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마도 연하장 그림으로는 가장 자주 등장하지 않았을까? 일본 최고봉 후지산(富士山), 해발 3천776미터. 일본에는 3천 미터 급의 산과 봉우리가 자그마치 21개나 있다. 주로 일본열도의 등뼈에 해당하는 야마나시(山梨), 나가노(長野), 시즈오카(靜岡), 기후(岐阜) 등 4개 현에 걸쳐 있다. 그 중 으뜸이 후지산이다. 그러니 일본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똑같은 발음에 한자를 달리하여 ‘후지산(不二山)’이라는 별칭으로도 적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산이란 뜻이었다. 크기도 대단하다. 산중턱의 5개 호수 가운데 하나인 가와구치호(川口湖)의 둘레가 17.4 킬로미터, 넓이가 5.6 평방킬로미터라고 하면 다들 얼추 짐작하고도 남는다.

  • 후지산 ⓒ 자료사진
    ▲ 후지산 ⓒ 자료사진

    일본인들은 이 산을 가리켜 영산(靈山)이요 마음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외국인 관광객들도 무척 좋아한다. 그러나 등반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앞서서도 잠깐 설명했지만 후지산 등반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외국인들은 그저 눈 덮인 아름다운 후지산 그림엽서를 너도나도 사갈 따름이다.
    워낙 일본인들이 후지산을 선망해서인지 일본 각지에 산재한 똑같은 이름의 산이 31개를 헤아린다. 심지어는 기념일도 있다. 해마다 2월23일이 ‘후지산의 날’인 것이다. 일본어 발음으로 후(2), 지(2), 산(3)에서 따온 택일이라고 했다.
    이처럼 민족의 심벌로 떠받들었기에 등반도 애초에는 신앙과 결부되어 있었다. 17세기경부터 ‘후지고(富士講)’라는 이름의 종교 집단 신도들이 수행을 위해 후지산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흰옷 차림에 방울을 흔들고 경(經)을 외우면서 산을 탔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860년에야 종교 색채를 탈피한 대규모 등산이 이루어졌다. 6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온다는 후지산의 생일을 맞은 이해, 수만 명이 산행에 나섰다. 초대 주일 영국 공사 러드포드 올콕(Rutherford Alcock)도 한몫 끼어 첫 외국인 등정자로 기록되었다.
    불문율처럼 인식되어 온 후지산의 여성 금제(禁制)도 생일을 맞는 해에 한해서 풀었다. 물론 그 이전에 금기를 어긴 용감한 여성이 있었는데, 남장(男裝)을 했대서 눈감아 주었단다. 이 같은 여성 차별은 1867년에 제2대 영국 공사 해리 스미스 파크스(Harry Smith Parkes)의 부인이 산을 오른 5년 뒤, 완전히 사라졌다.
    전문 산악인이 아닌 일반인들의 후지산 등반은 대개 7, 8월에 이뤄진다. 그 밖의 시기에는 위험이 따르는지라 등산 계획서를 미리 관할 경찰서에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염천(炎天)으로 대부분의 눈이 녹는 여름철에는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으로 밤낮이 따로 없이 북적거린다. 산행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 외에도 1970년에 개통된 스카이웨이를 이용하여 자동차로 후지산을 주유(周遊)하는 관광객들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더욱 어마어마하다.
    외국인이 후지산을 등산할라치면 몇 가지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땅바닥에 바싹 엎드린 풀 외에는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든 화산의 등정 길목 군데군데 세워둔 신도(神道)의 상징물 ‘도리이(鳥居)’가 무엇보다 기이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산꼭대기에 아담한 신사(神社)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과, 이 산의 8부 능선 위쪽은 거의 신사의 소유지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종교 아닌 종교’ 신도가 일본인의 삶 속에 얼마나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지를 반증하는 일이기도 했다.
    정상 한 모퉁이에 세워진 우체국도 일본인다운 발상이었다. 이곳에서 등정의 감회를 적은 엽서를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이나 주위 친지들에게 부친다. 엽서는 당사자가 하산하여 집으로 돌아간 후에야 배달된다. 그래도 거기에 찍힌 우체국 소인(消印)이 흡사 공공기관의 등반 확인서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제는 휴대전화도 통할 수 있게 중계소까지 세웠다지만, 역시 오래도록 남을 신표(信標)로는 ‘후지산 정상 우체국’이란 소인만 못하리라.
    아무래도 후지산은 걸어서 올라가는 산이 아니다. 일본인들끼리도 ‘후지산에 두 번 가면 바보’라는 놀림이 있다지만, 결코 자주 올라갈 산이 아니다. 후지산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는 산이다. 그게 훨씬 아름답다. 다시 말해 후지산은 ‘발’로 디딜 산이 아니라 ‘눈’으로 감상할 산인 것이다. 그게 일본적인 미학과도 통한다.

    “..... 마치 한 나뭇가지가 우뚝 솟아 하얀 옥비녀처럼 푸른 하늘에 꽂혀 있는 것 같았고, 중턱으로부터 아래는 구름과 안개에 덮여 있었다. 마치 태화산(太華山)의 구슬연못(玉井)에 하얀 연꽃이 피어난 것 같았다. 도무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만약 진시황으로 하여금 이 광경을 낭야대(琅揶臺)에서 바라보게 했더라면 마땅히 다시 푸른 바다를 건너서 신선을 불렀을 것이다. 여기서 그 산 아래까지의 거리가 4백여 리라 한다. 그런데 그 산이 지금 내 눈 안에 있다. 생각건대 해외의 모든 산들이 후지산에 견줄 것이 없으리라....”

    이 글은 요즈음의 후지산 완상기(玩賞記)가 아니다. 1719년에 조선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일본을 다녀온 신유한이 쓴 기행문 <해유록(海遊錄)>에 나오는 대목이다. 하지만 3백 년 전 이 나라 선비의 눈에 비친 후지산이라고 해서 지금과 모습을 달리 하지는 않았으리라.
    뉴 밀레니엄이라면서 온 세계가 떠들썩하던 2000년, 일본의 중앙 일간지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이 대대적인 후지산 캠페인을 시작했다. 당시의 슬로건이 “일본인의 마음의 고향을 더욱 깨끗하게 가꿈으로써 새로운 정신의 르네상스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우리도 훗날 통일이 되면 백두산 캠페인을 벌일 신문사가 나설지 알 수 없으나, 일본인들로부터 이토록 사랑 받는 산이 다시없을 터인즉, 그야말로 불이산(不二山)인 셈이다.

    조선통신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은 뒤 일본의 새로운 권력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조선 사절의 일본 파견을 강력히 요청했다. 그에 따라 1607년부터 1811년 사이에 모두 12차례의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다. 신유한(申維翰)이 동행했던 기해년(己亥年) 통신사는 그 해 4월11일 한양을 떠나 10월에 도쿠가와 막부가 있던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에 닿았고, 이듬해 정월 귀임했다. <해유록>은 261일 간의 통신사 일기이며, 30여 편에 이르는 전체 조선통신사 일기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더불어 조선조 기행문학의 쌍벽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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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욱 : y2cho8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