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서는 1885년 내각제도가 시행된 이래 2009년 여름 현재까지 모두 59명의 총리가 탄생했다. 120년에 걸친 역사 속에 일본은 입헌군주제를 표방한 전제정치에서, 군부가 주동이 된 제국주의의 길로 치달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이은 아시아 침략을 자행했다. 급기야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로 미국과 결전을 벌였다가 패함으로써 새롭게 민주주의의 길로 선회하기에 이르렀다.

  • ▲ 일본총리 관저ⓒ자료사진
    ▲ 일본총리 관저ⓒ자료사진

    그런 만큼 59명의 총리 가운데에도 별의별 인물이 다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초등학생도 아는 두 일본인 중 한 명인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총리였다.(다른 한 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거물 정객들을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해진 남부 야마구치(山口)에서 태어난 이토는 본래 최하급 무사 집안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토는 한 마디로 시대를 잘 타고났다고 해야 옳다. 메이지유신이라는 거대한 변혁의 소용돌이가 그에게 입신출세의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평소 술과 여자와 담배를 좋아했다는 이토가 또 한 가지 좋아한 것이 있었다. ‘최초’라는 수식어였다.
    그는 초대 총리였으며, 1888년에는 천황의 최고 자문기관인 추밀원(樞密院)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이태 뒤에는 최초의 국회의장(=귀족원 의장)을 역임했고, 1900년이 되자 정치가와 관료를 모태로 한 정당인 입헌정우회를 결성하여 초대 총재로 취임했다. 일본이 한반도 식민지화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1905년에는 자청하여 초대 한국통감으로 부임했다. 그러니 그는 어지간히 ‘초’ 자에 연연했던 것 같다.
    6번째 총리 자리에 오른 가쓰라 다로(桂太郞)는 청일전쟁에 참전한 육군 대장 출신으로 1901년부터 1913년 사이에 총 2천886일 동안 총리로 재임하여 최장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당초 그는 원로급 정객들이 서로 사양하는 바람에 일종의 지명 대타로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런 인물이 그토록 오래 권좌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사 정략가가 아님을 증명한다. 을사조약에서 한일합병에 이르기까지 한국이 일본의 야욕에 짓밟히는 모든 과정에 그가 일본 총리로 개입했음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그는 ‘헌정 옹호’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민중 봉기에 의해 물러난 첫 총리이기도 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역시 육군대장 출신이다. 그는 한국통감에 이어 초대 조선총독으로 있다가 원수로 진급한 뒤 총리로 추대되었다. 그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칼과 불상 수집에 관심이 많았다. 총독 재임 시절 거액의 자비를 들여 사들인 불상을 조선총독부 미술관에 기증하기도 했고, 한반도에서 석탑과 불상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고 적혀 있다.
    데라우치의 바통을 이어받아 총리가 된 하라 다카시(原敬)는 암살당한 첫 총리로 기록되고 있다. 도쿄역에서 한 청년에게 살해당했는데, 암살범은 국철(國鐵) 직원이었으며 배후에 우익의 공작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비해 18번 째 총리였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는 군인들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육․해군 급진파 장교들이 국가 개조를 외치며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관저로 난입했던 1932년의 ‘5.15사건’이 그것이었다. 이누카이는 갑신정변 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과 중국의 쑨원(孫文), 캉유웨이(康有爲) 등을 돕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패전 후 일본에서 열렸던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사형을 언도 받고 처형된 사람은 7명이다. 이 중 총리 역임자는 히로타 고키(廣田弘毅)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두 명이었다. 그리고 패전으로 쑥대밭이 된 일본의 총리로 위촉된 인물이 히가시쿠니 나루히코(東久邇稔彦)였다. 왕족인 그는 메이지 천황의 아홉 번째 딸과 결혼했다. 그가 왕족 첫 총리에 오른 것은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한 히로히토 천황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서였다. 비록 항복은 했지만 불만을 품은 일부 군부세력을 누르는 한편, 흉흉한 민심을 추스르는 데는 왕족이 직접 나서야한다는 판단에서였다고 한다. 일본의 역대 총리들 중에는 여든을 넘겨 장수한 이들이 적지 않은데, 그는 특히 102살의 천수를 누리고 1990년에 타계했다.
    일본이 연합국의 점령정치에서 벗어난 것은 1952년 4월에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해서였다. 일본은 이때부터 다시 하나의 주권국가로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독자 정치를 펴기 시작했는데,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 기시 노부스케가 먼저 눈에 띈다. 왜냐하면 그는 패전과 더불어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다가 요행히 처형을 면했으며, 국제정세의 변화 덕으로 1948년 크리스마스에 석방되었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해 점령정치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그 동안의 공직 추방 조치가 풀려 이듬해 다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정계로 복귀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불사조’ ‘거괴(巨魁)’ 등의 닉네임까지 얻은 기시는 급기야 정계 복귀 불과 4년 만에 총리 감투를 차지하는 요술까지 부렸다.
    일본인의 성씨를 다루는 항목에서 미리 설명했지만, 그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다. 7년 8개월 동안 장기 집권한 그는 총리 재임 날짜로는 2천798일로 가쓰라 다로보다 90일쯤 모자라지만, 연속 재임으로는 역대 최장수였다. 더구나 그의 재임 초기에 한일협정이 맺어짐으로써 우리나라와 국교정상화가 이뤄졌고, 일본이 패전 후 미국으로부터 돌려받지 못하고 있던 오키나와(沖繩) 반환이 성사된 것도 재임 말기인 1971년 6월이었다. 게다가 다소 애매한(?) 공적으로 1974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뽑힌 이듬해 이 세상을 떠났으니 여간 행복한 삶을 산 게 아니었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는 ‘일본열도 개조론’을 소리 높여 외친 불도저 정객이었다. 보잘것없는 학력(고등소학교 졸업)에다 소탈한 성격으로 최고의 권좌에 오른 그를 두고 사람들은 ‘서민 재상’ ‘20세기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애향심이었던지 표 욕심이었던지, 경제성이 없다는 반대를 무릅쓰고 도쿄에서 자신의 출신지인 니이가타(新潟)까지 신칸센을 개통했다. 대외적으로는 1972년 9월에 마지막 현안으로 여겨지던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재수립했다.
    그렇지만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다던가. 검은 돈에 얽힌 그의 비리가 만천하에 공개됨으로써 정치생명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항공기 구입을 에워싸고 미국 회사 록히드로부터 뇌물을 받은 ‘록히드 사건’은 월간 <분게이슌주(文藝春秋)> 1974년 11월호에 폭로되면서 한 꺼풀씩 베일이 벗겨졌고, 그의 손에는 마침내 쇠고랑이 채워졌다.
    1, 2심 재판에서 그에게는 징역 4년의 실형이 내려졌다. 기나긴 재판 기간 중 그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반신불수에 언어장애가 겹쳐졌고, 끝내 정계은퇴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타계하기 불과 반년 전인 1993년 7월, 총선에서 자민당이 과반수를 밑돌고 말아 전후 첫 비(非) 자민당 연립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렇듯 다나카는 영욕이 교차한 정치인이건만 지금도 여론조사를 해보면 인기 순위 1, 2위에 오른다니 그 나라 인심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에피소드 한 토막. 1992년 봄 장쩌민(江澤民) 중국 공산당 총서기(당시)가 일본을 공식 방문했다. 모처럼 중국에서 건너온 거물을 뒤쫓던 내․외신 기자들은 장쩌민의 발걸음이 잊혀져가는 한 일본 정객의 집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바로 다나카의 자택이었다. 투병 중이던 다나카는 뜻하지 않은 진객(珍客)의 방문에 그저 감격의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장쩌민은 기자들이 중풍으로 드러누운 다나카를 일부러 찾아간 이유를 묻자 “중국에는 우물을 파준 친구에게 감사한다는 격언이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나카의 총리 재임 시 맺어진 두 나라 국교정상화를 의미하는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다.
    이제 다나카 이후의 일본총리 가운데 다소 이색적인 인물을 꼽아보자. 먼저 미키 다케오(三木武夫)는 ‘부패 다나카’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청렴 정치인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클린 미키’라는 별명을 얻었다. 다분히 우익 성향이 강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는 국제사회를 향해 거침없이 할 말을 했다. 어느 결에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의 국력에 걸맞은 대우를 바랐다고나 할까. 그 바람에 ‘대통령급 총리’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패전 후 처음으로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를 찾아간 총리도 그였고, 총리로 취임하면 가장 먼저 미국으로 달려가던 그 동안의 관례를 깨고 한국을 공식 방문한 총리도 그가 처음이었다. 나카소네가 서울에서의 공식 만찬 후 여흥 자리에서 한국가요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를 불렀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그는 5년간의 총리 재임 중 24차례에 걸쳐 해외 40개국을 방문하여 역대 최다 기록을 세웠다.
    우노 소스케(宇野宗佑)는 엉겁결에 총리 자리로 떠밀려 올라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취임하자마자 주간지가 여성 스캔들을 폭로해 버렸다. 일본 정치인이 여성문제로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결국 그는 69일 만에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당시로서는 그것이 역대 최단명 기록이었다. 그로서는 불행 중 다행으로 불과 5년 뒤 연립정권의 총리에 오른 하타 쓰토무(羽田孜)가 닷새를 단축하여 64일 만에 총리직을 사임, 최단명의 불명예를 씻을 수 있었다. 
    옛 지역 영주인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는 38년만의 비(非) 자민당 출신 총리였다. 그가 창당한 일본신당은 의석 35석으로 원내 제5당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민당에서 갈라져 나온 신생당을 비롯하여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등 8개 당파의 연립정권 총리로 그가 추대를 받았다. 그렇게 군소 정당 당수가 총리에 오른 것 역시 전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는 패전 직후의 연합군 점령 하에서 총리를 지낸 가타야마 데쓰(片山哲)에 이어 사회당 출신의 두 번째 총리였다. 물론 무라야마의 경우는 불과 1년 만에 여당으로 부활한 자민당 및 신당 사키가케와의 3당 연립정권이었다. 그러나 사회당이 집권 세력의 한 축을 맡으면서 이제까지의 당 노선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 동안 반대해온 미일 안보조약과 자위대를 인정했고, 한일관계에서도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식민지 지배에 대한 잘못을 명백하게 사죄했다. 그 같은 일련의 변화는 결과적으로 친북 성향 사회당의 영원한 퇴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일본 총리의 집무실이 쇼윈도라는 게 무슨 뜻인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일본의 주요 신문 조간에는 매일 총리 동정이 실린다. 물론 경호상의 이유로 예정된 일정을 시시콜콜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총리 관저 홈페이지에 아주 간략하게, 주로 국회에서의 스케줄 위주로 나와 있다. 신문에 실리는 것은 하루 전의 일정이다. 단 일부 매스컴의 인터넷판에서는 당일의 총리 동정을 약간의 시차를 두고 분(分) 단위로 알려주기도 한다.
    가령 이명박 대통령이 당일치기로 일본을 다녀온 2009년 여름 어느 날을 살펴보자. 당시 일본 정계는 총선거가 코앞에 닥친 시점이었고, 아소(麻生) 총리의 집권 자민당은 정권을 내줄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에 놓여 있었다. 우선 한국 대통령의 방일 하루 전, 그러니까 6월27일의 총리 동정이 <산케이신문> 조간에 이렇게 실려 있었다.(편의상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구체적인 인명은 생략한다.)
    # 오전
    10시 3분부터 49분까지 공저(公邸) 주변을 워킹.
    # 오후
    0시 27분, 공저 출발. 50분, 호텔 퍼시픽 도쿄 도착. 호텔 구내 이발관 '사토(佐藤)'에서 이발. 1시56분, 동 호텔 출발. 2시23분, 도쿄 요쓰야(四谷)의 '스즈덴사케텐(鈴傳酒店)' 도착하여 쇼핑. 34분, 출발. 47분, 데이코쿠(帝國)호텔 도착. 5시30분부터 6시30분, 동 호텔 내의 바 '임페리얼 라운지 아쿠아'에서 자민당 총재 특별보좌관. 7시38분, 동 호텔 내의 일본요리점 '나다만'에서 자민당 간사장과 회식. 9시48분, 동 호텔 출발. 53분, 공저 도착.

    토요일이라서 그랬던지 일정이 비교적 단순했고, 개인적인 용무가 많았다. 한국 대통령 방일을 앞두었던지라 대책회의 비슷한 것이 있으리라 지레짐작했다가 머쓱해지고 말았다. 역시 <산케이신문>이 보도한 이튿날의 총리 동정도 "오전 10시 1분부터 44분, 공저 주변을 워킹"이 오전 스케줄의 전부였고, "오후 2시4분, 공저 출발. 6분, 관저 도착, 집무실. 3시14분부터 15분, 관저 현관에서 이명박 한국 대통령 영접"에서부터는 양국 정상회담으로 채워져 있었다. 참, 똑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일본총리의 행동 공간 가운데 숙식 등을 하는 사적인 영역을 공저, 공적인 업무를 보는 곳을 관저라고 구분한다.

    총리관저를 출입하는 각 언론사 기자들이 당번을 정하여 번갈아 가면서 꼼꼼히 챙기는 총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자칫 너무 시시콜콜, 미주알고주알 죄다 드러내는 것처럼 여길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국정을 책임진 인물의 하루 일과를 국민들에게 알린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마치 조선왕조의 ‘승정원일기’처럼 귀중한 사료다.
    그리고 이렇게 권부가 유리알처럼 투명하다면, 불법 정치자금 제공이니 인사 청탁이니 이권개입이니 하는 부정부패의 검은 손길이 뻗치기도 쉽지 않으리라. 햇살이 잘 드는 양지 바른 곳에 독버섯이 피어날 여지는 없을 테니까. 남 흉내 낸다고 거북해 하지 말고 우리도 청와대 동정을 날마다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어떨까.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도서 문의 : 기파랑 02-763-8996, 02-763-8996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y2cho8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