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입북 한상렬, 이런 인물이다.  
     빨치산 정신을 받들겠다며 "한국전쟁이 애국적 통일전쟁" 운운 

  • ▲ 한상렬씨.
    ▲ 한상렬씨.



     한상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이 평양에서 열릴 예정인 6·15공동선언 10주년 기념행사에 당국 허가 없이 불법 방북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12일 “남조선 통일인사 한상렬 목사가 평양에 도착해 비행장에서 안경호 위원장을 비롯한 6·15공동선언 북측위원회 성원들이 그를 동포애의 정으로 맞이했다”고 보도했다.
     
     韓씨는 북한 도착 후 “역사적 6·15선언 채택은 북남대결을 끝내고 평화시대를 연 사변으로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에 이바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평양에 왔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남북 공동행사를 막은 남한 당국을 비판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아래는 韓씨에 대한 인물파일이다.
     
     .............................................................................................................................................
     
     한상렬氏는 노무현 정권 당시 「6.15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통일연대)」를 이끌며 가장 적극적으로 반미·친북운동을 전개해온 인물이다. 통일연대는 2001년 3월15일 출범 이래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파괴를 기도하는 등 극렬한 활동을 벌이다가 2008년 3월 22일 한국진보연대(진보연대)가 만들어지면서 소위 발전적으로 해소됐다. 진보연대는 2008년 광우병 난동(亂動)을 주도한 단체이다.
     
     <선군정치는 평화정치?...공개적으로 연방제 주장>
     
     韓씨는 주한미군철수-국가보안법 철폐-연방제라는 북한의 대남노선을 헌신적으로(?) 이행해왔다. 그는 모든 활동의 목표로 연방제를 제시해왔다. 예컨대 2007년 8월15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제2차 남북정상회담 환영 민족대단합 실현 청년학생결의대회」에서는 『6.15시대를 맞아 분단 암흑시대를 청산하고 우리 민족끼리 민족대단결로 연합제, 낮은단계의 연방제 통일로 한걸음 더 전진해야 할 것이다(출처: 통일뉴스)』고 말했다.
     
     韓씨는 2005년 9월 동국대 교수 강정구가 『6.25 통일전쟁』 주장으로 고발당하자, 같은 달 9일 서울 옥인동 공안 분실 앞에서 가진 姜교수 응원을 위한 기자회견에서 『나는 한국전쟁이 애국적 통일전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실정법 위반으로 잡아가야 하지 않는가. 오늘 이 사건은 바로 보안법의 못된 정체를 폭로하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한다』며 500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김일성의 남침(南侵)전쟁을 『애국적 통일전쟁』이라고 표현했다(출처 : 통일뉴스).
     
     韓씨는 2004년 8월8일 평택 팽성읍 농협 앞 「주한미군 철수 결의대회」에서는 『혹자는 주한미군이 떠나면 안보가 위태롭다고 하지만 북쪽의 선군(先軍)정치는 남쪽을 향한 것이 아니오, 미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한 것이오, 선군정치는 바로 (한반도)평화정치인 것이다』라며 김정일 독재의 선전논리인 선군정치를 『(한반도) 평화정치』라고 옹호하고 나섰다(출처 : 통일뉴스).
     
     韓씨는 2003년 6월1일 대학로에서 「민족자주 결의대회」에서 『북의 전쟁 억지력은 남북 평화를 수호하고 결국 통일을 이루는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노무현 대통령은) 민족공조가 진정한 국익임을 깨닫고 자기 정체성을 추스르길 바란다』며 북한과 친북세력이 소위 전쟁 억지력이라고 불러 온 핵무기, 미사일 개발과 같은 군사노선이 통일의 동력이라고 주장했다(출처 : 통일뉴스).
     
     <「애국통일열사(?)」 빨치산 정신을 받들겠다는데...>
     
     韓씨 같은 이들에게 간첩, 빨치산은 통일열사이다. 2004년 4월27일 경기도 파주 보광사에서는 『마지막 빨치산, 영원한 여성전사. 하나 된 조국 산천에 봄꽃으로 돌아오소서!』라는 내용의 女빨치산 정순덕 추모 묘비 제막식이 열렸다.
     
     당시 통일뉴스는 韓씨가 『마지막 여 빨치산 정순덕 선생의 정신을 받들어 정 선생의 뜻을 살리고 모든 선생들의 뜻을 살리겠다고 다짐하고 6.15 공동선언과 한반도를 위한 통일연대는 애국통일열사의 뜻을 위해 애국하겠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적화(赤化)통일을 기도했던 反국가행위자를 애국통일열사로 부르며 그의 정신을 이어받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2005년 5월28일 회문산 청소년수련원에서는 이른바 「남녘 통일애국열사 추모제」라는 간첩·빨치산 추모제가 열렸다. 300여 명이 참석한 이 행사에서 韓씨는 『일본, 미국 이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해 나가는데 밑뿌리이신 통일애국 열사들을 기억하는 자리』라고 연설, 간첩·빨치산을 통일애국열사로 불렀다.
     
     <대남공작 총책에게 『통일의 열정』 격찬>
     
     韓씨는 2008년 5월4일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을 계속 오가는 가운데 『특별히 기억나는 북측 인사들은 누구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영대, 허혁필, 정덕기, 리춘복, 강영섭 등과 함께 『안경호 선생의 통일에 대한 열정과 박학다식하고 명백 명쾌한 이야기들도 생각난다』고 답했다.
     
     韓씨가 언급한 이들은 북한의 대남공작 책임자들이다. 안경호 역시 대남공작 부서인 통일전선부 부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적화(赤化)통일 음모를 꾸미는 자에게 『통일에 대한 열정』 운운한 부분은 韓씨가 말하는 통일의 모습을 추측케 한다.
     
     韓씨가 역점을 둬 온 분야는 탈북자들의 북한인권 문제제기를 방해하는 일이다. 그가 대표로 있던 통일연대는 2004년 6월11일 소속 회원 30여 명을 데리고 탈북자들이 만든「자유북한방송국」 앞으로 몰려가 방송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韓씨는 당시 『6.15시대를 맞이해서 남북 서로 간에 친남(親南)-친북(親北)해야 하고 고무 찬양해야 할 때』라며 『북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붕괴를 주장하고서는 만날 수가 없으며,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속에서 새 역사가 일어난다』며 탈북자들을 비난했다.
     
     「자유북한방송국」 김성민 대표는 韓씨의 확성기를 빼앗으려다, 통일연대 소속으로 보이는 수 명의 젊은이들로부터 폭행을 당해 바닥에 굴렀고 곧 구급차에 실려 갔다. 통일연대 측은 金대표가 구급차에 실려 간 이후에도 『민족공조가 우리 민족전체의 지향이고, 통일조국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에서 북측을 비방하는 따위의 방송은 설 자리가 없다』,『6.15공동선언의 이름으로 규탄한다』,『자유북한방송의 비방방송으로 민족화합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등의 주장을 하며 10여 분간 시위를 계속했다.
     
     韓씨는 2004년 북한인권법안이 美상원에서 통과되자, 10월1일 美대사관 앞에 통일연대 회원들과 함께 몰려가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북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나라』라며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난국을 뚫고 나가야 한다』고 미국을 비난했다.
     
     韓씨는 2005년 2월14일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가 개최되자,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2층 대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제는 6.15 공동선언을 실현함으로 하루빨리 평화롭게 통일을 이루어나가야 할 때인데 결정적인 방해, 걸림돌이 있다』며 『우리 국민은 소위 인권운운하면서 기만술책을 흘리고 있는 미국에 동조하거나 놀아날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 동포, 우리 민족인 이북을 옹호하고 함께 민족공조로 이 난국을, 전쟁위기를 헤쳐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87년 목사 안수 받아>
     
     韓씨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소속 목사이다. 기장 총회는 2009년 중점사업으로 『북측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의 변함없는 연대와 협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일』을 열거하는 등 북한 조선그리스도연맹과의 연대·협력에 힘을 쏟아온 교단이다. 언론에 보도된 韓씨의 약력을 인용하면 이렇다.
     
     《한상렬은 1950년 겨울 전북 임실에서 출생하여 전주고를 나와 1969년 전북대 농화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 때인 1971년에는 전북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1980년 당시 5·18 방조혐의로 35사단 헌병대를 거쳐 상무대로 끌려가 몇 개월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재판 끝에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이후 한상렬은 5·18 사태로 중단됐던 유학을 준비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출국할 수 없어 결국 유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지역사회에서 활동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87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지금의 전주 고백교회는 한 해 전인 86년 6월 25일에 세웠다. (한국 발전 리뷰 제151호. 2006년7월호)》
     
     韓씨는 91년 6월25일 국가보안법, 집시법 위반 혐의로 2년6개월 선고를 받고 복역을 하던 중 1년9개월 형을 살고 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때 특사로 풀려났다. 이후 자신이 설립한 전주 고백교회와 서울, 평양을 오가며 소위 「통일(?)」운동에 전념해왔다.
     
     <『미선이·효순이 사건을 통해 기도가 이루어진 감동이 있다』>
     
     韓씨는 친북·반미 투쟁을 종교적으로 신념화해왔다. 이는 사생결단의 각오가 뒤따른다. 韓씨는 2003년 7월26일 용산 전쟁기념관 앞 「전쟁반대·평화실현 결의대회」에서 『죽을 사(死), 넉 사(四)의 사생결단의 정신』을 강조하며 『죽어야 산다. 이 땅의 피를 흘린 우리의 선열들을 따라서 지금도 앞장서고 있는 우리 원로들을 따라서 깨끗이 죽자』고 참가자들을 독려(?)했다.
     
     韓씨는 2002년 12월1일 여중생범대위 대표 자격으로 이른바 방미(訪美)투쟁단을 이끌고 뉴욕으로 떠나기 직전 통일뉴스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여중생범대위는 2002년 6월13일 주한미군의 훈련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효순이·미선이 추모를 위해 만들어진 단체로서 같은 해 반미(反美) 촛불집회를 주도했었다.
     
     『지난 3월20일부터 美대사관 앞에서 7박8일간 한미군사합동훈련을 반대해 단식 시위를 하면서 간절히 기원한 내용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때 우리 민족이 친미(親美), 굴미(屈美)를 떨쳐버리고 「회계하라 미국, 회미(悔美)」, 「철수하라 미국, (撤美)」, 「반대한다 미국, 반미(反美)」 운동으로 하나가 되어 제2의 3.1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진정한 민족자주를 수립하고 우리통일의 민족끼리 통일의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런데 미선이·효순이 사건을 통해 기도가 이루어진 감동이 있다.』
     
     인터뷰에 따르면 2002년 3월부터 회미(悔美), 철미(撤美), 반미(反美)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해 왔는데 같은 해 6월13일 『미선이·효순이 사건을 통해 기도가 이루어진 감동이 있다』는 것이다. 미선이·효순이의 죽음이 단식하면서까지 부르짖어 온 회미(悔美), 철미(撤美), 반미(反美)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라니?
     
     韓씨는 2004년 7월26일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서 열린 「이라크 추가파병철회를 위한 금식기도회」에서 예수의 40일간의 단식기도를 소개하면서 『우리민족 역시 예수의 역경과 같은 위험에 처해있다』며 『민족사 속에서 파병을 반대하고 이 땅의 정의를 세우는 일을 우리의 기독인들이 앞장서서 바로 세우자』고 말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다...성령님의 감동·감화 속에서 이런 결단을 했다』>
     
     韓씨는 2006년 3월4일 통일뉴스 인터뷰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하나 되는 일, 우리 사회가 하나 되어 가는 일에 항상 기도하면서 잘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내 과제다...다만 기도할 뿐이고 기도하면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할 뿐이다...오늘 아침 성령님의 감동·감화 속에서 이런 결단을 했다. 그냥 바치자. 죽음을 살자. 오늘 아주 눈물이 더 나왔다. 역사를 생각해서 감사의 눈물이. 그래서 오늘 박용길 장로님 만나면서 기도하라고 해서 내가 했는데 이런 내용을 기도했다...오늘 이런 감사를 담아서 광화문 사거리의 촛불시위 현장 쪽에서 청와대랑 인수봉을 바라보면서 1시간 기도했다. 11시 11분 11초부터 기도를 시작해서 하나가 되는 역사, 우리민족이 하나 되는 것은 세계 평화의 열쇠이이기도 하다. 우리민족이 하나 되는 경험을 갖고 세계가 하나 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기도하는 사람이며, 성령님의 감동·감화 속에서 결단』하여 이른바 통일(?)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극렬한 친북반미 투쟁이 종교적으로 체화돼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발언이다.
     
     2007년 5월31일 통일뉴스에는 韓씨 등의 평양방문 취재기가 실렸다. 당시 취재기자는 5월4일부터 7일까지 3박4일간 평양방문 중 양각도 호텔 2905호실에서 있었던 방북단의 예배모습을 취재하며 『고민영 목사는 『한국 교회가 민족을 살리는 것은 통일뿐이다. 이 예배가 통일의 시초가 될 것이다. 문익환 목사를 비롯, 사죄의 삶을 살고 있는 한상렬 목사가 십자가를 지고 있다. 주의 성령이 어서 오길 바라며 이 죽음에서 승리하길 바란다』고 기도했다』고 적은 뒤 『한상렬 목사는 『비가 오는데도 아이들이 아리랑 공연 하는 것을 보며 이것이 민족의 저력이구나 했다』며 『민족의 저력을 바탕으로 통일을 이루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아이들의 아리랑 공연을 보며 민족의 저력이구나, 했다』>
     
     韓씨가 말한 「아리랑」공연은 북한정권의 체제선전극(宣傳劇)일만 아니라 아동까지 체제선전과 외화벌이 수단으로 삼는 「아동착취극(搾取劇)」 내지 「아동학대극(虐待劇)」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연습 중 쉴 틈을 주지 않아 남녀노소(男女老少)할 것 없이 용변은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한다. 여성들은 간이 칸막이를 만들고, 남성들은 비닐 주머니를 사용한다. 문제는 이 같은 학대와 고역으로 돈을 버는 주체는 김정일의 로동당이라는 데 있다. 탈북자들은『거의 1년 내내 계속되는 훈련의 강도가 너무 심한데다, 한 사람이라도 기계적인 동작을 익히지 못하면 그가 속한 단위(팀) 전체가 휴식 없이 훈련을 받아야하므로 온갖 욕설과 구타가 난무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가운데 날아가거나 밑에서 (사람을) 받는 등의 위험한 동작들이 많아 사고사(事故死)가 빈번하다』고 말한다.   
     韓씨는 아이들을 짐승처럼 혹사시켜 만들어낸 「아리랑」이라는 인간기계극(機械劇)을 가리켜 『비가 오는데도 아이들이 아리랑 공연 하는 것을 보며 이것이 민족의 저력』이라고 말했다.
     
     <『용산참사현장 한몸평화/ 남북관계 한몸평화/ 4대강 한몸평화』>
     
     韓씨의 아내인 이강실氏 역시 목사이다. 그는 2008년 5월4일 통일뉴스 인터뷰에서 『부인 이강실 목사도 전북 6.15공동위 상임대표다. 자녀도 두지 않으면서까지 부부가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질문에 『둘이 결혼을 약속하면서 하느님 앞에, 역사 앞에 헌신하자고 자녀를 안 두었는데, 크게 자랑할 일도 아니고 그만큼 살아오지를 못했다. 치열하게 살자고 했지만 열사와 역사 앞에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韓씨의 전주 고백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아래와 같은 기도제목이 나온다. 「한몸평화」라는 단어가 반복되는데 이는 일종의 종교적 강령으로 보인다. 그대로 인용해 본다.
     
     《11월11일은 한몸평화의 날입니다. 11월 11일 11시 11분 다음과 같이 함께 야! 삼일주님 한몸평화. 지금여기 한몸평화. ( )님 한몸평화. 한몸이니 한몸으로 한몸되게 하옵소서. 11월 11일 하나의 날 한몸평화 만세의 꿈. 기원했으면 좋겠습니다...함께기도...용산참사현장 한몸평화/ 남북관계 한몸평화/ 4대강 한몸평화 / 양평산님 한몸평화/ 배OO님 한몸평화/ 박OO님 한몸평화...》
     
     <『맥아더는 은인(恩人)이 아닌 원수(怨讐)』>
     
     종교적 확신에 기초한 한상렬의 반미투쟁은 극렬했다. 모든 운동의 방향은 주한미군 철수와 국가보안법 철폐, 6.15방식의 연방제통일로 귀결됐다.
     
     그는 특히 2005년 9월 인천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파괴를 주도하면서 『맥아더는 우리 민족에게는 은인이 아니라 원수』, 『횃불을 들어 9월8일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리자』, 『촛불을 높이 들어 자주공조로 미국을 몰아내자』는 등의 주장을 계속했다.
     
     또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겠다고 나선 것은 바로 분단의 원흉이요 전쟁과 학살의 책임자이며, 이 땅 만악(萬惡)의 근원인 주한미군을 몰아내겠다는 의지의 선언(2005년 9월11일 통일연대 성명)』이라거나, 『주둔 첫날을 학살(虐殺)로 시작한 미군은 분단과 전쟁, 범죄로 이어져온 60년 동안 우리 민족에게 되돌릴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강요해왔다...미군 강점(强占) 60년을 더 이상 넘기지 말자!(2005년 9월8일 통일연대 성명)』는 등 극렬하게 선동했다. 한상렬의 주요 발언 중 일부를 인용해보자. 출처는 통일뉴스, 민중의 소리 등이다.
     
     『평화의 파괴범인 미군을 몰아내기 위해선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조국통일을 외치며 함께 싸워나가자(2002년 6월22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6.22반전평화세계동시행동의날)
     
     『미군에 의해 중병이 걸린 우리 민족의 근본적인 치료는 우리가 자주 민족이 되는 것...미군은 회개하라는 회미, 철수하라는 철미, 반대한다는 반미로 민족자주를 이룩하자(2002년 6월29일 의정부 미 2사단 레드 클라우드 기지 앞 「신효순, 심미선 양 살인사건 진상규명 및 책임자처벌 2차 국민대회」)』
     
     『미제(美帝)야말로 바로 5.18의 원흉이다. 우리 민족을 분단시키고 아직까지도 통일을 방해하고 있는 미제(美帝)야말로 우리민족의 적이고 세계 인류 양심의 공동의 적이다(2004년 5월15일 美대사관 앞 기자회견)』
     
     『비극의 진원인 미국을 규탄한다...지금은 민족공조로 외세공조를 넘어야 할 시점이다...촛불을 높이 들어 자주공조로 미국을 몰아내자(2004년 6월25일 광화문 한국통신 앞 「故김선일씨 추모-죽음을 부르는 한미공조 파기, 이라크 파병철회 촉구대회」)』
     
     『맥아더는 우리 민족에게는 은인이 아니라 원수였다...반전평화의 주체인 우리가 국민과 더불어 반미투쟁을 일으켜 싸워야 한다(2004년 9월8일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 「미군강점 59주년 민족자주선포대회」)』
     
     『우리가, 온 민중이 반미투쟁으로 나설 수 있도록 대중 속에 들어가 투쟁해야만 한다...오늘 「송정리대첩」을 이루어 봉기하고 횃불을 들어 9월8일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리고 을사조약 수치를 청산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 위협을 박살내자(2005년 5월15일 1만여 시위대 광주 송정리 미공군 제1전투비행단 미군기지 철조망 파괴 폭동 당일 연설)』
     
     『맥아더는 말하자면 분단의 집달리...맥아더는 실상은 전쟁광이었다...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현재 반미를 해야 하며 반미반전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모두 함께 나아갈 길이다(2005년 9월14일 「KBS RADIO 인터뷰」』
     
     『진정 하나가 되길 원하는 우리 민족을 못살게 굴고 분열을 심화시키고자 소동을 벌이는 미(美)제국주의와의 항전을 위해 이 자리에 모였...(북한은) 미국과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1년이든 2년이든 몇 년이라고 풀뿌리를 먹으면서라도 싸울 각오가 돼 있다는 걸 확인했다...진실은, 결코 미국이 북녘을 이길 수 없다는 것(2006년 11월12일 美대사관 인근 KT앞 반미반전평화대회)』
     
     『미국에 이런 방식, 저런 방식을 촉구해서 같이 힘을 합쳐야 한다. 생명(生命) 앞에 진보, 보수가 없다. 갈라놓기를 하면 안된다...반미감정 운운하는데, 반미가 반미감정을 약칭하는 말이 되면 안된다. 반미국정책의 약칭이 돼야 한다(2007년 8월4일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사태 관련 통일뉴스 인터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주한미군을 비롯한 군사적 위협의 근본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가슴 아픈 금강산 사건이 발생했다. 이명박 정권이 자초한 일이다. 6.15, 10.4선언부터 인정해야 한다(2008년 7월26일 보신각 앞 「美軍 없는 한반도평화협정체결촉구대회」)』
     
     <『국보법과 미제(美帝)가 우리 만남 방해』>
     
     한상렬은 국가보안법 폐지와 관련, 『국보법 폐지 없이는 진정한 인권도, 참된 민주주의도, 실질적인 민족 화해와 통일도 기대할 수 없다(2001년 11월30일 국회 앞 기자회견)』,『국보법 뿌리는 미국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다 잘 알고 있다...미국이야말로 분단의 원흉이자 우리민족의 주적(主敵(2004년 7월17일 광화문 「국가보안법철폐 특별위원회」 발족식)』,『지금 6.15시대는 친남(親南)·친북(親北), 고무·찬양으로 서로 뜨겁게 연애할 때다(2004년 8월14일 대학로 「8.15민족통일대회 맞이 공동선언 이행 촉구대회」)』,『악법중의 악법인 국보법과 분단의 원흉 미제(美帝)가 우리의 만남을 방해하고 있다』, 『한총련은 이적(利敵)단체가 아닌 이족(利族)단체이다(2007년 4월25일 서울대 「이적규정 철회, 국보법 폐지 촉구」 기자회견)』라고 선동해왔다.
     
     <『6.15를 살리는데 목숨을 걸어야』>
     
     한상렬 류(類) 친북세력의 극렬한 친북·반미 투쟁의 귀결은 언제나 6.15선언 실천이다.
     
     그는 『6.15를 살리는데 목숨을 걸어야한다...6.15를 살림(살리는 것)이 애국(愛國)이고 6.15를 죽임이 매국(賣國)이다(2002년 3월2일 종묘 6.15남북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결의대회·(이하 결의대회)』, 『우리 민족이 살길은 첫째도 6.15, 둘째도 6.15요, 셋째도 6.15(2002년 3월27일 美대사관 「전쟁반대, 6.15실현」 기자회견)』, 『6.15선언은 분단과 대결의 시대를 화해와 통일의 시대로 전환한 역사적인 선언으로 우리 민족의 최고 이익을 대변하는 선언(2003년 6월13일 강남 대치동 해암빌딩 앞 대북송금 특검 수사 중단 촉구대회)』, 『6.15를 살림이 애국이요 6.15를 죽임은 망국(2003년 6월15일 백범기념관 「6.15선언 3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6.15민족통일대회가 반통일 세력의 도전을 넘어 자주와 평화, 통일의 의지를 꽃피워가는 대회가 되도록 적극 노력할 것이다(2008년 6월15일 금강산 「6.15 8돌 민족통일대회」)』 는 등 6.15를 자신들 투쟁의 목표로 제시해왔다.
     
     <『촛불혁명이 진행 중?!』>
     
     국내 친북세력은 2006년 무렵부터 한미FTA반대 투쟁에 역량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는 반미노선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한상렬 역시 『FTA가 강대국 미제의 경제 침탈 도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부가 자행하는 것은 굴욕』이라며 『민족농업, 스크린쿼터 사수를 통해 미제의 노골적 침탈행위를 박살내자2006년 2월15일 KT건물 앞 「FTA저지범대위 준비위」 출범 기자회견』,『국민의 함성을 무시하고 한미FTA를 체결한다면 전면 무효화 투쟁, 국회비준 반대투쟁, 노무현대통령 퇴진투쟁, 반미투쟁으로 일어날 것이다2007년 3월30일 경복궁 앞 「한미FTA협상무효선언」 집회』는 등 투쟁의 전면에 섰다.
     
     韓씨 등의 反한미FTA투쟁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광우병 난동(亂動)으로 이어졌다. 韓씨가 공동대표로 있는 한국진보연대는 광우병국민대책회의를 주도하며 100일 넘게 진행된 촛불시위를 이끌었다. 韓씨는 광우병 선동의 선봉(先鋒)에 섰고, 이로 인해 2008년 8월14일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韓씨의 선동을 일일이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몇 가지 발언만 예를 들어 보자.
     
      『「촛불혁명」이 진행되는 가운데 다치고, 연행당한 분들의 심정을 모아서 이 자리에 섰다. 반동과 역천의 역사를 끝내고, 어 청장의 파면과 백골단 해체를 시작으로 국민과 함께 하는 경찰이 되기를 바란다(2008년 8월11일 경찰청 앞 「어청수 청장 파면! 백골단 해체!」 촉구 기자회견)』
     
     『맹목적 한미(韓美)동맹정책과 친미, 친일굴욕외교를 중단, 자주외교에 나설 것, △6.15, 10.4선언의 즉각 실천, 국가보안법 폐지, △한미(韓美)FTA와 공기업 민영화 등 「부자만의 정책」 즉각 중단, 공안탄압과 언론장악시도 등 민주주의 파괴책 중단, △어청수 경찰청장 파면(2008년 8월14일 참여한 서울 프레스센터 「광복 63주년 8.15민족자주선언」)』
     
     이명박 정부 이후 韓씨의 행태는 달라진 게 없다.
     
     그는 『일방적인 자본주의 시각으로 사회주의인 북의 인권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그동안 대북적대 정책의 일환으로 인권을 운운하며 북 체제 위협을 가하는 수단으로 이용해 온 결의안을 유엔이 채택해서는 안 된다(2008년 12월16일 서울 프레스센터)』, 『북한인권법 제정을 운운하는 것은 전쟁법 통과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2009년 2월19일 여의도 기자회견)』 며 북한정권의 인권유린을 옹호하고, 『 정부는 즉각 대북적대정책을 중단해야 한다. 비핵·개방·3000을 빨리 포기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6.15선언과 10.4선언을 계승해서 이행하고 받들겠다는 공표를 해야 한다(2009년 1월8일 통일부 앞 기자회견)』며 6.15, 10.4선언 이행을 촉구해왔다.
     
     또 『미국은 반북단체들에 대한 자금 지원을 즉각 중단하라...이것은 대북적대정책의 일환이며 흡수통일의 방안이기에 우리는 용납할 수 없다(2009년 2월10일 서울 KT빌딩 앞 기자회견)』, 『대북 전단은 단순한 삐라가 아니라 총알이고, 남북관계의 긴장 속에 폭탄과 다름없다...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흡수통일을 얘기하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대결정책은 현인택 통일부 장관을 강행 임명한 것이 또 하나의 증거(2009년 2월12일 통일부 앞 기자회견)』라며 헌법의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