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과 영국은 여러모로 닮았다. 우선 둘 다 섬나라이다. 자동차가 좌측통행하는 것도 같다. 내각책임제여서 대통령이 없는 대신 국회에서 선출한 총리가 나라를 이끄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양쪽 모두 상징적 존재인 왕이 있고, 왕실이 있다.
    그렇게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두 나라이건만 한 가지 전혀 다른 게 있다. 현재의 국왕이 엘리자베스 여왕인 것처럼 영국에서는 여자가 왕이 될 수 있으나 일본은 다르다. 남자만이 천황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이다.
    그 같은 일본 왕실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예로부터 내려온 전통은 아니다. 서기 592년부터 무려 36년 동안 왕위를 지킨 첫 여성 천황 스이코를 포함하여 역사상 8명의 여성이 왕좌에 올랐다. 그러던 것이 1868년에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여 서양식 제국주의를 지향하면서 ‘황실 전범(典範)’ 제1조에 남자만이 왕위를 이을 수 있다고 못박아버렸다. 그러다 보니 슬금슬금 부작용이 생겨난다.

  • ▲ 마사코 황태자비와 아이코 공주ⓒ연합뉴스
    ▲ 마사코 황태자비와 아이코 공주ⓒ연합뉴스

    2004년 7월4일 도쿄에 있는 일본 민예관에서는 뜻 있는 행사가 하나 열렸다. 행사의 타이틀은 한일 우호 특별 기념 음악회 ‘우정의 가교’. 세계적인 한국인 지휘자 정명훈이 피아노를, 일본의 나루히토(德仁) 황태자가 비올라를 맡아 모차르트 피아노 4중주곡 제1번을 협연했다.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 아직 일본 천황이나 황태자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 서울 올림픽을 비롯한 굵직한 이벤트가 열릴 때마다 이야기가 나오긴 했으나 한국인의 ‘반일 감정’을 우려하여 성사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위와 같은 조촐한 음악회가 일본 왕실이 한국을 향해 던지는 러브 콜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런데 이 무렵 나루히토 황태자의 속이 영 편하질 못하다고 관심 있는 일본인들이 소곤거렸다. 아내인 마사코(雅子) 황태자비가 스트레스로 인해 와병 중이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의 원인을 알려면 먼저 그녀의 성장과정부터 살피는 게 순서이다. 고위 외교관의 딸인 마사코비는 미국 유명대학을 나와 아버지를 본떠 자신도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명석한 두뇌와 탁월한 어학 실력으로 외교 무대를 누비려다가 총각이던 황태자의 짝으로 간택되어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이로써 일본 왕실은 현재의 미치코(美智子) 황후에 이어 두 번째로 민간 출신 여성이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황태자비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순탄했다. 서양인 뺨치는 외국어 솜씨로 이른바 ‘왕실 외교’에서 톡톡히 한몫 해내리라는 것이 본인은 물론 일본인 대다수의 기대이기도 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일본 왕실을 담당하는 궁내청이 사사건건 간섭(?)하여 그녀의 손발을 묶는 통에 결혼한 지 10년을 넘겼건만 외국 나들이는 고작 세 차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곁에서 아내의 속앓이를 지켜본 황태자가 참다 참다못해 급기야 분노를 터트렸다.
    “마사코의 커리어와 인격을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기자회견을 통한 이런 폭로는 왕실 역사상 유래가 없었다. 당연히 난리가 벌어졌다. 다들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 외면해왔던 ‘황태자비 스트레스의 진상’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에 다름 아니었다. 그녀가 결혼 7년 만에 간신히 임신에 성공하자 왕실 주변에서는 노골적인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딸을 낳아 기대가 물거품이 된 이래 ‘왕자 출산’의 스트레스가 더욱 크게 그녀를 억눌렀으리라는 것쯤은 삼척동자라도 짐작하고 남았다.
    일본 언론들뿐 아니라 외국 매스컴까지 그 같은 일본 왕실의 집안문제를 들추었다. 미국신문 <워싱턴 포스트>는 아예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세습 군주의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크나큰 황실의 의무를 짊어진 채 마사코비는 사실상 인질 상태에 빠져 있다”고 꼬집었다.
    그렇다고 당장 일본 왕실에 왕위를 이을 남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서열 1위인 황태자가 있고, 2위인 황태자의 남동생, 3위인 천황의 동생 등 7명이나 줄지어 있다. 그러나 직계의 맏아들로 왕위 계승의 전통을 세우고자 하는 궁내청으로서야 황태자비가 아들을 낳아 서열 2위에 오르기를 학수고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일본 왕실의 명백한 남아선호 정책에 반기를 드는 이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들은 규정을 고쳐 예전처럼 여성도 천황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실제로 매스컴의 여론조사에서도 절반을 훨씬 넘는 일본인들이 ‘여성 천황’에 동조하여 ‘변화하는 세대’와 ‘완고한 궁내청’이 줄다리기를 벌이는 형국이었다.
    왕실을 에워싼 그 같은 일본사회의 호들갑을 한방에 잠재운 뉴스가 터져 나온 건 2006년 9월이었다. 황태자의 동생이 딸 둘에 이어 마침내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매스컴이 온통 난리법석을 피운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41년 만의 왕자라느니, 왕실 역사상 첫 제왕절개를 통한 탄생이었다느니, 최고령 출산 기록이라느니.... 분명한 것은 비록 맏이의 직계는 아니라도 왕위 계승 서열 3위의 귀한 손이 등장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로써 일본 왕실의 후계자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당분간 ‘꺼진 불’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였다. 언젠가는 불조심 표어처럼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입씨름이 다시 불붙을지 모르지만...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도서 문의 : 기파랑 02-763-8996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y2cho8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