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이 섬나라인 것만은 틀림없다. 본토를 이루는 4개의 섬과, 이에 딸린 7000개를 헤아리는 부속 도서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하지만 일본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국토면적으로 따지면 약 37만 8000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남북을 합친 한반도 전체 면적(약 22만 평방킬로미터)보다 1.7배 가량 넓은 것이다.

  • ▲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뉴데일리
    ▲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뉴데일리

    인구만 해도 그렇다. 2008년 현재 대략 1억2600만 명인 일본의 인구는 세계에서 8번째로 많다. 일본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는 순서대로 중국, 인도, 미국, 인도네시아, 브라질, 러시아, 파키스탄 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일본을 조그만 나라로 인식하게 된 것일까? 무엇보다 ‘섬’이라는 단어가 작다는 선입견을 안겨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섬이 커보았자 별 수 있겠느냐는 지레짐작이 앞선 것이다.
    두 번째로는 일본의 옛 국명 ‘왜’에서 빚어진 오해라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난쟁이 왜(矮)’가 따로 있긴 하지만, ‘나라 왜(倭)’에도 ‘키가 작은 사람’이라는 뜻풀이가 있다. 그 바람에 무조건 ‘왜국’인 일본은 조그만 나라이고, ‘왜인’인 일본인은 덩치가 작다는 식으로 인상지어졌던 게 아닐까.
    왜라는 이름은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曹操)가 3세기 경에 세운 위나라 역사서 <위지(魏志)>의 ‘동이(東夷)’ 항목에 적혀 있다. 일본 고대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꼽히며, 통칭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으로 불린다. 그 첫머리는 “왜인은 대방군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의 산과 섬으로 나라를 이루고 산다. 예로부터 1백여 개의 나라가 있으며 한(漢)나라 시절에는 배알하러 오는 자가 있었다.(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爲國邑舊百餘國漢時有朝見者)”로 시작된다.
    다른 하나는 문명비평가 이어령 교수의 명저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은연중에 일본이라는 나라까지 축소시킨 감이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저자의 주장은 일본인의 편이성 추구에 있다고 보아야 옳다. 소형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만들거나, 한반도에서 전해진 방구부채(=團扇)를 차곡차곡 접어 쥘부채로 둔갑시키고, 영국 신사들이 지팡이처럼 사용하던 우산을 3단으로 접어 가방 속에 쏙 집어넣도록 한 축소 지향의 아이디어들은 다 그것이 사용하는데 보다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걸 두고 “일본이 작으니까 물건도 작게 줄이기를 즐긴다”는 엉뚱한 말꼬리 물기가 이어졌다는 뜻이다.
    일본이 작다는 잘못된 인식은 옛날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인 강항(姜沆)이 집필한 <간양록(看羊錄)>에도 그런 사실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

    “.... 예전에 어느 중이 홍법대사가 기록한 것을 신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지도 뒤에 쓴 기록을 보았더니 일본이란 나라는 도(道)가 여덟이요, 주(州)가 66주인데 일기(壹岐)와 대마(對馬)는 그 속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도(島)가 둘이요, 향(鄕)이 9만2000이요, 촌(村)이 10만9856이요, 논이 89만9160정(町)이요, 밭이 11만2148정이라고 합니다. 또한 절이 2958개요, 신궁(神宮)이 2만7613개입니다.
    인구는 남자가 199만4828명이고, 여자가 290만4820명이라고 합니다. 비록 국토의 연혁과 인구의 증감이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이로써 대략 추측하여 볼 수 있겠습니다.
    또 그 기록에는 일본의 동쪽 끝은 육오(陸奧)요, 서쪽 끝은 비전(肥前)인데, 육오에서 비전까지의 거리가 4150리라고 합니다. 또 남쪽 끝은 기이(紀伊)이고, 북쪽 끝은 약협(若狹)인데, 기이에서 약협까지는 880리입니다. 육오의 평화천(平和泉)에서 이해(夷海)까지는 300리요, 판동로(坂東路)가 1800리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일본이 우리나라만큼 크지 못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왜중 의안(意安)이란 자를 만나보았더니, 그는 왜의 서울 사람으로 그 조부나 아비 때부터 다 중국에 유학하였으며, 의안에 이르러서는 자못 산학(算學)과 천문․지리를 해득하게 되었고, 그는 기계를 만들어 해 그림자를 측정하여 천지의 둥글고 모진 것과 산천의 멀고 가까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임진란 때 왜인이 조선의 토지대장을 모두 가져왔는데 일본 토지의 절반도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순박하여 믿을만한 사람이며, 만일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관동 및 오주의 거리로 따져보면 우리나라보다 훨씬 크리라고 여겨집니다....(후략)”

    물론 일본인 스스로는 자신들이 작고 좁은 나라에서 산다며 엄살을 떤다. 그래서 어떤 책에서는 “일본의 국토면적은 말레이시아보다 약간 더 클 뿐 중국의 25분의 1, 미국의 25분의 1, 브라질의 23분의 1, 인도네시아의 5분의 1에 해당한다”고 일부러 큰 나라들과 견주면서 축소시키려 든다. 일본인들이 국사(國師), 즉 나라의 스승으로 추앙하던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남긴 글 중에도 이따금 ‘조그만 나라’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러일전쟁 전후의 역사적 인물을 그린 그의 대하소설 <언덕 위의 구름>도 대뜸 이런 첫 문장과 함께 이야기가 전개된다.

    “정말이지 조그만 한 나라가 개화기를 맞으려 하고 있다.”

    너무나 먼 미래의 이야기라 다소 황당하게 들리겠으되, 일본 국토가 야금야금 바닷물에 잠겨 언젠가는 지구상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예측도 어디선가 본 듯하다. 하지만 그 같은 공상과학 유의 이야기는 얼른 피부에 와 닿지 않으나 인구 문제만큼은 앞으로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다른 선진국들 또한 사정이 비슷하나 일본의 경우 1970년대 중반에 한 가정의 자녀가 평균 2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인구의 자연감소가 이뤄진 2005년 통계로는 여성 한 명이 갖는 자녀 숫자가 1.26명으로 급속히 떨어졌다. 그러니 일본이 ‘인구 세계 8위’ 자리에서 밀려날 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걱정은 우리나라에 있다. 일본은 2008년도에 다소 수치가 늘어나 1.37명을 기록했는데, 한국은 1.08명(2005년도)로 세계 꼴찌였으니까 말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일본의 외형적인 부분, 이른바 ‘하드웨어’ 측면에서의 대소(大小)를 따져본 셈이다. 그렇다면 내적인 부분, 일러서 ‘소프트웨어’의 측면에서 들여다본 일본은 클까 작을까? 다른 항목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 같아 간단히 언급하자면 이렇다.
    국부(國富), 즉 경제면에서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칭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일본이 국민총생산(GNP)에서 서방국가 가운데 2위에 오른 시기는 1960년대 말이었다. 태평양전쟁 패전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때마침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란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이때 일본은 미국 중심의 유엔군에 막대한 물자를 공급하면서 패전으로 거덜 난 자신의 경제 기반을 착실히 다졌다. 그렇게 요행수가 바탕이 되고, 또 곁눈질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한 국민들 덕분으로 짧은 시일 내에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외교와 국제정치면에서는 1975년에 발족한 선진6개국 수뇌회담(=서미트)에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당시), 이탈리아와 더불어 창설 멤버로 명함을 내밀었다.(2회 서미트부터 캐나다가 참가하여 G7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러시아도 끼어들었다). 또 21세기에 들어서자마자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기 위해 맹렬한 외교공세를 펴왔고, 머지않아 그 꿈이 실현될 것으로 전망되니 ‘정치대국’이나 다름없다.
    이래저래 우리는 한시 바삐 ‘일본은 조그만 섬나라’라는 그릇된 상식에서 헤어나, 우리의 몸가짐 마음가짐을 단단히 추스르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와 있다.

    간양록(看羊錄)
    정유재란 때 고향인 전남 영광 앞 바다에서 가족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간 강항(姜沆)이 쓴 일본 견문록. 3년 동안 일본에 억류되었던 그는 몸소 겪은 바를 적어 임금에게 올린 ‘적중봉소(賊中封疏)’를 비롯하여, 포로 생활의 아픔을 절절히 엮었다. 강항은 호가 수은(睡隱)이며,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일본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등과 학문적 교류를 갖기도 했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1923년생. 본명 후쿠다 사다이치(福田定一). 오사카 외국어대학 몽골어과 졸업. 산케이신문 기자를 거쳐 동인지 <근대설화> 창간에 참여하면서 소설가로 데뷔. 1959년 <올빼미의 성(城)>으로 대표적인 대중소설 문학상인 나오키상(直木賞) 수상. 이후 역사소설을 위주로 한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기쿠치 칸상(菊池寬賞), 요시카와 에이지상(吉川英治賞) 등 여러 문학상을 휩쓸었다.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을 존경하여 시바 료타로라는 필명을 지어 평생 사용했다. 그 만큼 탁월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비단 문학계뿐 아니라 역사학계에서도 맹활약했다. 1996년 타계.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도서 문의 : 기파랑 02-763-8996

    조양욱 : y2cho8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