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는 이색적인 두 개의 도시가 있다. 하나는 천리교(天理敎)의 메카인 덴리시(天理市)이고, 다른 하나는 자동차 회사 도요타의 보금자리인 도요타시(豊田市)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삼성시(三星市)와 현대시(現代市)가 나올지 모르지만, 일본의 이들 두 도시는 그 역사도 제법 오래다.
    옛 유적들이 즐비한 나라(奈良) 분지에 자리 잡은 덴리는 워낙 주민의 대다수가 천리교 신도들이었다. 마침 1954년에 행정구역상의 명칭 변경이 이뤄지게 되자 인근 6개 동네가 한데 뭉쳐졌다. 그래서 ‘종교문화의 도시로 새롭게 발돋움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이름마저 아예 덴리시로 고쳐버렸던 것이다. 그런 역사를 뒷받침하듯 덴리시에는 천리교 본부가 있고, 일본의 외국어학교 가운데 가장 먼저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덴리대학(天理大學) 캠퍼스도 있다.

  • ▲ 도요타의 창업주 도요타 기이치로.ⓒ자료사진
    ▲ 도요타의 창업주 도요타 기이치로.ⓒ자료사진

    방직회사로 출발했던 도요타회사는 가업을 이어 2대째 오너가 된 창업자의 아들이 생산 아이템을 자동차로 180도 바꾸어 버렸다. 서양 여행을 통해 직물은 ‘지는 해’인 대신 자동차는 ‘뜨는 해’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1933년 9월에 미국 GM의 최신형 시보레 한 대를 일본으로 들여와 발기발기 찢었다. 주저 없이 신품 자동차를 완전 해부함으로써 부품 하나하나를 베꼈던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2년 만에 승용차와 트럭 시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하고, 본격 가동을 위해 새로운 공장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듣고 발 빠르게 움직인 곳은 도요타 창업자의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로모라는 지방이었다. 마을 특산품이던 양잠과 제사업(製絲業)이 사양 산업으로 밀려나면서 시름에 잠겼던 촌장을 위시한 마을 유지들은 적극적으로 도요타의 새 자동차 공장 유치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1938년에 매달 승용차 500대, 트럭 1500대의 생산능력을 갖춘 거대한 공장이 완공되었다. 태평양전쟁으로 한 때 위기에 몰렸던 도요타는 한반도에서 터진 전쟁으로 다시 호황을 누렸으며, 자동차 산업이 급성장하여 고로모 지역 내에만 도요타의 7개 공장이 들어서자 1959년에 마을 이름을 아예 도요타로 바꾸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도요타자동차는 창사 64년만인 1999년에 자동차 1억대 생산의 대기록을 세움으로써 닛산(日産), 혼다(本田), 미쓰비시(三菱) 등 여타 일본 메이커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기야 일본의 자동차 업계는 1980년부터 본고장 미국을 따돌리고 세계 최대의 자동차 생산국에 올랐다. 이후 엔고(円高)의 여파로 수출량이 줄어들 때까지 15년이나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이처럼 일본은 비단 자동차뿐 아니라 여타 제조업 분야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의 수많은 제품들이 세계 시장을 석권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중 한국인을 비롯한 전 세계의 소비자들 뇌리에 각인된 유명 제품을 한 두 개만 꼽으면 어떤 게 있을까?
    단일 품종으로 가장 많이 팔린 물건은 소니(SONY)의 워크맨이란다.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가 사원들의 반대를 누르고 개발한 워크맨은 물경 2억 개가 넘게 나갔다. 워크맨이라는 브랜드는 사실 국내용이었다. 미국에서는 ‘사운드 어바웃’, 영국에서는 ‘스토우 어웨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프리 스타일’로 각양각색이었다. 나중에 워낙 빅 히트를 치자 워크맨으로 통일되었다. 덩달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당당히 수록되었고....
    워크맨을 아는 어린이들이라면 ‘NINTENDO'라는 브랜드도 기억할 것이다. 닌텐도(任天堂)가 개발한 휴대용 게임기기인 ‘게임보이’는 1억 대가 팔렸다. 걸프전 당시 전선에 배치된 미군 병사들이 ‘심심풀이 땅콩’으로 애용했다고도 한다.
    닌텐도는 100여 년 전, 화투를 만들며 창업했다. 그런 회사가 미국 시애틀에 1400여 종업원을 거느린 현지 법인을 세우더니, 1992년에는 거금 1억 달러를 들여 메이저리그 시애틀 매리너스 팀의 새 구단주가 되었다. 일본의 야구 천재 이치로가 이 팀의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빈다.
    닌텐도에는 없는 게 많다고 했다. 사훈(社訓), 사가(社歌), 사장(社章)처럼 여느 기업이라면 반드시 있는 것이 없다. 정년퇴직도 없을 뿐더러 노동조합도 없단다. 그런 일터라면 필경 컴퓨터산업의 생명인 창의력이 흘러넘치리라. 흔하디흔한 로고마저 없어 ‘NINTENDO’가 곧 심벌이라니 무에 더 이를 말이 있으리오.
    미국발(發) 금융위기의 여파가 전 세계를 몰아치자 어느 나라, 어느 기업 하나 온전한 데가 없었다. 탄탄대로를 질주하는 것 같던 일본기업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요타는 2007년에 물경 2조 2700여 억 엔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일본 신기록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거니와, 세계 1위라고도 했다. 그런 도요타가 불과 1년만인 이듬해에는 4600여 억 엔의 영업적자를 냈다. 이 또한 도요타가 기업회계를 시작한 1941년 이래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게 다 미국을 진원지로 한 경제 파탄 탓이었음은 물론이다. 하기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누구나가 손꼽던 GM, 미국인의 자존심이라던 이 회사는 아예 거들나지 않았던가. 더구나 일본은 달러의 가치 하락, 즉 엔고(円高)라는 시름마저 겹쳤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로서 그것은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비록 적자를 내긴 했으나, 어쩌면 그 동안 꾸준히 다져온 저력을 발휘하여 도요타가 선방(善防)한 것인지도 몰랐다.
    문득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던 것은 일본신문에 실린 한 꼭지의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2009년 5월25일치 <요미우리신문>은 도요타가 GM에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핵심 기술을 제공하려 한다고 보도했다. 당시 GM은 파산 신청을 앞두고 있었다. 도요타는 설사 GM이 파산하더라도, 원하기만 하면 자신들이 오랜 시간과 엄청난 비용을 투입하여 개발한  하이브리드 기술을 즉각 제공하여 구원투수로 나설 태세였다.
    기사에는 그 이유도 솔직히 적혀 있었다. 첫째, GM을 살려야 미국과 일본 사이에 자동차로 인한 마찰이 생기지 않는다. 다시 말해 도요타를 위시한 일본의 자동차 메이커들이 GM의 빈자리를 차지할 경우, 왕년의 무역마찰이 재연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GM이 도요타의 하이브리드 기술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장차 세계 표준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참고로 한국의 현대자동차는 도요타의 기술 제공 제의를 거절하고 독자적인 하이브리드 자동차 기술을 개발하는 모양이었다. 자, 이러니 동작 빠른 도요타가 위기를 기회로 삼아 또 한 발자국 먼저 달아나려는 건가?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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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y2cho8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