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숙 前총리 남편 박성준氏는 누구?

     “맑시스트 크리스천으로서 저를 보완할 수 있는 영적 눈이 필요했지요”

    1.

    한명숙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前국무총리)의 2006년 평택범대위 反美폭동 당시 행적과 남편 박성준氏가 다시 회자됐다. 발단은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의 11일 발언 鄭대표는 11일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선거사무실 개소식에서 韓 前총리에 대해 『무책임하고 공직에 대한 DNA가 없는 분』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2006년 평택범대위 反美폭동을 거론하며) 당시 한명숙 총리는 경찰과 군인, 그리고 시위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이 한 걸음씩 물러나라는 발언을 했다. 불법적인 폭력시위와 정당한 국가권력을 전혀 구별하지 못한 매우 부적절한 발언이다. 국가가 왜 존재하는지 기본적인 개념이 없는 것이 노출된 것이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했는데 당시 韓 前총리의 남편은 시위대 소속 단체 공동대표를 맡고 있었다. 韓 前총리가 최소한 남편을 설득해 시위를 하지 말라고 하든지, 남편 생각이 옳다면 총리를 그만둬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2.

    韓 前총리는 총리 재임 기간인 2006년 5월 평택범대위가 反美폭동을 일으켜 비무장 군인을 집단으로 폭행하자 같은 달 12일 이런 對국민 호소문을 발표했었다. 

    『이제 모든 당사자들이 한걸음씩 물러나서 냉정을 되찾자... 정부는 주민의 아픔과 함께 하면서 진정한 대화와 타협으로 이 난제를 풀어가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 경찰과 군인,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과 주민, 이 모두가 우리의 아들, 딸들이고 우리의 형제들이 아니냐? 우발적 충돌로 인해 폭력의 악순환에 휘말린다면, 만의 하나라도 인명이 손상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그 여파와 후유증이 얼마나 크겠느냐. 그러한 사태는 우리 모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평택범대위 반미폭동은 이른바 친북좌파가 2005년부터 상습적·조직적으로 전개돼 온 것으로서, 2006년 5월 들어서는 비무장 군인을 죽창으로 두들겨 패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韓총리는 「공권력」과 「불법·폭력」을 동렬(同列)에 놓고 『똑같이 한발씩 물러나자』는 주장을 폈었다. 

    그는 『매 맞는 시위대와 매 맞는 경찰이 다 같이 없어야 한다』고 했지만 合法(합법)시위대를 때리는 경찰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따라서 韓총리의 이 기막힌 담화는 불법폭력시위도 경찰이 때려선 안 되고 얻어맞아야 한다는 지시나 마찬가지였다. 

    韓 前총리는 「평화적 집회시위문화 정착을 위한 민관공동위원회」를 구성했지만 같은 달 19일 회의에서 불법·폭력시위에 가담한 시민사회단체에 정부 보조금을 주지 말자는 합의에도 실패했었다. 韓 前총리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은 함세웅 신부는 『시민사회단체 회원이 우발적으로 참여한 경우와 의도를 갖고 참여한 경우를 구분하기 힘들다』며 보조금폐지에 반대했고, 결국 이 주장이 수용된 것이다. 노무현 정권 5년간 극좌파 단체들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고 군경에게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혈세에서 보조금을 지원받는 권력, 치외법권(治外法權)의 권력이 돼버렸다.

     3.

  • ▲ 한명숙 전총리의 남편 박성준씨.
    ▲ 한명숙 전총리의 남편 박성준씨.

    韓 前총리의 남편 朴聖焌(박성준)씨는 68년 조선로동당 지하당인 통혁당 사건으로 수감생활을 보낸 후 81년 출소했다. 이후 反戰平和(반전평화)를 내 건 反美색채의 저술과 활동을 벌여왔다. 출소 후 일본과 미국에서 神學(신학)을 공부한 朴씨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평화주의자』『퀘이커』『맑스주의자』등으로 소개해왔다. 

    기존 언론에 보도된 관련내용을 게재 해본다. 

    『朴선생(朴聖焌씨) 순서가 돌아오자 자신은 지나온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고 있다며 기독교인, 맑시스트, 퀘이커, 불교에 막 눈을 뜬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이제 그 살아온 내력으로 사람들과 소곤소곤한 만남을 갖고 싶어 마이크를 쓰는 모임, 인터뷰 텔레비전 출연은 가급적 사양한다. (週刊기독교 2003년 11월 1509호 인터뷰기사 中)』 

    朴씨는 2001년 季刊 「새길 이야기(3호)」 인터뷰에서도 「출소 후 神學수업의 이유」에 대해 『맑시스트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관련 부분을 인용해보자. 

    『94년 처음으로 여권이 나온 후 3년 간 일본에 가서 공부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에서 「크리스천을 찾아서」라는 글을 연재하면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참다운 크리스천을 만나고 다닌 것이 준비단계였던 것 같습니다. 「맑시스트 크리스천」으로서 저를 보완할 수 있는 영적 눈이 필요했지요. 그리고 나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처음에 일주일 코스로 펜들 힐 영성프로그램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朴씨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戰·이라크戰, 북한제재 등에 反對(반대)하는 反戰平和운동에 정력을 기울여 왔다. 

    그는 미국의 이라크戰은 『군수산업의 이익을 도모하고, 석유이권과 중동패권을 노려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제물로 삼는 전쟁이 아닌 侵掠(침략)(2003년 3월 25일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이며, 아프가니스탄戰은 『최첨단 신무기를 대거 동원하여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부터 내몰고 그 나라의 자연을 마구 짓밟고 완전 초토화하는 것(2002년 3월 21일 著 「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등)』이고, 91년 걸프戰은 『수십만의 젊은 이라크 병사들이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사막에서 살육되고, 미국이 이라크 사회의 인프라 구조를 파고해버렸고 생필품의 수입마저 막는 경제제재를 지금도 풀지 않아서 백만 이상의 이라크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 등 병으로 죽어갔다.(「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등)』고 주장해 왔다. 

    朴씨는 특히 미국의 對北제재가 한반도에 전쟁을 부른다며 金正日 정권의 不法행위를 제재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펴왔다. 2002년 경 쓴 「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는 글을 일부 인용해보자.

     『설마 설마 하다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취말려 남북한 民衆(민중)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만에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경각심을 드높여 예의 주시하자. 부시대통령과 미국정부에게 화해한 평화를 향한 우리 겨레의 역사적 행보를 방해하지 말라고 단호히 경고하자... 만에 하나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덮쳐온다면 우리는 휴전선 일대에 평화의 천막을 치고 평화를 호소하는 갖가지 이벤트를 벌인다. 평화음악회, 평화단식·농성 등 행사를 벌이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발산하자』 

    朴씨는 같은 글에서 『우리의 평화와 우리의 안전을 남의 손, 外勢(외세)·强大國(강대국) 미국에 맡겨놓고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한다』며 『미국의 부당한 간섭과 개입에 맞서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며 미국의 한반도 전쟁책동을 막고 평화를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9·11테러에 『내가 만난 사람들은 통쾌하다는 반응』> 

    「평화」를 내 건 朴聖焌씨는 인류보편의 범죄로 규정되고 있는 「테러리즘」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는 이슬람의 지하드(소위 「聖戰(성전)」)는 『미국이 아랍세계에 가해온 폭력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통제된 폭력』이라며 심지어 9·11테러에 대해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이 당해 싸다, 통쾌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다(以上 「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논문 中)』고 말했다. 같은 글에서 일부를 인용해보자. 

    『한반도는 위험을 안고 있는 불안한 지역입니다. 그 중심에 언제나 미국이 있지요. 우리가 이번의 사태(9·11사태)를 보면서 「오만한 미국의 콧대를 꺾었다!」「미국도 당해봐야 한다」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 무슨 짓을 했기에 테러리스트들이 그토록 처참한 보복을 생각해내게 되었는지, 그들의 사무친 한과 절망과 증오의 뿌리가 무엇인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알게 합시다』

    反戰論 또는 平和論의 외양을 띄고 있는 朴聖焌씨의 「反美」는 테러행위나 金正日·후세인 등 독재자에 대한 비판은 찾기 어렵다. 가령 그는 미국의 이라크戰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하는 것과 달리 후세인이 △1987년 18만의 쿠르드족 독가스학상 등 수십만의 자국민을 처형해왔으며 △2000년 대통령 및 친인척 비방 시 「혀 절단형(刑)」등 전기고문, 눈알 뽑기, 강간 등 비인도적 폭압을 자행해왔고 △후세인의 폭압을 피해 이라크 인구 2300만 명 중 약 400만 명이 해외로 도피했으며 △1980~88년 이란과의 전쟁, 1990년 쿠웨이트 침공 등 대량살상무리(WMD)를 동원한 전쟁과 실정(失政)으로 전 세계 석유 매장량 2위인 이라크를 1천억 달러의 빚더미에 올려놨으며, 이러한 이라크 쇠락의 원인을 미국의 경제제재 탓으로 돌려왔던 사실 등을 외면해왔다. 

    <「퀘이커」朴聖焌, 呼吸(호흡)수련 강조> 

    朴聖焌씨는 기독교의 한 지파인 퀘이커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출소 후인 1994년 일본 도쿄 릿쿄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따고 다시 미국 뉴욕 유니온신학대와 펜실베니아 퀘이커 공통체 「펜들힐」에서 『평화학』을 공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퀘이커에 대한 정의는 쉽지 않다. 朴聖焌씨는 퀘이커에 대해 「새길이야기」와의 인터뷰에서 『각 사람 속에 빛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라며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나님의 그것을 지니고 있다.(There is that of God in eveyone.) 이것이 퀘이커 신앙의 精髓(정수)다』라고 정의했다. 聖靈(성령)이라는 他力(타력)으로 구원받는 정통 기독교과 아닌 내면의 神性(신성)을 깨달아 自力(자력)으로 구원을 얻는 동양적 사상과 유사성을 보이는 부분이다. 

    朴聖焌씨는 퀘이커적 「깨달음」을 위해 呼吸(호흡)수련을 강조한다.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베트남출신 틱 낫한 스님의 「숨쉬기」수련』을 권고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틱 낫한 스님의 「숨쉬기」를 수련하라고 권합니다.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숨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숨쉬기는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숨쉬기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리고 삶과 깨어있는 의식 사이를 다리 놓아 줍니다... 처음에는 정상적인 숨을 쉬다가 차츰 숨을 길고 느리게 하여 숨결이 곱고 잔잔해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숨의 길이는 꽤 길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숨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가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mindfulness)의 상태라 하겠습니다』 

    <朴씨 설립 한백교회의 신앙고백문, 『해방실천 하느님을 믿습니다』> 

    朴聖焌씨는 1987년 民衆신학자 安炳茂(안병무) 박사와의 공동발기로 「한백교회」를 설립했다.
    「한백교회」는 소위 解放神學(해방신학)을 표방한 교회로서 西紀(서기) 연도 앞에 통일염원 몇 년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가령 통일 염원 44년, 1988년 10월 23일로 표기함)
    한백교회의 예배는 主祈禱文(주기도문) 대신 「한백공통체 신앙고백문」을 암송하며 마무리되는 등 일반교회의 예배형식과 큰 차이를 보인다. 

    1988년 만들어진 「한백공동체 신앙고백문」은 『우리는 이 세계를 나날이 새롭게 변혁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解放(해방)의 실천을 행하시는 야훼 하느님을 믿습니다』를 시작으로 14개의 항목을 두고 있다. 주요부분을 발췌해보면 아래와 같다. 

    『3. 우리는 이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억압과 착취와 소외와 파별이 있는 곳마다, 그러한 온갖 비인간화의 현실을 혁파하려는 민중의 열망이, 야훼 하느님의 解放(해방)하시는 능력(二靈)과 한데 어우러져 解放사건의 원천적 힘이 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4. 우리는, 민중적 당파성에 뿌리 내린 解放의 실천이야말로 하느님나라 운동의 본질적 요소라고 믿습니다.
    6. 우리의 회개는 구체적으로 이 땅의 민주화와 자주화, 평화통일 운동에 동참하는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10. 우리는, 야훼 하느님의 자유롭게 解放하시는 능력(靈)이 살아 숨쉬는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고 섬기고 친교 하는 기쁨의 공동체, 새 영의 힘에 취하게 하는 춤과 노래, 말씀, 명상과 기도로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신명나는 예배공동체이기를 원합니다.

    12. 우리는, 분단과 예속, 억압과 소외 등, 온갖 모순과 부조리와 질곡으로 점철된 한반도에서 이 민족과 민중의 일원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합니다.

    14. 우리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중산층, 청년, 학생, 지식인으로서 민중이 주인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건설에 부름 받은 것을 감사합니다.』

  • ▲ <span style=한명숙 전 총리가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옥중 서한집 `사랑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출간 기념 광주.전남 독자와의 대화에서 남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2008.8.24.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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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숙 전 총리가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옥중 서한집 `사랑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출간 기념 광주.전남 독자와의 대화에서 남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2008.8.24. 연합뉴스)

     

    4.

    韓 前총리는 1968년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 사건과 관련, 남편 朴聖焌씨와 함께 실형을 선고받았었다. 당시 朴聖焌씨는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이듬해 대법원에서 刑(형)이 확정됐다. 韓 前총리는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 형을 받았다.  

    통혁당 사건은 68년 8월 24일 中央情報部(중앙정보부)에 의해 검거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었다. 통혁당은 金鍾泰(김종태)를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하여 金瓆洛(김질락)·申榮福(신영복) 주도의 「민족해방애국전선」과 李文奎(이문규)·李在學(이재학) 주도의 「조국해방전선」 아래 다양한 서클·조직·학사주점 등을 조직, 공산혁명을 획책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혁당이 합법·非합법, 폭력·非폭력의 배합투쟁을 통해 1970년까지 소위 「결정적 시기」를 조성, 민중봉기함으로써 共産政權(공산정권) 수립을 획책해왔다고 발표했다. 

    A4 용지 1000여 쪽에 달하는 통혁당 관련 판결문은 이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통일혁명당이 북괴의 무력남침에 대비한 사전 공작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유격전을 기도하여 무력행사를 준비하였으며, 과거의 남로당 조직을 부활시킨 조직체일 뿐만 아니라 지식층의 청년을 포섭하였으며, 잡지 반포, 당소조의 조직, 당원에의 적색사상 교양, 데모 조정, 해안선 답사, 유격전술요원 입북, 간부진의 빈번한 入北(입북)과 국가기밀 누설, 거액의 공작금 지원 등이 있은 사실…》 

    통혁당의 기본성격은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의 지시를 받는 地下黨(지하당)이었다.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越北(월북)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고, 黨員(당원) 이진영·오병헌은 68년 4월 22일 越北(월북)해 교육을 받던 중 68년 6월 말 통혁당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에 머물렀다. 

    통혁당 서울시당 위원장 金鍾泰(김종태)는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김일성을 면담하고 美貨(미화) 7만 달러, 韓貨(한화) 3천만 원, 日貨(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간첩지령형식인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다. 그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집단 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揚陸(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띄고 있었다. 

    북한은 통혁당에 대한 검거망이 좁혀오자 金鍾泰(김종태) 등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공비를 남파하기도 했다. 북한 753부대 소속 武裝工作船(무장공작선)은 68년 8월 20일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우리 군경과의 교전 끝에 14명 중 12명이 사살되고 李承卓(이승탁), 金一龍(김일룡)등 2명은 체포됐다. 이들 무장공비들은 김종태를 구출하여 월북시킨 뒤, 북한정권수립 20주년 기념일인 9·9절에 남한대표로 김일성 앞에서 연설하게 할 예정이었다.

     주범 중 한 명인 金瓆洛(김질락)은 옥중유고 「주암산」에서 『통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비밀 地下黨(지하당) 조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리 없고 통혁당의 조직상황과 활동상황이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 됐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고 쓴 바 있다. 

    그는 같은 책에서 월북 당시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에게 『우리 통혁당은 남조선 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地下黨(지하당)임을 자처하고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힘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각계각층에 대한 군중공작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고 적고 있다. 

    康仁德(강인덕) 前 통일부장관은 자신의 저서 「공산주의와 통일전선」에서 조선로동당과 통혁당은 지령을 내리고 받는 中央黨(중앙당)과 地下黨(지하당) 관계라며 이렇게 적고 있다. 

    《통일혁명당은 출발부터 북한 中央黨(중앙당)의 하부조직으로 발생한 것이다. 통일혁명당 창건의 필요성, 그리고 조직적 사상적 준비는 모두 북한 조선로동당이 계획한 것이다... 당원은 제각기 독립된 인자로서 핵심을 유지하며 평양에서 발신하는 지령에 따라 단독으로 활동하면서 그 경과를 중앙당 대남사업 담당부서에 보고하는 형태이다. 따라서 남한 내 地下黨(지하당)은 「남조선혁명의 참모부」가 아니며 한낱 「말단초소」에 불과하다》 

    <黨 소조책과 黨 소조> 

    당시 中央情報部(중앙정보부) 수사발표에 따르면, 韓 前총리의 남편 朴聖焌씨(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4년, 25세)는 1967년 6월 申榮福(신영복)에게 포섭된 「黨(당) 小組責(소조책)」으로서 妻(처) 한명숙 및 朴○○, 金○○ 등을 小組(소조)로 포섭했다. 그는 『서울 상대를 위시한 각 대학 출신 및 재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을 모체로 결성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를 주도하여 資本主義(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비판하고 소위 사회주의적 복지경제를 주장하면서 북괴의 경제제도를 찬양, 이를 연구 보급했다』는 것이다.  

    공안전문가 A씨는 黨小組責(당소조책)과 小組(소조)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의 지하당에서 입당한 당원 중 최소 조직을 細胞(세포)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3명의 당원이 1개 세포를 이루며, 3개 세포가 1개 小組를 이룬다. 小組와 細胞는 지하당 활동의 최소 조직을 가리킨다. 지하당의 小組와 細胞,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간부인 黨小組責이었다는 것은 당연히 地下黨(지하당)에 입당한 黨員(당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당시 중앙정보부는 朴聖焌씨와 같은 黨小組責(당소조책)을 「통혁당 幹部(간부)」로 판단했고, 법원 역시 이를 받아들여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는 것이다. 
    당시 검찰은 朴聖焌씨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 반공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韓 前총리의 통혁당 사건 관련 판결문은 이러했다. 

    《북괴는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조직된 反국가단체로서, 북괴가 간행하는 표현물이나 기타 사회주의 서적을 반포하는 행위는 북괴가 시도하는 행위에 동조하는 행위로서 북괴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피고인 한명숙 등은 박성준으로부터 북괴 간행 「청춘의 노래」를 빌려 받고, 박성준의 부탁으로 엥겔스가 쓴 「사회사상총설」1권을 받아 그 책에 있는 「공산당 선언」을 노트에 필기하고, 박성준의 지시로 이○○, 최○○와 같이 읽고 反국가단테의 활동에 동조하는 한편 찬양-고무하는 표현물을 취득 복사, 보관, 반포하여 북괴를 이롭게 했다》

     <중정(中情) 『地下黨(지하당) 입당은 中央黨(중앙당)에 등록』> 

    조선로동당과 통혁당은 中央黨(중앙당)과 地下黨(지하당) 관계이며, 통혁당 주범인 김종태 등은 물론 朴聖焌씨 역시 地下黨인 통혁당에 入한 것으로 판단됐다. 그렇다면 이 地下黨 入黨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중앙정보부가 1973년 펴 낸 「북한대남공작사」에 따르면, 『地下黨(지하당) 입당은 혁명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맹세하는 형식으로 이뤄지며, 비준은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으로부터 당원비준의 권한을 위임받은 공작원만이 할 수 있고, 최종결정은 역시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에 보고했을 때 이뤄진다. 지하당은 보안상 당증을 발급하지 않지만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에 등록돼 있는 일정한 番號(번호)를 수여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地下黨(지하당)인 통혁당에 입당했던 이들은 中央黨(중앙당)인 조선로동당 담당부서에 기록이 남겨 있을 것이란 뜻이 된다. 

    黃長燁(황장엽) 前 조선로동당 비서와 함께 97년 탈북한 金德弘(김덕홍) 前 여광무역 대표는 『한번 입당을 하면 영원한 고리가 된다』며 入黨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입당기록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당원등록과에 등록이 됩니다. 특히 남한 내 地下黨(지하당) 입당은 대남공작활동에 해당하기 때문에 조선로동당 비밀문서과·해당 공안부서 담당과 등에도 기록돼 永久(영구)관리되죠. 아마도 김정일 정권이 무너지면 이 같은 기록들은 모두 공개될 것입니다』 

    <평양에 김종태 거리...北, 통혁당 연루자들 영웅화> 

    통혁당 사건의 주범인 김종태·김질락·이문규는 사형을 당했고,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북한은 통혁당 사건 이후 연루자들에 대한 영웅화에 나섰다. 69년 1월 25일 김종태와 이문규에게 사형이 확정되자 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김종태와 이문규를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김종태는 69년 7월 10일 사형집행을 받은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69년 7월 12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김종태 추도 결의문」을 채택했고, 같은 해 7월 13일부터 19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김종태 추도기간」이 설정됐다. 평양대극장을 비롯해 각 시·도·직할시·구분대·구분대당위원회·공업기업소·협동농장·교육문화·보건기관에 이르기까지 대대적 추도식이 거행됐다.

    북한 내각은 김종태에게 영웅 칭호 외 북한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제1급」을 추서하고 평양 전기기관차 공장을 「김종태 전기기관차 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 사범대학」으로 개명했다. 평양 시내에는 「김종태 거리」가 생겨났다. 

    69년 11월 6일 이문규가 사형을 당하자 역시 영웅 칭호가 수여됐다. 살아남은 최고위급 통혁당 간부인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1988년 특사로 출감했다. 그는 89년 이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었다.

    韓 前총리는 통혁당 사건과 관련, 『남편이 연루돼 있었기 때문에 아내로서 옥바라지 한 것 뿐, 알지도 못하고, 평가하고 싶지도 않고, 알고싶어 하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고 밝혀왔다. 

    朴聖焌씨 역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선노동당이나 통혁당 같은 조직에 가입한 적도 없고 포섭된 적도 없다(2006년 4월 3일 동아)』,『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이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 27일 오마이뉴스)』,『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 27일 조선)』,『신영복 선생으로부터 책을 빌려 받은 것이 전부인데 15년형을 받았다(2006년 3월 25일 문화)』고 밝혔었다. 

    <1979년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에 다시 연루> 

    韓 前총리는 1979년 이른바 「크리스챤 아카데미」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처벌받았다. 그는 당시 이우재, 장상환, 황한식, 신인령, 김세균과 만나 모스크바방송·북경방송·평양방송·통혁당 목소리 방송 등을 들었던 것으로 판결문은 전한다. 

    《써클회원 6명이 모인 자리에서 회의를 속개하기에 앞서 그 집에 있던 라디오를 조작하여 「어버이 수령 김일성…」하는 북괴의 어린이가 김일성을 찬양하는 북괴방송을 함께 들은 후 나머지 피고인들에게 「스웨덴의 탁아소 등 어린이 복지시설이 잘 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잘 되어 있는 곳은 以北(이북)이라고 하더라」는 요지의 말을 하여 反국가단 체인 북괴 또는 국외 공산계열의 활동에 동조 또는 찬양하여 이를 이롭게 했다》 

    판결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한명숙은 다른 피고인들에게 「여성문제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니 읽어 보라」면서 「조선여성독본」 복사판을 제공하였다》 

    韓 前총리는 「크리스챤 아카데미」과 관련해 2001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이 조치는 통혁당 사건과는 무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