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퍼머넌트 노바라'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 ⓒ 뉴데일리
    ▲ 영화 '퍼머넌트 노바라'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 ⓒ 뉴데일리

    스스로 이렇게 표정이 풍부했나 싶을 만큼 혼자 웃음 지었다, 혀를 찼다, 미간에 주름을 잡는다. 가슴 속에서 자꾸만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해 손바닥으로 심장 부근을 꾹꾹 누르며 스크린 속 여인에게 말을 건다. “너도 그랬니? 나도 그래…. 우리 모두 마찬가지 였구나.”

    오랜만에 여성의 감성을 제대로 담아낸 영화 한 편을 만났다. 그리고 작품 만큼이나 기분 좋은 느낌의 감독을 마주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시작된지 절반 가량이 흘렀지만, 이번 영화제의 최고의 수확이 아니었나 할 만큼 가슴 속이 충만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경기도 부천의 한 호텔 라운지에서 영화 ‘퍼머넌트 노바라’의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을 만났다. 지난밤 상영관의 가장 앞자리에서 몇 번 시선을 마주쳤던 터라, “기억한다”며 기자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보이는 모습에서 특유의 다정함과 섬세함을 느낀다.

     

    - '여성의 감성' 장모님과 아내, 딸의 모습 관찰하며 신선한 느껴
    - 삶이란 얼마나 긍정적인 것인가 알려주고 싶었죠
    - 김기덕-홍상수-박찬욱 감독 '표현의 힘' 놀라워

  • 영화 '퍼머넌트노바라'
    ▲ 영화 '퍼머넌트노바라'

    바닷가 작은 마을, 마을 유일의 미용실 ‘퍼머넌트 노바라’에는 이런저런 연애 이야기와 말할 수 없는 고민들이 떠돈다. 딸과 함께 사는 이혼녀 나오코, 바람피우는 남편을 사랑하는 마사코, 연애를 쉬지 않는 토모. 늘 남자에게 시달리고 배신당하지만 어떤 연애라고 안하는 것 보단 낫다.

    여성의 다양한 심리와 감성을 깊이 있게 파고들며 기어코 뭉클함을 선사하는 영화 ‘퍼머넌트 노바라’의 감독은 뜻밖에도 남성이다. 형제가 남동생 뿐인 감독에게 있어 여성과 특히, ‘모녀’의 관계는 접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아내와 결혼을 하고, 그녀의 친정집 옆에 살게 됐어요. 장모님과 아내, 또 딸과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가족 안에서 제가 느끼지 못했던 신선한 모습들을 보게 됐죠.”

    여성의 시점으로 된 원작과 각본 작업을 여성이 담당했지만, 감독인 그가 여성과 모녀 관계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퍼머넌트 노바라’는 완성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의 모습 안에서 그들의 삶을 그대로 영화 속에 녹여냈다. “그렇다고 제 가족이 영화처럼 엉망진창인 모습은 아닙니다.”라며 웃으며 덧붙이는 그다.

    영화 속 남성들은 하나같이 ‘무책임’하다. 도박에 미쳐 아내를 버리고 집을 나간 남자,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우다 아내의 차에 치인 남자 등. 영화 속 주인공의 새아버지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남자가 바람을 피는 이유는, 새벽 2시에 또 다른 술집을 향하는 심정과 같은 거야. 분명, 다음에 갈 곳이 더 좋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밖에 없어….” 남성인 요시다 감독이 생각하는 남성상은 도대체 어떤 모습인 걸까.

     

  • 영화 '퍼머넌트 노바라'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 ⓒ 뉴데일리
    ▲ 영화 '퍼머넌트 노바라'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 ⓒ 뉴데일리

    “관객들에게 심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다시 말해 남성은 좀 더 자유스럽다는 의미예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영화 속 남성들이 조금 부럽기도 하지만, 결코 되고 싶지는 않아요”

    그가 남성을 약한 존재로 표현한 것은, 그들을 바라보고 지켜내는 여성들의 강함을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여성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반면, 남성은 비교적 덜 하다고 생각해요.” 요시다 감독의 설명이다.

    원작과의 차이점은 여주인공의 앞에서 사라진 남성이 사랑하는 이로 구체화 됐다는 것이다. 원작에서는 남성의 나이가 더 많았고, 그가 아버지인지 아니면 또 다른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존재로 그려졌다. 이 부분에 있어 원작자 역시 그의 연출력에 큰 만족감을 표시했다.

    “원작자와 함께 공감한 부분은 여자들이 참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여자 주인공이 정신적인 이상이 있어도 모두 아무렇지 않게 감싸주는 것. 그리고, 그들 모두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는 것. 삶이란 얼마나 긍정적인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죠.”

    여성의 강함과 함께 약함 역시 동일하게 다뤘다. 특히, 마사코가 남편을 차로 치고 병원에서 싸우고 난 뒤 옥상에 올라 나오코에게 “나는 단지 사랑할 존재가 없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어”라고 고백하는 장면과 “엄마, 내가 있으니까 외롭지 않지?”라는 어린 나오코의 질문에 아무 대답 없이 등을 보인 채 서있는 노바라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외로운 존재들.

    “누군가를 향한 사랑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대상이 딸이든 남자든 누구든 상관없어요. 물건일 수도 있고요. 또한, 사랑이란 어떤 세대에도 구애를 받지 않고 영원하죠. 외모가 예쁘건, 그렇지 않건도 상관 없습니다. 우리 모두 가슴 속에 아름다운 장미 하나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의 배경은 코지현이다. 산에 둘러 쌓여 있는 폐쇄된 공간. 그러나, 굉장히 친절하고 적극적인 도시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감독을 찾아가 자신을 영화에 출연시켜 달라고 한 일도 많았다. 그가 “보글거리는 아줌마 파마를 하고 오면 출연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자, 다음날 아침 촬영장에 파마를 한 채 나타난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가가 느껴지는 도시였다.

    요시다 감독은 영화의 주인공인 칸노 미호의 오랜 팬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녀가 중학생 때 찍은 영화를 본 그는 그녀의 연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전작의 주인공 여동생이 악마처럼 웃는 장면을 촬영 할 때는 그녀의 모습을 참고하라고 까지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이번 영화에 그녀를 캐스팅하며, “역시 나는 이 배우와 함께 일하고 싶었구나”라는걸 다시금 깨닫게 됐다.

    한편, ‘퍼머넌트 노바라’의 시나리오 작업 중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접했던 그는 칸노 미호가 연기한 주인공 역에 전도연을 떠올리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밀양’에서 여성의 아픔을 절절히 표현한 전도연의 연기는 정말 충격적이었어요.”라며 그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부인 덕에 그 역시 많은 작품을 만났다. 김기덕 감독의 ‘섬’을 시작으로 한국 영화의 매력에 빠진 요시다 감독은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과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 배우들은 일본인들과 같은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힘에 큰 차이가 있죠. 영화 역시 마찬가지예요. 한국영화는 심플하면서도 강한 표현력이 매력이죠. 작품들을 보다보면 ‘나도 열심히 했는데, 왜 저런 표현을 만들지 못할까’라는 자극을 받기도 해요.”

    이번 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진 그는 “오랜만에 가슴이 뜨거워 지는 기분을 느꼈다”라고 말한다. 질문 하나하나가 마음에 부딪혔다. 일본 관객들의 경우 표현에 있어 여러 단계를 거쳐 원하는 답을 이끌어 내는 반면, 한국 팬들은 심플하게 일직선으로 내딛는다. 한국 축구와 그대로 닮아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요시다 감독은 “한국 관객이 저에게 보내 온 공은 패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골대를 향해 슛을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라며 기분 좋게 웃는다.

    열아홉까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한 소년이, 20년의 세월이 흘러 일본이 자랑하는 감독으로 성장했다. 이시 시고 감독의 영화 'Burst city'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그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고 말한다. “감독으로서 저는 여전히 ‘도중’인 것 같아요. 'Burst city'같은 영화는 평생 못 만들 수도 있겠죠. 다만, 정말 제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노력할 겁니다.”

    영화 ‘퍼머넌트 노바라’를 통해 관객에게 무한한 신뢰를 안긴 그의 외침은 조용하지만 강한 힘을 지녔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기억해 둬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