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광화문 지하도에서 오가는 행인을 붙들고 “일본을 아느냐?”고 물어본다고 치자. 내 판단으로는 적어도 10명 중 8명은 “안다!”고 대답할 것 같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잘 모른다”고 대답한 나머지 2명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은 일본인일 것이다.

  •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뉴데일리
    ▲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뉴데일리

    민족성만 해도 그렇다.
    일본을 안다고 자처하는 우리 주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일본인상(像)’은 대체적으로 쩨쩨하고, 엉큼하고, 비열한 모습이 많다. 과거 신문의 만평이나 방송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일본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분풀이의 산물일 수 있다. 괴롭힘을 당한 처지에서 괴롭힌 자의 모습이 반듯할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지만 친구들과 둘러앉아 잡담을 나누는 자리의 심심파적으로야 상관없으나, 적어도 상대를 꿰뚫어 먼 장래를 도모해야할 위치에서의 그 같은 감정 이입은 곤란하다.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정색을 하고 상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이쯤해서 누군가가 쏘아붙인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일본인의 민족성 혹은 기질은 한 마디로 어떤 것인가?”

    난감하기 짝이 없다.
    ‘한국인의 민족성’에 관해서도 섣불리 답할 재간이 없는데, 하물며 ‘일본인의 민족성’을 들먹이는 것은 너무 무모하다. 그래서 이 궁리 저 궁리하다가 일본인 스스로가 적어놓은 답안지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읽어보면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럴싸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동시통역 전문가, 일본 TV로 생중계되던 아폴로호의 달 착륙 장면을 동시통역했고, 케네디 대통령의 일본어 통역을 맡기도 했다는 무라마쓰 마스미(村松增美) 씨.
    그가 설파한 견해를 살짝 각색하면 이런 투다.

    “여객선이 침몰하는 바람에 승객들이 높은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로 뛰어내렸다.
    모두들 필사적으로 구명보트에 올라탔다. 너무 많이 타는 바람에 구명보트마저 가라앉을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처했다. 다른 이들을 위해 누군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럴 때 상대가 어느 나라 사람이냐에 따라 대응이 달라진다.
    영국인에게는 ‘당신은 신사지요?’라고 묻기만 하면 된다. ‘암, 여부가 있나요!’라는 대꾸와 함께 바다로 몸을 던진다.
    독일인이라면 ‘이건 선장의 명령이오!’라고 짧게 끊어 명령조로 해야 효과가 난다.
    이탈리아인에게는 으름장을 놓듯이 ‘당신만은 절대로 뛰어내려선 안 돼!’라고 말해야 한다. 남이 시키는 대로 따르거나 어떤 틀 속에 갇히기를 싫어하는 성격 탓에 거꾸로 행동하니까.
    미국인의 경우에는 은근한 목소리로 ‘거액의 생명보험에 들어 있다는군 그래’라고 슬그머니 귀띔하는 것 외에 다른 군말이 필요 없다.
    자, 그렇다면 일본인은 어떻게 구슬려야 하는가?
    남의 눈에 두드러지지 않게 살며시 다가가서 귀엣말로 ‘다들 함께 뛰어내리기로 했나 봐요’라고 소곤거리기만 하면 그뿐이다. ‘아, 소오데스카? 와카리마시타!’(아, 그래요? 알았습니다!) 풍덩!!”

    워낙 흥미로운 비유인지라 덩달아 회가 동하여 조크를 덧붙이고 싶어진다.
    한국인이라면? 우리야 효녀 심청이의 <심청전>이 있으니 효심을 자극하면 만사 오케이가 아닐까.
    상대가 자식을 둔 여성이라면 거꾸로 끝 모를 모정을 불러일으키면 되리라. 아니, 혹 이런 케이스가 나오지는 않을까? 논개의 의협심을 이어받아 ‘대한독립 만만세!’를 외침과 동시에 곁에 선 일본인을......

    일본에 거주하는 화교로 구영한(邱永漢)이라는 이가 있었다.
    경제평론가이자 작가로 평판이 자자했던 양반인데 요즈음은 어째 약간 활동이 뜸한 듯하다.
    아버지는 중국인, 어머니가 일본인이어서 그랬는지 중일(中日)문제 전문가로도 활약했다.
    그가 쓴 <중국인과 일본인>이라는 저서에 보면 “중국인이 라오왕마이꽈에 능한 데 비해 일본인은 자아비판에 이골이 났다”는 구절이 나온다.

    ‘라오왕마이꽈(老王買瓜)’는 “왕 씨 성을 가진 늙은 과일장수가 자신의 참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며 손님을 끌었다”는 뜻으로 자화자찬(自畵自讚)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중국인들 중에는 허풍선이가 많다는 뜻이니까 이 또한 자아비판으로 들리긴 하지만, 일본인 어머니를 둔 화교 작가의 분석이 구명보트 사연을 들려주는 일본인 동시통역 전문가의 자아비판과 일맥상통한다.

    확실히 일본인들은 남이 하면 따라하는 경향이 강하다. 여간해서는 홀로 어떤 결정을 내리기를 망설인다. 독불장군이 드물고 매사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그래서 모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나아가 집단성을 부채질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보병보다 포병이 우수했다고 한다.
    포병은 여럿이 함께 하나의 무기를 다루지만 달랑 총 한 자루 든 보병은 스스로 상황판단을 내려야할 순간이 잦았으니까. 다시 말해 포병은 서로 의논하여 결론을 내리니 부담이 덜하다. 그에 비해 수색이나 정찰을 나간 보병은 숲 속에서 나는 기척이 들짐승 때문인지 적군 때문인지 홀로 즉각 판단을 내리고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매사 옆 사람 눈치만 살피고 살아왔으니 그게 도리어 죽을 맛이었다는 것이다(그래서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진짜로 총 맞아 죽었다...!)

    일본이 고도 경제성장을 이뤄 다들 주머니가 두둑해졌다. ‘골든 위크(GW)’라는 게 생겼다.
    황금연휴라는 뜻의 일본식 조어(造語)다. 슬금슬금 이웃의 눈치를 살피다가 한 집, 두 집 나들이 가방을 쌌다. 온천지로, 명승지로, 해외로..... 언제부터인가 골든 위크는 일본인들이 민족 대이동을 벌이며 떼 지어 놀러 다니는 ‘전 국민 행락 주간’으로 고착되었다.

    법조인 아오야기 후미오(靑柳文雄) 씨, 그는 자신의 저서 <일본인의 범죄의식>에 이렇게 지적한 뒤 가슴을 쳤다. -- “심지어는 범죄마저 집단화되어 폭력단이니 폭주족이니 하는 것이 판을 친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일본 폭력단 야쿠자는 참 이채로운 존재다.
    영화로만 보던 미국의 마피아를 닮은 주먹세계, 그들이 버젓이 간판까지 내걸고 영업(?)을 하는 일본사회가 나는 처음 영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야쿠자의 어원은 포르투갈에서 유래된 노름 카르타(carta)에서 나왔다고 했다. 골패와 화투처럼 1에서 10까지 숫자가 나오는 카드로 노는데, 그 중 카드 석 장을 뽑아 숫자의 합이 9가 되면 이기는 게임이었다. 여기서 8과 9와 3을 뽑으면 최악이었다.
    일본어 발음으로 8은 야, 9는 쿠, 3이 사여서 이를 붙여 읽으면 ‘야쿠자’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 나아가 ‘일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 원래의 뜻이었나 보다.

    야쿠자는 헌법에 보장된 집회 결사의 자유를 이용하여 조직화되었다.
    제일 세력이 큰 야마구치구미(山口組)를 필두로 이나가와카이(稻川會), 스미요시카이(住吉會)가 3대 폭력단이다. 본부 아래 3천여 개가 넘는 하부 조직으로 짜여 졌고, 구성원 숫자가 10만 명을 넘나드는 모양이었다.
    한 가지 신통한 것은 이들이 여간해서 일반서민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모진 놈 곁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는 우리 속담처럼, 간혹 ‘나와바리(繩張り)’로 일컬어지는 영역 다툼으로 저희들끼리 해대는 총질에 휩쓸려 엉뚱하게 피해를 당하는 재수 없는 경우야 가끔 있지만....
    일본경찰로서도 철저히 감시야 하지만 현행범이 아닌 다음에는 어쩌지 못한다고 했으니 딱한 노릇이다. 그들이 무슨 현대판 양산박(梁山泊)이라도 되는 양 떼 지어 으스대는 모습이 꼴불견이로되, 거기에도 일본인의 패거리 문화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이 여간 흥미롭지 않다. 흡사 불황을 모르는 기업 같기도 한 그 세계, 하지만 어차피 검고 구린 돈의 출처야 마피아나 야쿠자나 별반 다를 리 없으리라.

    한국인에게는 영화감독 겸 배우로 더 잘 알려진 기타노 다케시(北野武)라는 일본인이 있다.
    얼마 전에는 재일동포 소설가 양석일 원작으로, 역시 재일동포인 최양일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피와 뼈>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내가 1980년대 말 처음 그를 일본 텔레비전에서 보았을 때 그는 ‘비트 다케시’라는 예명을 쓰는 사회자 겸 개그맨이었다. 어쨌거나 그가 무심코 뱉은 한 마디 개그가 어떤 경구(警句)처럼 널리 회자된 적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듣곤 하는 그 말, “빨간 신호도 다 함께 건너면 된다”는 우스개는 집단성의 금과옥조(金科玉條)나 다름없다.

    내가 또 다른 형태의 일본인의 집단성을 목격한 곳은 후지산이었다.
    후지산에 관한 이야기는 따로 다루어야겠기에 이 자리에서는 집단성과 연관된 부분만 추출하기로 한다. 일본의 최고봉인 후지산은 한여름 두 달을 빼고는 늘 눈에 덮여 있다. 따라서 일반인이 등산을 하기 위해 몰려드는 것도 해마다 7, 8월이 대부분이다. 이 시기가 되면 일본 전국 각지에서 구름처럼 남녀노소 등산객이 밀려와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다. 어떤 통계로는 여름 한 철 평균 30만 명이라니까 하루에 5천 명이 몰리는 셈이다.

    그러나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후지산 등반은 단순한 등반이 아니다.
    그것은 고행길이다. 왜 그런가? 알다시피 후지산은 화산이다. 중턱까지는 울창한 숲과 거대한 호수가 있으며 깨끗하게 잘 닦인 하이웨이가 있다. 등산객들은 대개 해발 2300여 미터의 스카이웨이 종점까지 자동차를 타고 간 뒤 산행을 시작한다.
    그 다음이 문제다. 계곡물 소리와 아름다운 산새 소리를 기대했다가는 크게 실망한다. 제대로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산,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잿빛 화산암과 푸석푸석한 화산재만 지천으로 널린 황량한 산, 수시로 안개와 비구름이 시야를 가려 절해고도(絶海孤島)의 묘한 분위기를 던지는 산이 바로 후지산이다. 그러니 눈으로 뒤덮인 히말라야를 오르는 전문 알피니스트에게야 식은 죽 먹기일지 몰라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고행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따금 산소부족으로 산행길이 황천길로 돌변한 이들의 소식도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몰려오는 일본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누가 시킨 일도 아니다. 정상에 올랐다고 해서 상을 주지도 않는다. 일출을 본답시고 밤을 도와 오르는 사람들이 연출해내는 장사진, 그들이 이마에 매달거나 손에 든 전지의 불빛이 마치 영계를 떠도는 연등(燃燈)으로 다가서던 기묘한 광경,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는 집단의식(儀式)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 스모의 경기시간은 길게 잡아 평균 20초 이내가 아닐까 싶다. ⓒ 뉴데일리
    ▲ 스모의 경기시간은 길게 잡아 평균 20초 이내가 아닐까 싶다. ⓒ 뉴데일리

    자, 이제 다른 각도에서 일본인의 민족성을 살피기로 하자.
    이번에는 한국인의 특성과 비교하여 두드러진 차이를 찾기로 한다. 그것도 두 나라에서 다 전통 스포츠로 꼽는 씨름과 스모(相撲)를 대비시킨다. 스포츠 자체로서의 스모는 딴 항목에서 다룰 터인즉 여기서는 오로지 닮았으되 닮지 않은 씨름과 스모를 통한 기질 분석임을 전제로 한다. 또한 내용의 절반가량은 한국 전문 저널리스트로 유명한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씨에게 저작권이 있음을 미리 밝혀두는 편이 낫겠다.
    첫째, 씨름에서는 두 선수가 씨름판에 들어서면 심판의 지시에 따라 곧장 경기에 들어간다. 스모는 다르다. 도효(土俵)라고 불리는 링 위에 올라간 두 선수는 경기에 앞서 다양한 세리머니부터 치른다. 양팔과 양다리를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내리고, 깨끗한 물로 입안을 헹구고, 하얀 종이로 닦고, 흰 소금을 뿌린다. 팔 다리를 쳐드는 이유는 몰래 감춘 무기가 없음을 상대에게 확인시키기 위해서란다. 깨끗한 물과 종이는 청결을 의미한다. 소금을 뿌리는 것이 사악함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이리라는 점은 우리도 너끈히 짐작할 수 있다.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통계자료 하나를 살짝 엿보기로 하자. 일본스모협회가 밝힌 자료를 보면 스모 선수들이 뿌리는 소금 소비량이 하루 45킬로그램이었다. 또 티슈처럼 생긴 종이는 보름 동안의 대회 기간 중 2천 장을 준비해둔다고 했다.
    이런 행위가 한 번에 그치지 않는다. 몇 번이나 되풀이된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3, 4분은 좋이 걸린다. 그렇게 의식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정작 경기 자체는 순식간에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누군가는 평균 8초 만에 승부가 갈렸다고 주장했는데, 글쎄다. 신빙성 있는 통계를 못 찾았으나 길게 잡아 평균 20초 이내가 아닐까 싶다.

    아무런 사전 세리머니 없이 두 선수가 나오자마자 대뜸 샅바부터 잡고 우열을 가리는 한국의 씨름, 한 마디로 그것은 실질 숭상이다.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오라. 기량을 겨루어 센 자를 가리는 마당에 무슨 군소리가 많으냐는 실속파 개념이다.

    경기 자체보다 세리머니가 중시되는 인상의 일본 스모는 ‘눈으로 먹는다’는 일본 음식을 떠올려준다. 모양새 치중이다. 예쁘고 앙증맞게 차려 젓가락질하기가 망설여지기까지 하는 일본 음식. 그래서 우선 눈으로 보면서 즐기는 그 음식처럼, 스포츠에서도 우선은 겉보기 좋아야 한다는 외화파(外華派) 개념이다.

    둘째, 씨름에서는 두 선수가 3판 2승으로 승부를 가린다. 결승전에서는 5판3승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 참된 실력을 알려면 적어도 두 번 이상은 붙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너그러움이라고나 할까.
    스모는 단판 승부다. 마치 칼잡이 사무라이들이 진짜 일본도로 맞붙는 것처럼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진검승부(眞劍勝負)’라는 일본어는 그래서 무섭다. 지면 죽는다. ‘한 판 더’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냉혹하다고 할까. 아주 드물게, 그것도 심판의 무승부 판정이 내려질 때 한해서, 한 판 더 붙는 경우는 있다.

    셋째, 씨름은 몸무게에 따라 체급을 나눈다. 그래서 금강장사, 한라장사, 백두장사가 있고, 막판에 가서야 천하장사를 가린다.
    스모에서는 그런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좀 부풀려서 비유하자면 어린아이 같이 맷집이 빈약한 선수가 고릴라처럼 우람한 체격의 어른과 싸우는 듯한 장면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씨름은 신사답다. 비록 실력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긴 하되, 각자의 신체 조건을 따져 어느 일방만 불리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스모는 단도직입(單刀直入)이다. 승부의 세계에서 어떻게 신체의 핸디캡을 논하려 드는가. 그래서 그런지 스모 경기를 보다 보면, 체중 100킬로 안팎의 꼬마(!) 선수가 300킬로에 육박하는 거구를 쓰러트릴 때 관중의 열광은 극에 달한다.

    넷째, 씨름의 승자는 포효하고, 스모의 승자는 침묵한다.
    무슨 뜻인가? 한국인은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러니 이긴 자는 승리의 기쁨을 말과 행동으로 표시한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번쩍 쳐들면서 “으아아아.......!”
    일본인은 스스로의 감정을 되도록 억제한다. 그 바람에 승자의 얼굴도 무표정이기 일쑤다. 당연히 입은 꽉 다물고 있다. “............”
    어느 쪽이 더 낫고, 더 바람직하다고 편을 가르기는 쉽지 않다. 한쪽은 감정에 솔직하고, 다른 한쪽은 내 즐거운 기분보다 상대의 우울한 기분에 대한 배려를 앞세우는 것이니까.

    다섯째, 스모의 심판은 절대자다. 어느 누구도 심판의 결정에 거역하지 못한다.
    씨름의 심판은 더러 진 선수나 그쪽 코칭스태프로부터 즉석에서 항의를 받기도 하는 모양이다.
    스모에서는 경기를 진행하는 사람-- 이를 교지(行司)라고 부른다--이 판정도 함께 내린다.
    대개는 그걸로 끝난다. 그러나 교지의 판정에 이의가 있을 때 진짜 심판이 모습을 드러낸다.
    링사이드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는 5명의 검정 도복 차림의 사나이들, 그들이 진짜 심판이다.
    이들이 링 위로 올라가 합의를 본다. 거기서 내려진 결론이 최종 판정이다.

    씨름에서는 아무래도 심판의 권위보다 선수의 위세가 윗자리에 놓인다. 경기의 주체는 뭐니 뭐니 해도 모래밭에서 뒹굴어야 하는 선수들이니까. 심판은 어째 부속 장치 같은 느낌을 숨기지 못한다.
    스모에서 심판의 권위는 저 옛날 한 시절 ‘천황’을 정점으로 한 신성불가침의 절대 권력을 연상시킨다. 죽으라면 죽는시늉을 하던 백성, 고분고분한 스모 선수들.... 하기야 심판진이 각 선수가 소속된 도장의 우두머리, 그러니까 자신들의 스승이니 어찌 감히 대들 수 있으랴!

    위 다섯 가지에다 하나를 덧붙이기도 한다.
    즉 씨름에서는 씨름판을 벗어나면 무효, 다시 씨름판으로 들어와 경기를 속행한다.
    스모에서는 그어진 선을 한 발짝이라도 넘어서면 진다.
    왜? 한반도는 대륙으로 이어져 있으므로 경계가 갖는 의미가 희박하다.
    섬나라인 일본은 제 땅에서 밀려나면 물에 빠져 죽는다.
    이런 지정학적 요소까지 씨름과 스모에서 차이가 나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현상인가!

    골머리가 지끈거리던 한일 민족성 비교라는 난제(難題), 이제 다 함께 후련하게 외치기로 하자. “민족성, 아는 만큼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