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인들은 평균적으로 글씨를 참 예쁘게 잘 쓴다. 더러 악필이 눈에 뜨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대개는 남녀를 불문코 달필(達筆)이 많다. 왜 그런지 그 까닭을 밝히기 전에 우선 먼 옛날로 시선을 한 번 돌려보기로 하자.
    임진왜란이 끝난 뒤 새로운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에다 통치기구인 막부를 세웠다. 그래서 일본역사에서는 이때부터를 ‘도쿠가와 시대’ 또는 ‘에도 시대’라고 부른다. 그런데 도쿠가와는 임진왜란으로 사이가 나빠진 우리나라를 향해 사절단을 파견해달라고 줄기차게 요청했다.
    도쿠가와의 심부름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섬 쓰시마(對馬)의 도주(島主)가 맡았다. 예나 지금이나 쓰시마로서는 자기네 나라보다 한국이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왜관도 그래서 생겨났다. 처음에는 고개를 가로 저었던 조선왕실에서도 그들이 워낙 애타게 바라는지라 마침내 허락하고 말았다.
    사절단의 명칭이 바로 ‘조선통신사’였다. 1607년에 시작되어 2백여 년 동안 모두 12번에 걸쳐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앞서 언급했지만, 그 중 숙종 임금 시절이던 1719년의 조선통신사 일행 중에는 신유한이라는 당대 최고 문장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뛰어난 학문과 문장 실력으로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신유한이 쓴 <해유록>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들(=일본인들) 중에서 시와 글을 구하려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어떤 이는 전날 내가 지어준 시로 족자를 만들어 와 낙관을 받아 가기도 했다. 혹은 자기들이 지은 시문(詩文)을 들고 와 강평이나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동자가 먹을 갈기에 지쳐서 왜인으로 하여금 대신 갈도록 했다. 쌓인 종이가 마치 구름 같았고......”

    그 만큼 조선통신사는 일본인들의 인기를 끌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조선 선비가 써준 붓글씨 하나는 틀림없이 그네들의 가보가 되어 대대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런 내림 때문인지 일본에서는 지금도 서예가 생활화되어 있다. 당연히 학교에서도 국어시간에 서예를 배운다.
    재미있는 것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과목 이름을 ‘서사(書寫)’라 하고, 고등학교에 가면 격을 높여서 ‘서도(書道)’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또 해마다 정월 초이튿날에는 ‘가키조메(書初)’라고 하여 1년의 소망을 담은 글을 붓으로 적는 풍습이 여태 남아 있다. 우리가 입춘이 되면 길운(吉運)을 빌며 대문에다 ‘입춘대길(立春大吉)’‘건양다경(建陽多慶)’이란 붓글씨를 써 붙이는 것이나 비슷하다.
    그러니 수백 년 전에 우리 선조들에게 동냥하듯이 글씨를 얻곤 하던 일본인들이, 이제는 그것을 갈고 닦아 단순한 예술이 아닌 ‘도(道)’의 경지로 끌어올린 셈이다. 반대로 우리는  서예가 미술 시간에 편입되어 있을 뿐 일상생활에서는 좀처럼 눈요기조차 어렵다.
    좀 엄살을 떨자면, 일본인에게는 서예가 아직 ‘생활’로 남아 있는데 견주어 한국인에게는 고작 ‘취미’의 영역으로 급전직하(急轉直下)한 셈이다. 게다가 세상은 점점 컴퓨터 천하로 돌변하여 가는 곳마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 요란하니 대관절 어디로 가서 오묘한 서예의 정신세계를 맛보아야 하나!

    왜관

    15세기 초에 주로 무역을 위해 이 땅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이 묵을 수 있도록 지은 객사(客舍)였다. 대다수는 쓰시마에서 건너온 일본인들이었으며, 초기에는 한양과 3개 항구 등 네 군데에 왜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발생한 왜관 거주 일본인들의 폭동사건(=삼포의 난)에다, 나중에는 임진왜란까지 겪으면서 완전 폐쇄되었다. 그러자 조선과의 교역에 사활이 걸린 쓰시마 도주 소우 요시토시(宗義智)가 거듭 조선 조정에 재개설을 탄원했다. 조정에서는 마침내 소우의 중재를 통해 사명대사를 일본으로 파견하여 3천여 명의 조선인 포로를 데려 왔고, 그 대가로 조선통신사 파견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부산포에는 다시 왜관이 설치되었고, 이후 200여 년에 걸쳐 한일 교역을 도맡기에 이르렀다. 현재의 부산 용두산공원 일대가 당시의 왜관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