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초기 작품 중에 ‘불국사’라는 시가 있다. 눈을 감고 소리 내어 가만히 낭송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불국사 경내로 이끄는 듯한 작품이다.
     
    “흰 달빛 / 자하문 // 달 안개 / 물소리 // 대웅전 / 큰 보살 // 바람소리 / 솔소리 // 범영루(泛影樓) / 뜬구름 // 흐는히 / 젖는데 // 흰 달빛 / 자하문 // 바람소리 / 물소리”

    이 시가 노래하는 불국사를 위시하여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는 한마디로 ‘유적의 보고(寶庫)’이다. 그러기에 1995년 유네스코가 불국사와 석굴암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뒤 2000년에는 그 밖의 이 지역 역사 유적지까지 아울러 리스트에 올렸다.
    일본에도 경주와 꼭 닮은 도시 교토(京都)가 있다. 교토는 중국 당나라의 도읍이었던 장안(長安)을 모델로 건설한 계획도시이다. 그래서 지금도 교토 시가지는 흡사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가 반듯하다. 교토는 794년에 도읍지가 된 이래 메이지유신으로 수도를 도쿄로 옮긴 1868년까지 이곳에 천황이 살았으니 경주나 마찬가지로 천년의 고도이다. 게다가 교토 지역의 문화재들도 1994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므로 이 역시 피장파장인 셈이다.
    신라 불교 문화를 대표하는 불국사와 석굴암에 견주어 교토에는 광륭사(廣隆寺), 청수사(淸水寺), 금각사(金閣寺)가 있다. 광륭사는 규모 면에서는 불국사의 발뒤꿈치에도 쫓아가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절이지만, 앞서 말했듯이 일본 국보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전시되어 있어 우리와는 인연이 깊은 곳이다.

  • 금각사 ⓒ 자료사진
    ▲ 금각사 ⓒ 자료사진

    여하튼 이렇게 닮은꼴 일색인 경주와 교토. 기왕 박목월 시인의 이채로운 시 ‘불국사’로 말문을 열었으니 내친 김에 일본 소설 <금각사>에 얽힌 사연도 들추어보기로 한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일본에는 천황이라 불리는 임금이 있다. 그러나 천황은 상징적인 존재일 뿐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지는 않는다. 옛날에도 사정은 별 다를 바 없었다. 일본 역사상 천황이 권력을 휘두른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교토가 천년의 고도이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 태조 이성계의 조선왕조가 세워지던 무렵, 교토의 무로마치(室町)에 최고 권력기구인 막부가 들어섰다. 사무라이의 총대장 격인 ‘쇼군(將軍)’이 지휘하는 이 무로마치 막부는 일본 역사상 두 번째 군사정권이었다. 그런데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 시절, 지금의 금각사 자리는 사이온지(西園寺)라는 귀족의 별장이었다. 교토의 북쪽에 위치한 별장 주변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웠던지라 쇼군이 군침을 흘렸다. 자, 그러니 어쩔 것인가. 최고 권력자가 탐을 내면 갖다 바칠 수밖에 없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으니 결과야 보나마나 뻔했다.
    불교 신자였던 쇼군은 상납 받은 그곳에 자신의 거처와 집무실을 만들고, 따로 아름다운 3층 누각을 지었다. 당시 일본사회의 3대 특권층을 상징하듯 1층은 귀족의 거실, 2층은 무가(武家) 양식, 3층은 불교의 선원(禪院)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누각 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를 조각하여 올려놓았다. 또 누각 앞에는 인공 연못을 파고 각 지방 영주들이 앞 다투어 선물한 바위로 가상의 극락세계를 꾸몄다.
    그토록 호사하며 살던 쇼군이 죽자 유언에 따라 그곳에 절을 세워 녹원사(鹿苑寺)라 이름 붙였다. 녹원은 제3대 쇼군이 생전에 쓰던 법명(法名)이었다. 하지만 옻칠을 한 나무에 금박을 입힌 3층 누각의 맵시가 워낙 빼어나 사람들은 내남없이 ‘금각이 있는 절’이라는 뜻에서 금각사라고 불렀다. 그 바람에 이곳은 지금도 녹원사 대신 금각사란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600년을 이어 내려온 그 멋진 금각사에 재앙이 닥친 것은 1950년이었다. 불교 전문대학에 다니던 한 학생이 불을 질러 누각이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름다운 금각과 더불어 죽으려 했다”는 그 학생은 근처 산 속에서 수면제를 과다 복용한 채 발견되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금각사는 5년 뒤에야 복원되었고,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라는 국립 도쿄대학 법학부 출신의 신예 소설가가 이 사건을 소재로 쓴 명작이 곧 장편소설 <금각사>였다.
    묘한 사실은 금각사를 불태운 범인이 자살 미수에 그친 대신 그의 어머니가 자식의 죄 값을 치르듯이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소설 <금각사>를 집필했던 작가는 훗날 자위대 사령부에 잠입하여 쿠데타를 선동하다가 실패하자 할복 자결했다는 점이다. 불을 지른 당사자는 살아남고 엉뚱한 두 사람이 금각의 운명을 좇아 죽음의 길을 택한 꼴이었다고나 할까.
    참, 기왕이면 에피소드 한 토막 더! 교토에는 북쪽에 위치한 금각사뿐 아니라 동쪽에 은각사(銀閣寺)가 있다. 이쪽은 금각사를 지은 쇼군의 손자에 의해 뒤늦게 지어졌지만 금각사 대신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금각사처럼 불에 타지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조심할 것은, 외국인에게는 일본어 발음 ‘금’과 ‘은’의 구별이 상당히 어려워서  약속 장소로 정할 때 자칫하면 낭패 당하는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