수립50주년’은 정부가 발행한 각종 인쇄물에서 ‘대한민국50년’ 또는 ‘건국50주년’으로 표시되었다.
    建國50周年을 맞는 민간사회의 대응도 보다 적극적이었다. 그 해 4월 ‘대한민국 건국5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가 1946년의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했던 李哲承을 회장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이들은 광복절을 맞아 國立墓地에 안장된 李承晩 대통령의 묘소에서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묘비 제막식”을 가졌으며, 그날 오후에는 정부 행사와는 별도의 ‘건국50주년 경축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공산주의자와의 싸움에서 희생된 유공자에게 그들이 제정한 ‘건국공로장’을 수여하였다. 건국50주년을 맞아 건국에 적극 참여한 민간사회로부터 이 같은 공세적 대응이 있게 된 데에는 1990년 이래 해마다 광복절을 전후하여 汎民聯에 의한 급진적인 통일운동이 국가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민간사회의 행사로서는 朝鮮日報社가 마련한 ‘대한민국50년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전시회가 가장 큰 주목을 끌었다. 동년 8월 14일에서 9월 25일까지 藝術의 殿堂에서 열린 이 전시회에는 대한민국의 파란만장했던 현대사와 그의 놀라운 성취를 이야기하는 2천여 점의 사진자료, 300여 점의 희귀문서, 500여 점의 실물자료, 30여 점의 영상자료가 전시되었다. 8월 14일의 개막식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하여 인사말을 하였다.『조선일보』가 보도한 인사말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조선98.8.15.). 대한민국 건국에 공산주의자들은 반대했다. 5ㆍ10總選擧에서 국민은 압도적 투표율로 대한민국의 성립을 지지했고, 그에 기초해서 유엔도 대한민국을 合法政府로 승인했다. 6ㆍ25가 나자 국민들은 수백만이 희생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싸웠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공산주자들로부터의 가혹한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6ㆍ25의 폐허를 딛고 나라를 다시 재건하고 경제를 발전시켜 30년도 못돼 세계가 놀랄 漢江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지금 비록 IMF의 고통을 겪고 있지만 경제 규모로는 세계 11번째이다. 작년에는 50년간 갈망했던 민주주의, 곧 투표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마침내 이뤘다. 이상에서 보듯이 대한민국 건국사에 대한 金大中 대통령의 이해는 그에 적극 참여해 온 민간사회가 보존해 온 기억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제2건국운동이 제1건국을 폄하하거나 부정할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입장은 예의 모호함을 특징으로 하였다. 전술한대로 그는 자신의 정부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유일한 정부임을 자부하였다. 그 이유에서 김 대통령은 ‘정부수립50주년’의 일환으로 臨時政府의 主席 金九를 적극 현창하였다. 동년 국립중앙극장에서는 김구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통곡’이란 唱劇이 공연되었다. 김대중 정부의 金九 宣揚은 2002년 白凡紀念館의 건립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주지하듯이 金九는 식민지기 중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이 1925년 이후 시련에 처해 있을 때 臨時政府를 지켜 냄으로써 民主共和制를 지향한 독립운동의 정통적 흐름을 보존하였을 뿐 아니라,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독립의 국제적 약속을 이끌어내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해방 후는 자유ㆍ민족진영의 지도자로서 연합국의 信託統治案을 거부하는 민족운동을 지도함으로써 南韓의 共産化함을 저지함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렇지만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할 것을 권하는 友邦의 권고를 거부하였으며, 기회가 닿은 대로 미국과 중국 또는 유엔과 같은 국제사회가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와 승인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1948년 4월 平壤을 방문하여 통일을 위한 南北協商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동년 7월 그와 서울 주재 중국대표 劉馭萬이 나눈 대화의 기록은 逝去 1년 전 그의 韓半島에 대한 정세 판단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은 앞으로 “自由民主主義에 기초한 統一의 基地”가 될 것이라며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라는 중국의 蔣介石 總統이 전달한 권고를 거부하였다. 그 한 가지 이유로서 그는 그가 석 달 전 평양에서 목도한 북한의 강력한 군사력이 설령 남한에서 독자 정부가 건설되더라도 그 정부의 前途를 심히 어둡게 할 수밖에 없다는 자신의 정세판단을 내비쳤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독립이 내외에 선포되는 그 날에 김구는 ‘悲情과 失望’의 성명을 발표하였다(48.8.15.).

    요컨대 金九가 그의 생애의 마지막 2년간에 보인 정치적 행적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非友好的임을 넘어 그것을 반대하고 저지하는 노력으로 일관하였다. 金大中 대통령이 제2건국의 역사적 전제로서 1948년의 제1건국을 인정하고 적극 평가함과 동시에 제1건국에 적극 반대하면서 끝까지 참여하지 않았던 김구를 선양한 것은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 같은 金 대통령의 모순은 그의 大衆政治家로서의 높은 명망과 反日 民族主義의 기운이 크게 고양된 시대적 상황에 파묻혀 그에 대한 정치적 비판자들에게조차 제대로 의식되거나 지적되지 못하였다.

     

    10. 建國 否定의 교육과 전시(2003-2007)

    2003년에 집권한 盧武鉉 대통령은 몇 차례에 걸쳐 大韓民國의 建國史를 사실상 부정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행하였다. 동년의 삼일절 경축사에서 그는 “우리의 근ㆍ현대사는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하였다”고 했다. 이 같은 그의 현대사 인식은 퇴임한 후에도 이어졌다. 2008년 ‘건국60주년’의 기념을 둘러싼 논쟁과 관련하여 그는 “光復이 중요하지 建國은 그에 따라온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이러한 현대사 인식에 입각하여 그는 2004년 광복절의 경축사에서 過去事眞相糾明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뒤이어 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등 16개에 달하는 각종 특별위원회가 만들어져 과거사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 작업이 개시되었다.

    그와 동일한 현대사 이해가 중ㆍ고등학교 교실에서 國民的 記憶으로 가르쳐지기 시작한 것도 2003년부터였다. 1995년 金泳三 정부 하에서 중ㆍ고등 제7차 교육과정에 관한 개정안이 마련되었으며, 그에 따라 2003년부터 고등학교에 韓國 近ㆍ現代史만을 따로 가르치는 교과서가 보급되기로 결정되었다. 이후 7년에 걸친 교과서의 編修, 執筆, 檢定의 여러 과정은 대개 앞서 소개한『解放前後史의 認識 』에 충실한 역사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결과 실제 2003년부터 보급된 6종의 검인정교과서『고등학교 한국 근ㆍ현대사』는 집필자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 같은 역사관에 충실하였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한국의 현대사를 규정하는 세계사적 조건으로서 毛澤東主義에 기초한 第3世界革命論을 중시하였다.

    6종의 교과서 가운데 교육 현장에서 가장 널리 채택된 금성사판 교과서는 이 같은 역사관의 모범을 보였다. 동 교과서는 “연합군이 승리한 결과로 광복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 민족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에 대해 동 교과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남한에 진주한 美軍政은 민중의 혁명적인 요구를 탄압하였으며, 그 결과 여러 곳에서 民衆 蜂起가 발생하여 미군정의 퇴진을 요구하였다고 하였다. 나아가 동 교과서는 한국 독립에 관한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우리 역사상 최초로 절대 다수의 인구가 참여한 자유ㆍ보통ㆍ비밀선거에 대해 “통일 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국민적 열망과 여러 정치세력의 반대 속에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이렇게 동 교과서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국민적 열망’을 억누르며 생겨난 ‘남한만의 단독정부’에 불과하였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하나의 國民國家라기보다 소수의 반민족세력이 미국을 등에 업고 정부를 僭稱하면서 그들만의 지배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차라리 하나의 폭력적인 社團과 같은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사실상 부정하는 서술은 비단 歷史科 교과서만의 일이 아니었다. 社會科를 비롯한 다른 영역의 교과서에서도 그러한 역사관은 암묵적 코드로서 깊이 침투하였다. 교과서의 집필자들이 위와 같은 역사관을 신봉해서만은 아니었다. 전술한대로 민주화시대를 맞아 고조된 반일 민족주의는 歷史觀의 左右를 떠나 널리 공유되었다. 그 결과 위와 같은 역사관을 공유하지 않은 교과서 집필자도 대한민국의 건국을 사실상 부정하는 서술을 예사로 행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반일 민족주의 정서와 위와 같은 급진적 역사관은 밑바닥에서 서로 통하는 바가 많기 때문이다. 不知不識間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고 있는 고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의 한 대목을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우리나라는 근대화운동이 성공을 거두기 전에 일본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식민지지배 아래에서 시민운동은 독립운동과 더불어 근대사회 건설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실현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3․1운동이 전개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수립된 민주공화국이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독립운동과정에서도 근대사회 건설 노력은 꾸준히 계승되었으며, 국내외 독립운동세력들은 광복 이후의 정부형태를 민주공화국으로 하는 데 있어서 의견이 일치하였다.
    우리나라는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독립을 얻었으나 자주 민주국가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하여 장기집권을 획책하였으며, 박정희 정부는 경제발전의 명분 아래 국민들의 기본권을 억압하고 장기집권을 도모하다가 10ㆍ26사태로 비운을 맞이하였다. 박정희 사후에도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여 군부통치가 지속되었으며 정경유착 등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들은 4ㆍ19혁명(1960), 5ㆍ18광주민주화운동(1980), 6월민주항쟁(1987) 등을 통해 스스로 민주국가를 건설해 왔다.]

    이같이 韓國 現代史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는 압축적인 서술에서 1948년에 있었던 建國 사건은 언급조차 되고 있지 않다. 그런 가운데 上海臨時政府가 “우리 역사상 최초로 수립된 민주공화국”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김대중 정부가 제2건국운동의 과정에서 상해임시정부를 顯彰한 이래의 추세를 별 문제의식 없이 계승한 것이다. 나아가 이 사회과 교과서는 해방 후 李承晩, 朴正熙, 全斗煥 정부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를 長期執權, 政經癒着, 不正腐敗의 역사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자주 민주국가’를 향한 새로운 역사는 상해임시정부에 이어 4ㆍ19혁명에서 다시 시작된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전술한대로 1960년 제1공화국이 실패한 이후 줄곧 정부가 주체가 된 공식 기억에서 대한민국의 건국 사건은 잊어져 왔다. 그런 상태가 40년을 넘기게 되자 대한민국은 자신의 건국사를 무시하는 교과서를 자신의 손으로 국민 교육의 현장에 보급하는 모순을 범하여도 아무렇지도 않은 이상한 국가가 되고 말았다.

    교과서만이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가 지원하여 곳곳에서 세워진 近ㆍ現代史 博物館은 건국사 부정의 기억을 갖가지 寫眞이나 影像이나 造形物로 展示化하였다. 부산 中央公園을 억지로 분리하여 세운 民主公園 내의 民主抗爭紀念館과 濟州 4ㆍ3사건을 기념하여 세워진 濟州4ㆍ3平和紀念館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예컨대 민주항쟁기념관에서 대한민국 건국사의 배경이나 전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전시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30만 부산 사람들은 일제 잔재를 씻어내고 질서를 회복하면서 새로운 조국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의 실시와 38선의 확정은 부산의 역사에도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으로 부산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의로운 부산 사람들의 민주항쟁은 8ㆍ15를 맞이하여 설립된 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건설운동에서 비롯하여, 이승만 정권 하의 반공 파시즘 하에서도 계속되었고, 1960년 4ㆍ19민주항쟁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4ㆍ19민주항쟁이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에 짓밟히고 18년간 계속된 군사정권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부산의 민주세력은 민주화투쟁을 계속하였습니다.]

    여기서 1948년 대한민국정부의 수립은 사실상 미군정이 드리운 어두운 역사의 연장으로서 ‘李承晩 정권의 反共파시즘’이 성립한 사건에 불과한 것으로, 그에 따라 부산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종사한 민주화투쟁의 새로운 역사를 연 출발점으로 설정되고 있을 뿐이다.


    11. 建國 談論의 부활(2003-2007)

    대한민국의 建國과 産業化를 이끌어왔다고 자부하는 右派 民間社會는 김대중 정부에 이은 노무현 정부의 통일정책과 노무현 정부가 새롭게 벌린 과거사청산작업이, 나아가 2003년부터 公敎育의 현장에 보급되기 시작한 근ㆍ현대사 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뿐 아니라 大韓民國의 建國史를 사실상 부정하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조직적인 대응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2003년 광복절에 ‘建國55周年 反核反金 8ㆍ15國民大會’를 서울역광장에서 개최하였다. 그에 대항하여 左派 민간사회는 둘로 나뉘어 ‘반미반전 청년학생 대행진’과 ‘반전평화 8ㆍ15대행진’을 가졌다. 같은 현상은 2004년 광복절에도 반복되었다. 우파 진영은 시청앞광장에서 ‘대한민국 건국56주년 국민화합 대축제’를 열었으며, 좌파 진영은 한반도 평화정착과 이라크 파병철회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가졌다.
    2005년 60돌의 광복절을 맞아서는 서울에서 ‘6ㆍ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의 주관으로 ‘자유평화통일을 위한 8ㆍ15민족대축전’이 개최되었다. 이 행사에는 북한 대표 200명과 해외동포 150명이 참가하였다. 개회식에서 白樂淸 준비위원장은 “우리는 하나, 조국은 통일”을 선언하였다. 동 축전은 남북통일축구경기를 시작으로 통일대행진, 축하공연, 체육오락경기 등으로 이어졌다. 남북통일축구대회에서 관중들은 太極旗를 흔들거나 ‘대한민국’을 응원구호로 외칠 수 없었다. 이에 대응하여 우파 민간사회의 국민행동본부는 서울역광장에서 광복절 기념집회를, ‘반핵ㆍ반김국민협의회’는 세종로에서 ‘북핵폐기 북한해방을 위한 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같이 민간사회의 갈라진 광복절 기념은 2006, 2007년에도 반복되었다. 

    2003년부터 우파 민간사회가 年例의 光復節을 맞이하여 주관한 집회나 대회가 建國의 記憶을 전면에 내걸기 시작했음은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앞서 몇 차례 강조하였듯이 1960년대 이후 공적 기억의 영역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잊어져 왔다. 그럼에도 건국에 참여한 우파 민간사회는 그에 대한 기억을 놓지 않고 이어왔던 것이다. 그러했던 그들의 기억이 그들이 보기에 건국에 참여하지 않거나 반대한 정치세력에 의해 대한민국의 正統性에 상당한 위기가 초래되자 그들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결속시키는 매개로 작용하였다. 전술했듯이 건국 담론은 해방 후의 건국과정에서부터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건국을 지지했던 우파 민간사회를 통합하는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한 현상은 건국 담론이 부활한 200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새롭게 부활한 건국 담론은 保守 言論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2006년의 광복절을 맞아『동아일보』는 “광복과 건국을 자랑스럽게 만들자”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유례없는 갈등과 혼란 속에서 광복61주년과 건국58주년을 맞는다”고 하였다(06.8.15.). 2007년 광복절을 맞아서는 연말에 있을 대통령선거를 의식하여 “대한민국 지킬 지도자 뽑아 건국의 뜻 살리자”라는 사설을 게재하여, “8ㆍ15는 광복절이자 대한민국 건국일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건국을 잊고 살았으며”, 2008년은 건국 60주년인데, 그에 대비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켜낼 지도자를” 뽑자고 주장하였다(08.8.15.).

    건국 담론의 부활에는 대학사회 일부의 적극적인 참여가 한 몫의 역할을 하였다. 전술한대로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사실상 부정하는 근ㆍ현대사교과서가 노무현정부의 출범과 때를 같이 하여 교육 현장에 보급되었다. 보수 언론이 그 문제점을 보도하기 시작했으며, 2003년 國會의 國政監査 현장에서 전 국민의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뒤이어 2005년 교과서포럼이라는 대학교수 중심의 단체가 결성되어 동 역사교과서의 문제점을, 특히 금성사판 교과서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해부하였다. 교과서포럼은 몇 차례의 학술행사를 가진 뒤 代案敎科書의 편찬에 착수하여 2008년 3월 『대안교과서 한국근ㆍ현대사』(기파랑)를 출간하였으며, 뒤이어 동년 12월에는 『한국현대사』(기파랑)를 출간하였다. 그보다 앞서 2007년에는 李柱郢 외 8명의 보수 성향의 연구자들이『한국현대사의 이해』를 출간하여  새로운 역사교과서의 대안을 모색하였다.

     이들 대안교과서는 기존의 역사교과서와 달리 인간의 自由와 人權을 역사를 해석하는 최고의 기준으로 선택하였다. 그러한 역사관에 입각하여 이들 대안교과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정치체제와 경제체제의 선택이었으며, 그것이 정당한 방향이었기에 이후 60년의 짧은 기간에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적 정치적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들 대안교과서는 공통으로서 1945년 이후의 北韓 現代史를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분리하여 교과서의 부록으로 기술하였다. 이는 기존의 근ㆍ현대사 교과서가 남한과 북한의 역사를 하나로 묶어 韓民族의 現代史로 기술했음과 큰 차이점을 이루었다. 이 점은 이후 한국의 좌파 민간사회와 지식인들이 대안교과서에 가장 심각하게 반발한 요소를 이루었다.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에서 주목되는 바는 文明史의 轉換으로서 우리의 근ㆍ현대사를 볼 것을 주문하는 새로운 歷史觀과 方法論을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동 대안교과서는 오늘날 한국인들의 정치와 경제생활의 기본 틀을 이루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가 어디서 유래했고 어떻게 성립했는가를 근ㆍ현대사 공부의 기본과제로 설정한 다음, 그것들이 서유럽의 近代文明과 우리의 傳統文明이 충돌하고 융합하는 과정에서 유래하고 성립했음을 논리적으로 실증적으로 서술하였다. 이 같은 역사관에 입각하여 동 대안교과서는 우리의 불행했던 植民地期의 역사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가하여 그것이 日帝의 侵略과 그에 대한 抵抗의 역사일 뿐 아니라 한국인들이 주체적으로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하는 역사이기도 했음을 분명히 하였다. 

    대안교과서에 대한 左派 民間社會와 지식인들의 반발은 격렬했지만 감정적인 것이어서 생산적인 논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들은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에 대해 많은 記述 상의 착오를 지적했지만 그 대부분은 비판자 자신이 사실을 착오하거나 악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현행 연구수준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잘못 제기된 것들이었다. 논쟁은 근ㆍ현대사를 조망하는 歷史觀이나 方法論의 수준에서 생산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다. 논쟁은 유감스럽게도 정치적 攻防으로 시종하였다. 게다가 北韓의 중앙방송은 대안교과서를 두고 좌시할 수 없는 反民族的 策動이라고 협박하였으며, 民勞黨의 격렬 당원들은 대안교과서의 火刑式까지 거행하였다.


    12. 建國60周年의 경축과 분열(2008)
       
    2008년 우파 민간사회의 지지로 집권한 李明博 대통령은 동년의 광복절을 ‘건국60주년’으로 경축하였다. 이를 위해 새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설치하였으며, 동 위원회 주관으로 각종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건국60주년’을 경축하는 공식 式典에서 건국 이후의 역사를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명박 정부의 ‘건국60주년’은 전례가 없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전술하였듯이 1958년 건국의 당자였던 제1공화국은 1958년을 ‘정부수립10주년’으로 경축하였다. 이후 40년간 그러한 경축은 없었다. 그러다가 1998년에 이르러 김대중 정부에 의해 ‘정부수립50주년’이 공식 경축되었다. 이처럼 지난 60년간 정부가 ‘建國’ 두 글자를 전면에 내세우고 공식 식전을 꾸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우파 민간사회에서도 ‘건국6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기 위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학술대회가 거둔 여러 가지 성과 가운데 필자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建國史’라 할 만한 역사학 내지 정치학의 범주가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建國은 나라를 세우는 일만이 아니라 나라를 만들어가는 장기의, 前進과 逆進이 반복하는, 고난으로 가득한 과정이다. 나라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그와 상이한 理念이나 利害關係를 소지한 정치세력으로부터 그들의 권력과 기득권을 몰수하거나 억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에 건국은 불가피하게 비도덕적인 폭력이 행사될 수밖에 없는, 많은 경우 전쟁을 동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국가의 이념을 이해하는 國民을 만들고 그들로부터 자발적인 參與를 유도하는 건국의 진정 어려운 정치적 과제는 건국 초기의 제한된 자원을 특정 부분에 우선 집중함으로써 國民福祉를 증대시키는 經濟開發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두 과정의 조화로운 달성은 결코 쉽지 않아서 많은 경우 자신의 국민에 대해 강압적인 정치적 지도력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건국이란 이처럼 이율배반적인 과제들이 중복으로 제기되는 과정이어서 많은 나라에서 그 성공은 보장되지 않았으며 五里霧中의 試行錯誤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위 국제학술대회는 대한민국의 건국사가 비교적 성공적일 수 있었던 정치적 리더쉽 등의 몇 가지 조건을 상기하고 재평가하였다.

    이 같은 建國史의 再照明이 국민 일반으로부터 넓은 동의와 참여를 전제한 것은 아니었다.
    ‘건국60주년’이 전례가 없는 일이었던 만큼 야당과 좌파 민간사회의 반발은 격렬하였다. 야당은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정부의 공식 식전에의 참여를 거부하고 白凡記念館이라는 별도의 장소에서 별도의 기념식을 가졌다. 한국의 정치사회가 자신의 건국사를 두고 이같은 분열상을 보인 것 역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 같은 야당의 행동은 10년 전 그들이 집권세력으로서 주도한 ‘제2건국운동’과도 명확히 배치되는 것이어서 그 해명이 쉽지 않은 돌출적인 것이었다. 앞서 소개하였듯이 당시 출간되거나 배포된 각종 책자나 기념물에서 ‘제1건국’은 부정되기는커녕 그 역사적 의의가 높이 평가되기도 했었다.

    그보다 앞서 강기갑 등 74명의 국회의원과 시민단체의 대표들은 정부의 ‘건국60주년’ 경축이 국민의 基本權을 침해하여 憲法 위반임을 주장하는 訴願을 제기하였다. 그 주요 이유를 요약하면 첫째 1919년에 성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 활발한 외교활동과 군사활동을 벌인, 국제적으로 그 독립이 승인된 국가였으며, 둘째 이에 ‘건국60주년’을 경축하면 1919년에 성립한 임시정부를 부정하게 되어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현행 헌법을 위반하게 되며, 셋째 이로써 지난 60년간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줄 믿어온 독립운동가와 국민의 애국심에 큰 상처가 생겨 그들의 名譽權과 幸福追求權이 침해되며, 넷째 1948년의 건국을 인정할 경우 38선 이남 지역만을 대상으로 설립된 정부만을 인정하게 되어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領土條項 및 統一精神을 유린하게 되며, 다섯째 1948년의 건국은 일본이 1905년 獨島를 자기 영토에 편입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1948년에 생긴 新生國임을 자인하는 결과가 되어 독도에 대한 영토권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 등이었다. 헌법소원에 이어 청구자 74명은 ‘헌법소원 청구자들의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 여기서 그들은 이명박 정부의 건국60주년 기념은 “반만년 동안 이어져 온 한민족의 역사를 순식간에 60년 신생국 역사로 움츠러들게 하는” ‘일부 親日保守勢力’의 책동이라고 비난하였다. 때를 전후하여 광복회,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외 18개 관련 단체, 민족자주연맹과 三均學會 외  21개 관련 단체, 평화통일시민연대, 민족화합운동연합, 민주언론시민연합 외 16개 단체, 한국근현대사학회 등 5개 역사학 단체 등이 위와 같은 야당의 주장과 동일한 취지의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의 ‘건국60주년’ 기념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동년 11월 憲法裁判所가 위와 같은 헌법소원을 기각한 것은 정부의 건국60주년 기념사업이 청구자들이 보유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주장에 대한 法理的 판단의 차원이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의 國民主權原理나 통일정신이나 영토규정은 헌법의 沿革的 理念的 기초로서 법률해석에서의 해석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그에 근거하여 곧바로 국민의 개별적 기본권의 침해 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전제 하에, 정부의 건국60주년 기념사업이 헌법 전문이 밝히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부분에 위배된다는 점이 소원 청구자들의 법적 지위에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영향을 주어 국민의 기본권을 훼손했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다고 하였다. 또한 ‘건국60주년’이란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만으로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어 헌법이 규정한 國民投票權의 침해 가능성이 인정되지 않으며, 건국60주년 기념사업으로 청구인들이 內心의 동요와 혼란을 겪었을지라도 헌법상의 名譽權과 幸福追求權의 침해 가능성 및 법적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獨島에 대한 領土權과 관련해서는 정부의 기념사업이 독도 영유권의 포기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아 영토권을 둘러싼 기본권의 침해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이 같은 헌법재판소의 법리적 판단에서 대한민국의 건국 연도가 정부의 주장대로 과연 1948년인지, 아니면 청구자들의 주장처럼 1919년인지에 대한 판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은 설령 청구자의 주장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청구자들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법리적 근거는 될 수 없다는 취지의 서술을 두어 차례 반복하였다. 대한민국이 언제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가에 대한 판단은 정치적인 것이며, 歷史學과 社會科學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취지에서 헌법소원 제기자들의 주장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간단히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1919년에 세워진 臨時政府가 국제사회가 승인한 독립국이라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임시정부의 당국자들조차 그러한 주장을 제기한 적이 없다. 앞서 소개한대로 1945년 환국한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임시정부를 ‘建國運動의 工具’로 규정하였다. 대한민국이 지난 60년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는 주장도 그러한 내용의 헌법 전문이 1987년에 성립하였으므로 사실이 아니다. 현행 헌법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강조한 것은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에서 공인된 독립국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독립이념과 독립운동이 大韓民國의 역사적 正統性의 근거를 이룬다는 취지이며, 그것으로 臨時政府에 대한 국가적 顯彰은 충분하다고 사료된다. 1948년의 건국을 인정함은 대한민국을 불과 60년 역사의 新生國으로 떨어뜨린다는 주장은 國家만을 역사의 단위로 간주하는 동의하기 힘든 시각에 입각한 것이다.

    역사는 국가의 역사만이 아니라 民族의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는 政治만의 역사가 아니라 經濟, 社會, 文化의 복합적 層位이다. 설령 異民族에 의해 지배된 역사라 하더라고 그것이 민족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시대에 민족의 생명과 문화가 살아 움직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5천 역사의 中國史야말로 原民族과 異民族의 지배가 거의 비등하게 교대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중국사의 단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늘날 중국은 1949년에 성립한 中華人民共和國이다. 2009년 10월 이 나라는 ‘건국6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하였다. 더 이상의 자세한 비판은 생략한다.

    어쨌든 좌파 민간사회와 정치세력의 반발을 의식해서인지 이후 이명박 정부의 역사인식과 관련된 정치적 행보는 이른바 中道實用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2009년과 2010년의 광복절 기념은 이전의 역대 정부에서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건국과 무관하게 沒歷史的으로 치러졌다.
    2009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梁東安은 인터넷 신문 뉴데일리에 1949년에 국경일로 제정된 光復節은 원래 獨立紀念日이었으며, 이에 동년의 광복절은 64주년이 아니라 61주년으로 기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뉴데일리09.8.13). 지난 60년을 이어온 국민 일반의 常識에 反하는 꽤나 충격적인 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와 사회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신경한 忘却의 세월은 다시 이어지고 있다.  

     13. 맺음말

    모든 歷史的 記憶은, 심지어 忘却조차, 정치적인 것이다.
    이 말이 타당한 것이라면, 그 가장 훌륭한 사례를 지난 60여년에 걸친 大韓民國의 建國史에서 찾을 수 있을 터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정치세력들은 1948년의 건국 사건을 잊거나 부정하거나 1919년에 건국되었다는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냄에 있어서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알게 모르게 깊숙하게 개입시켜왔다. 이 점을 새삼스레 확인하면서 이 글에서 추적해 온 건국사의 경과와 그에 관한 기억의 60여년에 걸친 行步를 간략히 요약하는 것으로 맺음말을 삼고자 한다. 

    1945년 8월 15일의 解放은 한국인들에게 光復祖國의 진정한 과제인 獨立을 당면한 정치적 과제로 제기하였다. ‘獨立’은 ‘建國’ 또는 ‘政府樹立’으로도 표현되었다. 이후 3년은 建國 談論이 풍성히 발달한 기간이었다. 중국에서 귀국한 臨時政府는 ‘건국운동의 공구’로 자신을 자리매김하였다. 독립적인 국가가 이미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정치세력은 국내외 어디에도 없었다. 1948년 8월 15일에 大韓民國의 政府樹立이 만방에 선포되었다. 그 ‘정부수립’은 동시대의 한국인들에게 ‘독립’ 내지 ‘건국’과 동일한 뜻이었다. 그런 위에 ‘정부수립’은 유엔의 결의에 준거하여 독자의 국민국가를 세우는 마지막 政治過程을 대변하는 뜻이기도 했다.

    1949년 4대 國慶日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할 때 光復節은 법률의 원안에서 獨立紀念日이었다.
    광복절은 독립기념일과 동일한 뜻이었으며 명칭만 변경되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光復이란 復古風의 명칭은 自由民主主義에 입각하여 새로운 국가가 세워짐이 갖는 혁명적이고 진취적인 의의를 담기 힘들었다. 독립기념일의 광복절로의 명칭 개정은 한국들이 자신의 건국사를 잊게 하는 깊은 後患을 남겼다. 1950, 1951년까지는 제2회, 제3회의 광복절로 기념되어 건국의 기억이 그런대로 保全되었다. 그렇지만 이후의 광복절은 民間 言論의 선도 하에 1945년을 起年으로 하였으며, 그 같은 혼동은 1955년 이후 정부와 민간사회의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전쟁의 파괴, 정치의 혼란, 민족의 분단, 빈곤, 정경유착, 부정부패와 같은 1950년대의 암울한 현실이 건국에 관한 국민의 집단 기억을 쉽사리 지웠던 모양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1958년의 광복절은 ‘정부수립10주년’으로 성대하게 경축되었다. 이후 40년간 그러한 일은 다시없었다. 제1공화국의 정치적 실패를 상징하는 4ㆍ19와 5ㆍ16 이후 역대 대통령은 연례의 광복절을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경축하고 민족의 통일을 誓願하는 국민적 축일로 쇠었다. 그 기간 역대 정부의 정치 지도자들은 해방 후의 현대사를 오로지 좌절과 시련의 역사로만 치부함으로써 그들이 추구한 ‘祖國近代化’의 역사적 정당성을 專有하고자 했다. 그러한 세월이 거의 30년간 이어지면서 1948년 8월 15일 그날에 대한민국이 성립했다는 기억은 아득하게 사라져 갔다.

    그렇게 장기간 방치된 역사적 기억의 空白을 선점한 것은 1985년 이후 한국 현대사를 毛澤東主義의 新民主主義革命論에 입각한 해석하는 民族民衆史였다. 동 역사학은 한국 현대사를 反民族 親日勢力이 미국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민족의 분단을 초래하고 대외종속, 장기집권, 정경유착, 부정부패를 일삼은 어두운 역사와 미군정과 대한민국의 성립에 저항하고 4ㆍ19혁명으로 결실을 맺기 시작하여 이후 민주화투쟁을 성공적으로 전개한 밝은 역사의 투쟁과정으로 묘사하였다. 그들은 1948년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건국을 사실상 부정하였으며, 나라다운 나라가 성립하는 것은 4ㆍ19혁명 이후라는 역사인식을 추구하였다. 그들의 이 같은 현대사 이해는 1987년 이후 대학사회와 노동운동계에 풍미한 反帝民族統一運動의 동력이 되었으며 金大中 정부 이래의 관념적인 統一政策과 統一運動을 견인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벌인 ‘제2건국운동’과 ‘정부수립50주년기념'은 한편으로는 1948년의 제1건국을 평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貶下하는, 그 대신 임시정부를 현창할 의도를 지닌, 복잡한 사건이었다. 2003년에 성립한 盧武鉉 정부는 그러한 애매함으로부터 탈피하여 매우 명시적으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비판하고, 그 일환으로 過去事淸算作業에 착수하였다. 때를 같이 하여 民族民衆史의 관점에서 기술된 역사교과서가 公敎育의 현장에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곳곳에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부정하는 展示空間의 歷史博物館이 정부의 지원으로 건립되었다.

    이같은 좌파의 공세에 밀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우파 민간사회와 정치세력이 조직적인 대응을 시작하는 것은 2003년부터였다. 그들은 自由主義 歷史觀에 입각하여 1948년 이래의 건국사를 밝고 긍정적으로 재해석한 代案敎科書를 출간하였다. 2008년 우파 정치세력으로의 정권교체와 함께 본격화한 건국사 논쟁은 야당이 동년의 건국60주년 기념식을 거부할 정도의 심각한 정치적 분열로 이어졌다. 이후 李明博 정부의 중도실용 노선으로의 전환과 더불어 논쟁은 建國의 起源을 애매하게 방치한 채 잠복 상태에 들었다.

    이 논문은 앞으로 보완되어야 할 몇 가지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다. 한국인들이 그들의 건국사를 쉽게 잊은 데는 그럴만한 객관적 여건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1948년의 건국이 동시대 한국인들의 日常生活에 길이 남을 충격으로 크게 작용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건국을 전후한 일상생활의 規律은, 일제가 지배의 목적을 위해 도입한 民法, 刑法, 商法 등의 제반 법률과 제도가 1950년대 말까지 그대로 依用되었듯이, 그리 심각한 변화를 체험하지 않았다. 정치ㆍ사회ㆍ경제의 엘리트집단도 식민지기의 모습 그대로 건재하였다. 건국을 주도한 정치세력의 도덕적 권위와 지도력도 형편없이 취약하였으며, 처음부터 李承晩 개인의 대중적 권위와 동원력에 크게 의존하였다. 그나마 그들은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심각한 분열과 대립으로 빠져들었다. 制憲議會를 구성한 정치 엘리트들의 논리, 판단, 실행의 능력에도 문제가 많았다고 보인다. 國慶日을 제정함에 있어서 건국의 유기적 일환을 이루는 憲法制定과 政府樹立을 분리하여 중복 경축코자 했음은 처음부터 그에 대한 진지한 반대가 있었듯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초의 獨立紀念日을 光復節로 복고풍으로 改稱하였음은 독립이 갖는 ‘曠古의 斷絶’(전술)로서 혁명적 의의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그리 절실하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 위에 전쟁을 경과한 50년대의 정치ㆍ경제ㆍ사회의 객관적 현실은 識者들의 탄식과 조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건국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이미 누차 여러분이 지적해 왔듯이 國家體制의 선택이 정당한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自由 價値에 입각한 국가체제의 선택은 日帝의 지배체제에 깃든 近代文明의 요소를 그대로 계승케 함으로써 건국과정을 비폭력적 형태로 유도하였으며, 그것은 그대로 新生國家의 건국 기억이 희미할 수밖에 없도록 한 客觀的 制約을 이루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이 그들의 건국사를 쉽게 잊어버렸던 것은 이 같은 객관적 제약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內面化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다름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國家란 무엇인지, 국가이념의 기초로서 自由 가치가 어떻게 의식되고 추구되고 대응되는지에 관한 적극적인 분석이 요망된다고 하겠는데, 본 논문은 마땅히 참고할 연구를 찾기 힘들어 그 점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아무래도 역사는 飛躍을 허용하지 않으며, 文明史의 成熟과 轉換에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걸리기 마련이다. 불과 한 세기 전까지 한국인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했던 朝鮮王朝는 性理學的 禮의 秩序로 존재한 道德國家였다. 이후 20세기의 역사를 겪어내면서 한국인들이 감각하고 실천하는 국가란 도대체 어떠한 것일까?
    이 같은 의문을 글 말미에서 공동의 연구과제로 제기해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