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11, K-21, 신형 고속함 모두 지난 정권서 급하게 추진'자주국방' 내세워 '국산화' 양산...개발과정 조사 문책을
  • ‘번갯불에 볶아 만든’ 신형무기들

    천안함 사태 이후 안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신형 무기들의 각종 결함도 함께 드러났다. 그런데 결함이 생긴 신형 무기들 중 다수가 지난 정권들이 강력하게 추진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문제가 된 신형 무기들은 육군의 K-1 전차, K-2 전차, K-9 자주포, K-21 보병전투차, K-11 복합소총, 해군의 검독수리급(일명 윤영하급) 고속함, 그리고 신형 전투화다. 이들 중 K-1 전차, K-9 자주포를 제외하고는 국방과학연구소와 국방부가 ‘순수 국산기술로 개발했다’고 자랑한 장비다. K-1 전차에서 문제가 된 포신은 미국의 M-68 105mm 포를 면허 생산했던 것이고 K-9 자주포의 엔진은 독일 MTU社 제품을 가져다 조립한 것이다.

    ‘흑표’로 불리는 K-2 전차는 그동안 ‘헬기 잡는 전차’ ‘미사일 막는 전차’ 등으로 불렸다. K-2 전차는 1995년 개념연구가 시작되었지만 실제 개발에 착수한 건 2003년부터다. 트랜스미션, 파워팩 등을 모두 국산화했다고 자랑하던 전차다.

    K-21 보병전투차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부터 국방과학연구소(ADD) 주관으로 개발이 시작됐다. 1999년 타당성 검토와 기본설계에 착수했고 2005년 초 두산인프라코어 등이 시제품 3대를 제작했다. 개발 비용은 2007년 개발 완료 때까지 총 910억이 투입되었다.

    K-11 복합소총은 2000년부터 관련개발업체와 부서가 편성되어 개발을 시작했다. 이때 군은 단순히 카피가 아닌 동등한 수준의 화기를 배치시킨다는 계획으로 개발을 진행했다.  2008년 XK11이라는 이름의 테스트 모델과 제원이 공개됐다. 육군은 이 무기를 2009년부터 분대지원화기로 배치하기로 결정, 2010년 5월 31일부터 보급하기 시작했다.

    윤영하급으로 알려진 검독수리급 신형 고속함은 참수리급 고속정을 대체하기 위해 개념 연구가 시작되었으나 우선순위가 밀리고 있었다. 그러다 2003년 삼성탈레스가 시제개발 계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됐다. 4년 후인 2007년 6월 PKG-711 윤영하 함이 진수됐다. 이어 한상국함, 조천형함, 황도현함, 서후원함이 2010년까지 진수됐다.

    ‘불량 전투화’로 불리는 신형 전투화 또한 2002년 1월부터 개발에 착수, 완료하고 보급하는데 8년이 걸렸다.

    이상에서 보듯 대부분의 무기가 10년도 안 되는 기간을 거쳐 만들어졌다. 이는 대부분의 무기를 자체 개발해 사용하는 미국이나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에 비해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참고로 미국이 F-22 랩터 전투기를 실전배치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23년. 1983년 ATF(차세대 고등전투기) 프로젝트를 시작해 2006년 1월 실전배치했다. 시제품인 YF-22조차도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14년 만인 1997년에야 선정됐다. 일본의 F-2 지원전투기 또한 개발을 마무리하는데 18년 걸렸다. 1982년 ‘차기지원전투기의 정비’라는 이름으로 개념 개발을 시작한 뒤 1987년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했고 2000년 10월 배치됐다.

    盧정권의 ‘자주국방’과 무기 개발

    해외 강국들조차 20년 가까이 소요되는 각종 첨단무기 개발을 우리는 왜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만들었을까. 여기에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겠으나 가장 의심이 가는 게 지난 정권들의 모토(Motto)다.

    김대중 정권은 ‘6.15남북공동선언’을 금과옥조로 여기면서 미국과 북한 정권 사이서 ‘중재자’인양 행동했다. 2003년의 노무현 정권은 ‘동북아 균형자’론과 ‘자주국방’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 정권 핵심부가 가진 생각 중에는 ‘미국에 종속되듯 구성된 한국군 무기를 자체 개발하자’는 것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盧정권의 ‘자주국방’을 70년대 故박정희 대통령이 말한 것과 같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盧정권이 말하는 ‘자주국방’은 2007년 발표한 안보구상에 나와 있듯 다른 뜻이다.

    盧정권의 국가안보 목표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남북한과 동북아의 공동번영 △국민생활의 안전 확보 등 세 가지다. 또한 국가안보의 전략기조로 ‘평화번영정책’, ‘균형적 실용외교’, ‘협력적 자주국방’, ‘포괄안보’를 내세웠다. 이에 따라 북핵에 대해서는 ‘대화로 해결하자’고 하고, 중국의 위협과 한미동맹의 해체 위기에는 ‘균형적 실용외교’를 내세웠으며, 한미군사동맹 해체위기가 불거지자 ‘협력적 자주국방’으로 풀어나가려 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국방부로 대거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소위 ‘시민사회단체’들을 불러들여 국방에 대한 ‘제언(提言)’을 듣는다는 것. 하지만 당시 국방부 정책홍보본부 담당자들은 내외에서 욕을 먹으면서도 안보 관련 단체 회원들을 함께 불러들여 ‘시민사회단체’의 힘을 빼버리고, 안보 커뮤니티를 육성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국방부에 온 실세’들은 정권 핵심과의 교감을 통해 ‘국방개혁안’을 만들고, ‘전시작전통제권 단독행사’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여당 의원들은 물론 故노무현 대통령까지도 ‘전쟁이 나도 제게는 권한이 없다’는, 틀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국방개혁 2020’이 완성되고, 전시작전통제권 또한 한국군이 단독행사하게 됐다.

    이와 함께 盧정권이 추진한 것이 바로 ‘자주국방을 위한 무기 국산화’다. 盧정권 핵심인사들의 또 다른 특징은 우리나라 기술에 대한 과대평가. 그들은 ‘미국도 만드는데 삼성전자, 현대자동차가 있는 우리가 왜 못 만드냐’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이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개념연구 중이던 전차, 보병전투차, 고속정, 차세대 보병 무기 개발 계획이 급진전되기 시작했다.

    ‘불량 무기’ 개발과정 조사, 책임자를 찾자

    하지만 무기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결국 처음에는 그럴싸하던 신형 무기들은 테스트 단계에서부터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대로 만들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살아있는 권력’이 원하는 것을 거스를 수 있는 ‘공무원’은 드물었다. 결국 이런저런 추가 조치를 통해 급하게 내놓게 된다. 그렇게 나온 것들을 국방부는 장기간 면밀히 테스트를 하지 않은 채 ‘명품무기’라 부르며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국민들은 언론 보도를 보며 뿌듯해 했다.

    이런 ‘날림’이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결국 2010년 3월 천안함 사태가 터지면서 안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기저기서 문제가 불거지게 됐다. 언론과 국민들은 이 일을 ‘면제내각’을 꾸린 이명박 정부의 모든 책임으로 몰고 있다. 안보 전문가가 드문 이명박 정부는 그저 얻어맞기만 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보면 지금 문제가 된 무기들을 누가 언제부터 개발했고, 왜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면서 개발․제작했는지를 따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면 군의 기강해이와 ‘불량’ 신형무기 문제의 본질적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