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서기 53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의 성왕(聖王)이 재위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일본 집권층이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해이다. 그러니까 불교 자체는 이미 그 이전부터 일본으로 전래되어 일반인들 사이에 퍼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 자료사진
    ▲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 자료사진

    일본에 불교를 전한 사람은 일본 학계에서 도래인(到來人)이라 부르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요즈음으로 치자면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로 떠나는 이민이나 다름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조국을 떠나는 동기는 오십보백보이다. 현재까지 살아온 터전에서 더 이상 비전을 찾을 수 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나 목표로 하는 곳에서 지향하는 바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21세기의 이민은 대개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에 가서 한 수 배우면서, 그들 사회에 무난히 녹아들고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종의 백기 투항이다. 저 옛날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조상들은 아무래도 달라 보인다. 그들은 프런티어 스피릿(frontier spirit), 즉 개척자 정신에 넘친 새로운 정복자 집단이었다. 뛰어난 문화를 밑천으로 삼아 미개한 나라의 백성들에게 한 수 가르쳐주면서 큰 포부를 펴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이 바다를 건너면서 지니고 간 몸에 배인 문화, 그 상징이 곧 불교요 한자였다.
    일본의 역대 천황 가운데 처음으로 불상을 모시고 불교를 믿은 이가 제31대 요메이(用明) 천황이었다. 서기 585년에 왕위에 오른 그는 그러나 미처 두 해를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누구를 후계 천황으로 밀 것인가를 두고 가장 유력한 두 씨족 사이에 처절한 전투가 펼쳐졌다. 한반도 출신 호족인 소가(蘇我) 씨족은 당연히 숭불파(崇佛派)였다. 이에 비해 토착 호족인 모노노베(物部) 씨족은 토속 신앙이라 할 신도를 믿었으니 당연히 배불파(排佛派)였다.
    두 씨족이 벌인 처절한 항쟁의 한복판에 요메이 천황의 아들인 쇼토쿠(聖德) 태자가 서 있었다. 아버지처럼 불교 신자였던 쇼토쿠 태자는 소가 씨족 편에 서서 전투에 앞장섰다. 자신의 믿음을 다짐하듯 사천왕상을 조각해놓고 출전한 그는, 승리하면 사천왕상을 모신 절을 세우겠노라고 선언했다. 쇼토쿠 태자는 이겼고, 약속대로 나니와(難波=지금의 오사카)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립했다. 이로써 일본 땅에서 불교문화가 찬란한 꽃을 피울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다.
    593년에 섭정(攝政)으로 취임한 쇼토쿠 태자는 자신의 고모인 일본 최초의 여왕 스이코(推古) 천황을 대신하여 사회를 혁명적으로 개혁한다. 일본학자들은 이때의 개혁 덕택으로 오늘날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국이 된 일본이라는 나라의 기틀이 다져졌다고 평가한다. 심지어는 역대 일본 왕실의 수많은 왕족 가운데 가장 특출한 위인으로 꼽히기도 하는 쇼토쿠 태자, 그가 이룩한 업적은 어떤 것이었을까?
    첫째는 고구려의 혜자(惠慈) 큰스님에게 법화경을 배우는 등 불교 연구와 보급에 온힘을 쏟았음을 꼽는다. 사천왕사에 이어 금당 벽화로 유명한 법륭사(法隆寺)를 창건했다. 벽화를 그린 이가 고구려에서 건너간 담징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증은 찾을 길 없다. 법륭사는 607년에 세워졌다가 670년에 불이 나 타버린 뒤 708년에 다시 세워졌다. 그런데 처음 지을 때에도 그랬거니와 나중에 다시 세울 때에도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술자들의 솜씨가 발휘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참고로 일본의 천년 고도(古都) 교토(京都)에 가면 광륭사(廣隆寺)라는 조그만 절이 있다. 이 절에 모셔져 있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일본 국보이다.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졌는데,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동제(金銅製)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흡사 쌍둥이처럼 닮았다. 광륭사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가 쇼토쿠 태자를 위해 만들어 보낸 것이라는 설과,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이 일본에서 제작했다는 설 등이 난분분하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그것이 일본 국보 1호니 아니니 하고 옥신각신하기도 한다. 진상은 앞서 나온 법륭사 금당 벽화가 1949년 의문의 화재로 불타 버린 사건에서 출발한다. 귀중한 문화재를 잃은 일본정부가 이듬해 새로운 문화재 보호법을 만들었고, 1951년 6월에 제1차로 분야별 국보를 지정했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이때 다른 여러 유물과 더불어 조각 부문의 국보로 명단에 올랐을 뿐이다. 애당초 일본 문화재청은 국보에 1호니 2호니 하면서 숫자를 붙이지 않는다. 자칫 그것이 유물의 가치를 순위로 매겼다는 오해를 살까 염려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륭사 측이 자기자랑을 하느라 ‘제1차 연도 지정’을 슬그머니 ‘국보 제1호’라고 바꿔치기함으로서 혼란이 빚어졌다.
    그런 것을 두고 한국에서 유독 ‘일본 국보 1호’를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그것이 한반도에서 건너갔다는 사실, 게다가 우리의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국보 78호’이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등수부터 따지려드는 우리 사회의 어긋난 우열의식이 “일본에서 1등은 한국에서 78등에 지나지 않는다”는 어거지를 부리면서 쾌감을 맛보려든 것이다. 얼마 전 남대문이 불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모든 매스컴이 입에 달고 다닌 수식어가 ‘국보 1호’였다. 설마 1호가 아니었더라면 안타깝지도, 아쉽지도 않다는 뜻은 아니었으리라.
    이야기가 잠깐 옆길로 샜다. 다시 돌아가기로 하자. 쇼토쿠 태자의 두 번째 업적은 일본 최초의 관료제도를 확립했다는 사실이다. 선진국인 중국의 제도를 본떠 관위 12계제(冠位12階制)를 정하여 관료들이 원활한 행정을 통해 나라를 이끌도록 했던 것이다.
    세 번째는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각 분야의 연수생을 해외에 파견한 것을 꼽는다. 607년부터 3회에 걸쳐 수나라에 보낸 견수사(遣隋使)가 바로 그것이었다. 미국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일본학 연구가이자 하버드대학 교수였던 에드윈 라이샤워 박사는 그걸 두고 “세계 최초로 조직적인 관비(官費) 해외 유학생을 파견한 나라가 일본이었다”고 그의 저서 <라이샤워의 일본사>에서 말했다.
    그것은 하나의 전통으로 대물림되어 수나라가 망하자 당나라에 견당사를 보냈다. 그 인원은 매번 수백 명에 달하여 몇 척의 배에 나눠 타고 떠났다고 한다. 또 메이지유신 직후인 19세기 중엽에는 미국과 유럽으로 108명의 구미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쇼토쿠 태자는 이 같은 업적을 통해 일본이라는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다졌다.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 안 될 사실은 그가 불교를 널리 보급하는 한편으로 전통 신앙인 신도를 탄압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탄압은커녕 깊은 이해와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불교와 신도 사이에서 겪게 될지 모를 정신적 혼란과 갈등을 멋들어지게 해소시켜 주었다는 사실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한 마디로 ‘습합(習合) 사상’이라고 불린다. 배워서(習) 합친다(合), 다시 말해 각기 다른 문명이나 문화에서 내 몸에 맞고 내게 필요한 좋은 것만 가려 택한다는 뜻이다. 즉 새롭게 도입된 불교에서 마음에 드는 면을 취하되 이제까지의 신도를 버리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일종의 ‘선택의 자유’를 백성들에게 주었던 셈이다. 최근 들어 일본 젊은이들이 결혼식을 올릴 때, 예법이나 절차가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신도식을 기피하고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서 기독교식을 택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도 일맥상통하는 현상이라 하겠다.

    성왕(聖王)은 누구?
    백제 제26대 왕. 538년 사비로 천도하여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 했다. 551년에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한강 유역 옛 땅을 신라와 손잡고 되찾았으나 553년에 다시 신라에 빼앗겼다. 왕자 여창(餘昌)을 데리고 신라와의 전투에 직접 나섰다가 전사했다.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도서 문의 : 기파랑 02-763-8996
    조양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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