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은 메이지유신의 기점인 1868년 3월에 '태정관(太政官) 제도'를 선포했다. 일종의 군사정권이었던 막부가 붕괴되고 왕정복고의 새 정부를 수립하면서 그 뼈대를 세운 것이었다. 이 제도에서 최고위 직책이 조선왕조의 영의정 격인 태정대신(太政大臣)을 필두로, 좌의정이라 할 좌(左)대신과 우의정이라 할 우(右)대신, 그리고 판서 격인 참의(參議) 등이었다.
    그러나 1885년 연말에 와서 태정관 제도를 폐지하고 내각(內閣) 제도라는 것을 사상 처음 도입했다. 내각총리대신을 정점으로 궁내(宮內), 외무, 내무, 대장(大藏), 육군, 해군, 사법, 문부(文部), 농상무(農商務), 체신대신을 천황 아래에 두었다. 그리고 이들 11명의 대신 가운데 궁내대신을 제외한 10명으로 내각을 조직토록 했고, 초대 내각총리대신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임명되었다. 이토는 태정관 제도 하에서 참의 직책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일본 행정조직의 기반이 되었다. 물론 현행 일본 헌법은 미국이 주축이 된 연합군사령부(GHQ)의 점령정치 시절인 1946년 11월3일에 공포되고 이듬해 5월3일부터 시행되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내각법이 시행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가장 큰 차이는 앞서의 내각제도에서는 천황이 통치권을 갖고 각료를 임명하던 것에 견주어, 새 헌법에서는 ‘국민 주권' 아래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이 철저하게 분립된 것이었다. 게다가 헌법 제정을 배후에서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맥아더 사령관의 연합군사령부가 미국처럼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지 않고, 영국식의 의원내각제를 도입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이것은 아마 신격화된 존재에서 끌어내려져 ‘인간 선언'을 한 천황을, 형식상으로나마 일본인의 상징으로 남겨두는 편이 통치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알맹이는 완전히 바뀌었으되, 겉으로는 일본 각료들 대부분이 여전히 천황의 신하이다. ‘대신(大臣)’이라는 왕조의 직함을 그대로 쓰는 것만 봐도 그렇다. 우리가 흔히 ‘총리' 혹은 ‘수상'이라고 부르는 내각수반의 정식 명칭도 당연히 ‘내각총리대신’이다. 2001년부터 통폐합된 1부(府) 12성청(省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0개 부처의 우두머리는 변함없이 대신이었다. 나머지 2개 포스트, 즉 내각관방과  방위청만 이전부터 장관이었다.
    왜 그런가? 이유는 간단해 보인다. 우선 관방장관은 직책 자체가 총리대신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니까 직접 천황을 모시는 신하에서 한 걸음 비껴나 있다. 또 역대 천황은 친위군과 같은 직할 군대를 직접 거느린 적이 없고, 더구나 현행 헌법은 자위를 위한 무력 외에는 보유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니 방위청 장관은 언감생심(焉敢生心) 직계 신하가 될 수 없다는 게 학자들의 해설이었다. 그런 방위청이 방위성으로 승격되면서 방위청 장관도 방위대신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천황이 제국주의 시절처럼 군대를 진두지휘하겠다는 시그널?

  • 동경 치요다구 나가타쵸 1번지에 위치한 일본 국회의사당ⓒ자료사진
    ▲ 동경 치요다구 나가타쵸 1번지에 위치한 일본 국회의사당ⓒ자료사진

    여기서 잠깐 일본 의원내각제의 골격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국회부터. ‘국회’라는 한자어를 만든 것도 일본인들인데, 그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 일설에는 미국사람 브릿지맨(중국이름 裨治文)이 상하이(上海)에서 출판한 <연방지략(聯邦志略)>이라는 책을 1861년에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의회를 가리키는 단어를 ‘국회’라고 했다고 한다. 참고로 국회를 영어로 표기할 때 미국은 ‘Congress’, 영국은 ‘Parliament’, 일본은 ‘The national Diet’, 그리고 한국은 ‘The national Assembly’라고 각기 달리 적는다.
    일본 국회의 기원은 1890년에 개원된 귀족원과 중의원에 있다. 바로 그 한 해 전에 선포된 이른바 ‘제국(帝國) 헌법’의 규정에 따라 2원제로 개원된 입법기관이었다. 하지만 제국헌법 자체가 이토 히로부미 등이 강력한 군주권을 담은 프로이센 헌법을 참조하여 만든 것이었다. 그런지라 귀족원과 중의원은 겉보기야 그럴 듯 했으되 실제로는 천황의 입법권 행사를 보좌하는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다.
    귀족원은 주로 왕족과 공경(公卿)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초대 귀족원 의장 역시 이토 히로부미가 임명되었다. 또 당초 300명 정원이었던 중의원의 경우에도 선거권은 나이 25세 이상의 남자로서, 세금 납세 실적 상위자로 제한되었다. 따라서 전체 인구의 1퍼센트 가량만 중의원 선거에 나설 수 있었다. 게다가 개회와 폐회 및 해산 권한이 모조리 천황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러니 제국헌법 하의 귀족원과 중의원은 진정한 의미에서 민의의 대변기관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현재의 일본 국회는 태평양전쟁 패전 후에 제정된 현행 헌법에 의거하여 새롭게 구성되었다. 2원제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으나 고리타분한 귀족원이라는 명칭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바람에 상원과 하원, 좌원과 우원, 1원과 2원 등의 여러 가지 의견이 속출했으나 결국에는 참의원과 중의원으로 최종 낙착되었다.
    참의원과 중의원은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우선 양쪽 다 선거권은 20세 이상의 남녀에게 주어지지만 피선거권은 참의원이 30세 이상인데 반해 중의원은 25세 이상이다. 또 참의원은 6년 임기에 3년마다 절반의 의원을 물갈이하지만, 중의원은 임기가 4년이다. 게다가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 병립제를 채택하고 있는 중의원은 임기 중 해산이 가능하나, 참의원은 애당초 해산의 대상이 아니다. 의원 정수도 중의원이 480명이고 참의원은 그 절반가량인 242명이다.
    중의원과 참의원의 권한은 중의원 쪽이 우위에 있다. 법안 채택이나 총리 선출에서도 양쪽의 의견이 갈리면 중의원 쪽을 우선한다. 중의원의 경우 지역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일본에서 국회의원을 지칭하는 또 다른 단어 ‘다이기시(代議士)’는 중의원 의원에게만 붙인다.
    눈길을 끄는 것은 천황이 참석하여 열리는 정기 국회의 개원식만큼은 참의원 본회의장에서 연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메이지 시절 국회 개원식이 귀족원에서 열렸고, 그곳을 현재의 참의원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로부터 천황을 위한 시설이 귀족원에만 갖추어져 있어서 지금까지 천황의 국회 행차는 참의원 쪽으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일본식 의원내각제의 근간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국정을 진두지휘할 내각총리대신을 국회의원 가운데 표결로 뽑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각료의 과반수를 국회의원 중에서 내각총리대신이 지명한다는 점이다. 첫째 규정은 결국 다수당의 대표가 총리로 선출됨을 의미하며, 둘째 규정은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는 정치인에게 각 행정부서의 장(長)을 맡긴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민간인이 각료 자리에 발탁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정당은 정당대로 놀고, 파벌은 파벌대로 노는 것으로 깊이 인상지어진 일본의 정치판. 자질구레한 남의 집안 사정은 생략하기로 하고, 17년 공사 끝에 1936년에 완공되었다는 일본 국회의사당 안으로 잠깐 들어가 보자. 이 국회의사당의 중앙 부분은 높이 65.45미터의 탑 모양을 하고 있다. 건물로 치자면 탑의 4층 부분이 의사당 중앙 현관과 연결되어 있다. 평소에는 굳게 문이 잠겨 있는 중앙 현관은 정기국회 개원식을 위해 천황이 올 때와, 외국 국가원수의 공식 방문 때에만 문이 열린다.
    중앙 현관과 연결된 80평가량의 중앙 홀 네 모서리 중 세 군데에는 세 명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메이지 헌법 반포 50주년을 맞아 1938년 2월에 건립했다는 동상의 주인공은 이토 히로부미,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이다. 초대 귀족원 의장과 초대 내각총리대신, 그리고 초대 한국통감을 지내고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한 이토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그가 한국에서는 식민통치의 원흉으로 꼽히지만 일본에서는 위인의 한 명이라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컬하다.
    이타가키는 자유민권운동의 리더이자 자유당이라는 정당을 설립했던 정치가였다. 오쿠마는 사립 명문 와세다(早稲田)대학을 창립한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정치가로서도 정한론에 반대하고 일본의 첫 정당 내각을 수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결국 이들 세 명이 일본의 의회제도 확립에 기여했고, 후배 정치인들의 귀감이 된다는 뜻에서 세워진 동상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토 히로부미의 경우는 이미 그 한 해 전 국회의사당 내에 동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초대 귀족원 의장이었음을 기려 옛 귀족원 자리인 참의원 앞뜰에 건립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중앙 홀에 이중으로 또 세운 사실만으로도 일본 정치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을 가늠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의회 개원 1백주년을 맞았던 1990년에도 국회의사당 내 중의원 현관에 또 한 명의 정치가 흉상이 제막되었다. 총리를 역임한 미키 다케요(三木武夫), 그는 1988년 1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꼬박 51년 7개월 동안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었다. 일본 의회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현역 의원으로 뛴 인물은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였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정계에 뛰어들었던 오자키는 중의원 의원 당선 25회를 기록하며 63년간이나 의사당 의원석을 지켰다. 그로 인해 ‘헌정의 하느님’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현재 일본 국회의사당 바로 앞에 자리한 헌정기념관은 원래 ‘오자키 기념관’이었던 것을 확대 개편했다. 그래서 지금은 기념관 내부에 별도로 ‘오자키 메모리얼 홀’이 들어서 있다. 바로 그 오자키의 흉상이 한 발 먼저 중의원 현관에 세워졌고, 미키의 흉상은 그 곁에 나란히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어째서 중앙 홀의 네 모서리 가운데 한 곳은 비워둔 채, 오자키와 미키의 흉상을 굳이 다른 장소에 세웠을까? 한 마디로 후진 정치가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나도 언젠가는 저 자리에 서리라”는 원대한 포부, 혹은 위대한 야망을 새내기 정치인들에게 심어주겠다는 심모원려(深謀遠慮)의 발상이리라.
    잠깐 이야기가 옆길로 새지만, 한국에서도 그와 비슷한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하나는 서울 광화문에 있는 대형서점 교보문고에서였다. 이 서점의 출입 통로 두 곳에는 역대 노벨상 수상자 70여 명의 인물 데생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다. 미술대학 재학생들의 솜씨라고 했는데, 유독 2개의 액자는 텅 빈 채 아래쪽에 조그맣게 태극기만 그려져 있었다. 사연인즉 언젠가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하면 그 자리의 주인공으로 모실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그 중 한 군데는 채워졌고, 나머지 한 곳은 여전히 꿈의 공간으로 남아 있다.
    또 한 장면은 포항에 있는 포항공대를 견학하던 길에 목격했다. 학교 도서관과 강당 사이에 있는 광장에 6개의 좌대가 있었는데, 그 중 4곳에는 인물 흉상이 올려져있었다. 맥스웰, 아인슈타인, 뉴턴, 에디슨. 1986년 대학 설립 당시 세운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들의 흉상이었다. 다녀온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는지라 아직도 여전한지 궁금하지만, 그곳 역시 한국인 수상자를 기다리는 두 개의 빈 좌대가 꿈의 공간으로 남아 오가는 학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여의도 국회의사당 안에 온 국민의 존경을 받는 우리 정치가의 동상이 들어서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연목구어(緣木求魚)일까?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도서 문의 : 기파랑 02-763-8996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y2cho8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