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東京) 신주쿠(新宿), 겨울 어느 날 오후 6시. 고층빌딩이 숲을 이룬 거리에는 오가는 인파가 물결을 이루고 있다. 전철은 퇴근하는 직장인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그 시각 대지진이 발생했다........’
     
    2005년 1월 중순, 일본정부 중앙방재회의가 놀라운 발표를 했다. 위와 같은 가상현실에서 관동대지진(M7.9)과 비슷한 규모의 대지진이 도쿄를 축으로 다시 발생할 때의 자세한 피해 내용이었다. 이른바 ‘수도(首都) 직하(直下) 지진’에 대한 예상이었다.
     
    “주택 밀집지역에서는 낡은 집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모두 18만 채가 완파되었다. 여기서 4천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무너진 집에서 불길이 치솟아 주변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건물 안에 4만 명이 갇히거나 쓰러진 가구에 깔렸다. 61만 채 소실(燒失), 희생자 다시 8천 명. 휴대전화도 불통이다. 수 백 만의 난민이 전기마저 끊겨 암흑천지로 돌변한 길거리에서 밤을 맞았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중앙방재회의가 발표한 보다 자세한 피해 상황이 일본 매스컴에 속보(續報)로 전해졌다.

    “7백만 명이 집을 버리고 피난. 그 중 4백60만 명은 사태 수습 후에도 계속 피난소 생활. 단수 340만 채(4분의 3을 복구하는데 나흘 소요). 정전 2백만 채(95퍼센트를 복구하는데 엿새 소요). 전화 불통 110만 회선(전체 복구에 2주일 소요). 가스 공급중단 120만 채(80퍼센트 복구에 두 달 소요). 사망자 1만 3천 명.(신칸센 탈선으로 인한 사망자 200명 포함). 피해액 112조 엔.”

    발표 내용 중에는 어떤 근거로 뽑은 것인지 ‘엘리베이터 내에 1만1천 명이 갇힐 것’이라는 이색적인 항목도 눈에 띄었다. 오사카(大阪)와 고베(神戸)지역을 덮쳤던 1995년의 한신(阪神) 대지진(M7.2)에 비교하자면 인명 피해는 2배, 피해액은 10배를 각각 넘었다. 그리고 일본기계공업연합회라는 곳의 시산(試算)에 의하면 이들 지진 피해를 완전 복구하는 데는 일본의 한 해 국가예산에 필적하는 80조 엔의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했다.
    워낙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지진의 10퍼센트 이상이 집중되는 지진왕국이어서인지 일본에서는 유사한 대지진 피해 예상 보고서가 잊을 만하면 발표되어 사람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곤 한다. 해묵은 것 중에는 가령 1988년에 일본 국토청과 도카이(東海)은행이 내놓은 자료도 있다. ‘어느 맑은 가을날 토요일 정오, 풍속 10미터, 습도 80%’의 상황 하에서 산출한 당시의 예상 피해는 건물 파괴 81만 채, 소실(燒失) 2백57만 채, 전체 피해액 80조 4천억 엔(당시 일본 GNP의 20%를 초과)이었다.
    지진은 유감(有感) 지진과 무감 지진으로 나뉜다. 유감 지진은 말뜻 그대로 사람이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지진을 가리킨다. 유감 지진은 진도 혹은 M(=Magnitude)의 수치로 강도를 나타내기도 하고, 미(微) 경(輕) 약(弱) 중(中) 강(强) 격(激)을 붙인 한자 표기로 등급을 매기기도 한다.
    일본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일본인이든 외국인이든, 지진이 발생하면 버릇처럼 텔레비전 스위치를 누른다. NHK를 위시하여 거의 하루 24시간 방송을 내보내는 TV 채널에서 속보가 나오기 때문이다. NHK의 경우 일반인들이 유감 지진을 느낀 지 1, 2분이면 화면 왼쪽 상단에 관련 정보가 흘러나온다. 지진의 중심이 어디이며, 지역별 지진의 크기, 그리고 ‘쓰나미’의 위험 여부를 알려주는 것이다.
    지진에 둔감한 한국인들은 인도네시아와 태국을 중심으로 한 남아시아를 초토화시켰던 지진 해일, 즉 쓰나미의 가공할 위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역시 지진 왕국의 국민답게 일본인들은 누구보다 쓰나미를 잘 알고 있다. 지진 해일의 국제적인 용어를 하필 일본어 쓰나미(TSUNAMI)로 정한 이유가 거기에 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지진 이야기만 듣다보면 외국인들로부터 “무서워서 어떻게 일본에서 사느냐?”는 질문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문득 떠오르는 하나의 정경, 그것은 1989년의 해묵은 그림이다. 여기 그대로 옮겨본다.

    도쿄에서 급행열차로 3시간여를 달려 도착하는 중북부의 나가노시(長野市). 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로 1시간쯤 더 산악 쪽으로 들어가면 마쓰시로(松代) 마을에 닿는다. 이 마을에서 3킬로미터쯤 떨어진 마이즈루산(舞鶴山) 기슭에는 일본에서 최고 시설을 갖춘 기상청 지진관측소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세계에서도 손꼽힌다는 이 지진관측소의 유래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11월, 일본 군부는 미국과의 마지막 한판에 대비, 이곳에다 거대한 지하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한국인 징용자를 포함,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산의 암반을 뚫고 지하 100미터 지점에 사통오달로 이어진 땅굴은 휴전선에 있는 북한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완공만 되었다면 차우세스크 정권의 루마니아 지하요새만큼이나 놀랄 만한 규모였다.
    당시 일본 군부는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고산들이 즐비한 나가노 현의 이곳 마이즈루산 속에 전쟁사령부(=大本營)를 옮겨 미국과 이판사판 끝장을 볼 결의였다고 한다. 그들은 히로히토(裕仁) 천황까지 이곳으로 피신시킬 계획 아래 임시 거처를 마련했으며, 다다미 7장이 깔린 두 개의 방으로 이뤄진 이 볼품없는 왕거(王居)가 지금도 방문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그러나 지하요새 건설공사는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일본이 두 손을 드는 바람에 70%의 공정을 끝낸 채 마감되었다. 패전 후 일본 군부의 발악의 상징처럼 흉물스럽게 버려져 있던 이 미완의 지하요새에 눈을 돌린 것은 일본 기상청(당시의 중앙기상대)이었다.
    동서남북으로 연결된 갱도 자체가 모두 암반을 뚫고 만들어진 것인데다 해안으로부터 멀고, 인근에 철도나 도로, 공장이 없어 지진관측에 장해가 되는 잡음도 없으며, 위치상으로도 이곳이 일본열도의 등뼈를 이루는 산맥이 뻗어 내리는 본토 중앙부라는 이점이 있었다. 또한 갱도 속이 일 년 내내 플러스마이너스 0.1도의 온도변화 밖에 없는 섭씨 13도의 상온을 유지한다는 사실로 해서 지진 관측의 최적소로 꼽혔다고 했다.
    일본 내 127개 지진관측소의 대표 격인 이 마쓰시로 지진관측소를 도쿄에 상주하는 여러 외국특파원들과 함께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소련과 중국, 그리고 핀란드, 덴마크 기자들까지 포함된 우리 일행의 관심은 비밀 지하핵실험 관측과, 언젠가는 일본을 급습하리라는 진도 8 이상의 대지진에 쏠렸다.
    -- 대규모 지진에 관한 예측은 가능한 일인가?
    “우리로서는 빠르면 며칠 전, 늦어도 수 시간 전까지는 감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 그런 예측을 얻었을 때 어떤 조치를 취하는가?
    “즉각 기상청에 보고하며 기상청은 지명된 6명의 학자를 긴급 소집, 최종 판정을 내리도록 한다.”
    -- 학자들을 불시에 그렇게 빨리 소집할 수 있는가?
    “해당 학자들은 무선호출기기를 항시 휴대하고 있으며, 소집령이 떨어지면 경찰 패트롤카가 호위를 위해 즉각 출동하게 된다.”
    -- 굳이 학자들에게 최종 판정을 의뢰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꼭 그들을 기상청에 집합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가?
    “사태판단에 보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이며, 기상청에서라야 수많은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대지진 발생의 판단이 내려진 후의 조치는?
    “학자 소집 단계에서 각 언론사는 이미 비상사태를 예상하지만 최종 판정 때까지 보도관제하도록 약속되어 있다. 판정은 30분 이내에 내리도록 되어 있고, NHK를 비롯하여 동원가능한 모든 통신매체를 통해 비상령을 발하게 된다.”
    지진관측소장 모리(森) 박사 및 배석한 주임 연구관 이시카와(石川) 씨와 우리들 외국특파원 사이에 오간 이 같은 대화를 통해서도 지진의 공포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유럽의 한 여성 특파원은 “6명의 학자를 아예 기상청 부근에서 살게 하라”는 특별주문(?)도 했지만, 지진이 비단 일본인뿐 아니라 일본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의 두려움의 대상이란 사실은 분명했다.       --- 졸저 <千의 얼굴 일본 일본 일본>(청한 刊)에서 부분 인용.

    환태평양 지진대(地震帶) 위에 놓여 있어 크고 작은 지진이 그칠 날 없는 일본. 과학자들이 말하는 지진 발생 주기설에 의하면 M8 이상의 격진은 대략 200~300년마다 한 번 꼴로 돌아온단다. 그리고 그 사이에 M7급의 강진이 몇 차례 거듭된다고 한다. 도쿄의 경우에는 M7의 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10년 이내 30%, 30년 이내 70%라고 했다.(일본 정부 지진조사위원회 발표). 그래서 어떤 이들은 “지금 당장 사상 최악의 지진이 일본열도를 덮쳐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고 잔뜩 겁을 주기까지 한다. 피해 예상보고서가 이따금 나오는 연유 역시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관동대지진 당시 주일 프랑스 대사는 폴 크로델이라는 시인이었다. 그는 지진이 일어나자 도쿄에서 요코하마(横浜)에 있는 외국인 거주 지역까지 두루 살핀 다음 그 참상을 기록한 <아침 햇빛 속의 검은 새>라는 책을 집필했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

    “쓰나미, 태풍, 화산 분화, 지진, 대홍수 등 끊임없이 무언가 엄청난 자연재해가 엄습하는 일본은 지구상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위험한 나라이며, 언제나 경계를 게을리 할 수 없는 나라이다.”

    관동(關東)대지진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 일대에서 발생한 M7.9의 대지진. 사망자 9만1천 명, 행방불명 1만3천 명, 부상자 5만2천 명, 가옥 완파 8만 채, 전소 38만 채였다.(어떤 통계에는 사망자가 14만 명으로 나와 있다). 피해액은 당시 화폐로 65억 엔. 당시 일본 국가예산 일 년 넉 달 치였다고 한다. 사회적인 혼란을 틈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따위의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바람에 그 지역에서 살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자경단(自警團)이란 이름의 일본인 패거리들에게 억울하게 학살당했다. 일본정부는 해마다 9월1일을 ‘방재(防災)의 날’로 정했다.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도서 문의 : 기파랑 02-763-8996
    조양욱 :
    y2cho8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