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전업주부'의 다섯가지 즐거움

심양섭 | 최종편집 2010.04.27 13:58:42

남성 전업주부 일기
요리의 五感五樂

나는 ‘남성 전업주부’다.
아내가 전일제(full time) 직업을 가진 반면, 나는 시간제(part time)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내가 아들 공부도 봐주고 가사도 더 많이 돌본다.
그러다 보니 요리도 자연히 내 소관이다.

오늘은 내가 저녁식사를 준비하면서 미역국을 끓였다.
평소와 달리 기름이 둥실둥실 떴다. 이상하다 싶어 맛을 보니 담백하지가 않고 느끼하다.
참기름으로 미역을 볶았기 때문일까. 미역국을 끓일 때마다 참기름으로 미역을 볶았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소고기라고 함께 볶은 것이 돼지고기였단 말인가? 냉동고에서 꽁꽁 얼은 고기 덩어리들 중에 어느 것이 소고기인지 분간하기 어려워 대충 골라 넣었더니 그게 돼지고기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아들 녀석은 맛있다며, 미역국에 말아 밥 한 공기를 금세 뚝딱 해치운다.
무척 배가 고팠던가 보다. 나중에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한 마디로 어이없어 했다. 그렇게 눈썰미가 없느냐는 투였다.

요리하다 보면 우스꽝스러운 일이 자주 생긴다. 국이나 찌개를 끓일 때는 항상 파가 들어가야 하는 줄 알고 미역국을 끓일 때도 파를 넣었는가 하면,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내 바로 삶다가 터뜨리기도 하고, 고등어를 조리다가 태우기도 했다. 생태를 동태처럼 푹 끓이는 바람에 추어탕처럼 살이 다 풀어져버린 적도 있다.


▲ '남성 전업주부' 심양섭 가족, 아내와 아들. ⓒ 뉴데일리



실수투성이 요리사이면서도 나는 요리를 즐긴다.
요리는 인간의 오감(五感)과 더불어 오락(五樂)을 준다.

미각, 시각, 후각, 청각, 촉각의 즐거움이 요리 안에 다 있다.
미각의 즐거움이 가장 크다.
요리사는 먹는 것보다 요리하는 것을 즐기고, 남이 한 요리는 맛있어도 자기가 한 요리는 맛없다고도 하지만, 나는 내가 한 요리를 맛있게 먹는다.

소고기무국의 시원한 맛, 갈치조림의 칼칼하면서도 깔끔한 맛, 돼지고기 김치찌개의 걸쭉하면서도 기름진 맛, 오이무침의 상큼하면서도 아삭아삭 씹히는 맛…….

요리의 간을 맞출 때는 맛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쾌감을 느낀다.
간장이나 소금의 양을 조금씩 늘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맛이 기가 막히게 살아난다. 양의 축적이 질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아내는 짠 음식이 건강에 가장 좋지 않다며 늘 음식을 싱겁게 하지만, 나는 맛을 내겠다고 욕심을 부리다가 자주 짠 음식을 만들곤 한다. 매사 의욕을 가지고 임하는 것은 좋지만 과욕은 금물이다.

나는 요리에서 인생을 배운다. 요리는 삶의 축소판이다.

국물 맛을 내는 것도 요리의 묘미이다.
아내는 음식에 화학조미료를 절대 쓰지 않는다. 모든 국물 맛은 멸치와 다시다로 내고 거기에 가끔 ‘천연조미료’를 보태는데 나도 따라 한다. 아내에 비하면 나는 천연조미료를 많이 쓰는 편이다.

‘천연’ 조미료는 정말 ‘천연’일까.
아무리 천연조미료라고 해도 과용하지는 말아야 한다.
유기농 식품점에서 생강가루를 사다가 국이나 찌개에 살짝 뿌려본 적이 있는데 생강 특유의 맛과 향이 났다. 좀 비싸긴 하지만 인공 조미료 대용으로 괜찮을 것 같다.

요즘은 음식도 맛만 좋으면 되는 게 아니라 보기에도 좋아야 한다.
최근 이웃에 사는 여류화가에게서 동치미를 얻어먹은 적이 있는데 맛 이전에 총천연색인 빛깔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보랏빛 양배추로 담갔는데 국물까지 보랏빛이었다.
나는 유달리 동치미 국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맛도 만끽했지만 울긋불긋한 동치미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요리 미학(美學)의 진수를 경험했다고나 할까.

나도 요리할 때면 색깔에 신경을 쓴다.
나는 곰국에 꼭 파를 넣어 먹는데 파는 혀 못지않게 눈을 즐겁게 한다.
콩나물국을  다 끓인 다음에는 고춧가루를 살짝 뿌리고 파를 조금 썰어 넣는다. 그러면 콩나물 대가리의 노란색과 줄기의 흰색, 고춧가루의 붉은 색, 파의 푸른색이 잘 어울린다.
시각이 미각을 자극하는 순간이다.

스파게티를 만들 때도 색깔의 조화를 염두에 둔다.
소스로 흰 색의 크림소스를 정한 날에는 붉은 색 햄, 그리고 노란색 피망과 초록색 아스파라가스 같은 야채를 섞어 살짝 볶아준다. 맛뿐 아니라 때깔도 고운 스파게티가 완성된다. 아들은 스파게티를 가장 좋아한다. 피망이 꽤 비싼데도 내가 각종 요리에 애용하는 것은 빨강, 주황, 노랑, 초록 빛깔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요리의 또 한 가지 즐거움은 냄새이다.
내가 한창 저녁식사를 준비 중인데 아들 녀석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아빠, 오늘 저녁도 맛있겠다”라고 외친다.
시금치나물을 만들 때는 국간장과 소금, 깨소금과 참기름, 대파를 넣고 조물조물 무치는데 고소한 참기름 향기가 코를 찌른다.
나는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가 좋아, 미국에 이년 간 살 때도 이웃 눈치를 보치 않고 된장찌개를 즐겨 끓여 먹었다.
돼지고기를 구울 때는 청주를 가미해 냄새를 줄이고, 먹고 나서는 창문을 열어 환기하곤 한다.

요리의 즐거움 중에 청각적인 것도 있다고 하면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사람들은 폭포를 보면서도 신나하지만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시원함을 느낀다. 폭포의 물줄기를 보기만 하고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집에 앉아 사진으로 폭포를 감상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압력밥솥이 거친 숨을 푹푹 내 쉬고,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삼겹살이 지글지글 구워질 때 나는 즐겁다. 싹둑싹둑 칼질에 타닥타닥 도마질, 달그락달그락 그릇 소리는 ‘부엌의 합창곡’이다.

요리를 하다보면 손도 행복하다.
쌀을 씻을 때는 찬물에 손이 시원하고, 상추를 씻을 때는 상추의 속살이 보들보들하다.
행여나 그 연한 잎사귀가 물살에 찢길까 조심스럽다.
미역을 물에 담가 놓았다가 씻으면 미끈미끈하고, 생선 비늘은 까칠까칠하다.
물컹한 생오징어를 끓는 물에 살짝 데치면 색깔이 분홍빛으로 변하는데 만져보면 탱탱하고, 맛을 보면 쫄깃쫄깃하다. 
  
지금까지 요리의 다섯 가지 즐거움을 말했지만 실은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다.
내가 만든 요리를 먹는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는 즐거움이다.
그들에게서 “맛있다”는 소리를 들을 때 나는 으쓱해진다. 내 경우는 아내보다는 아들에게서 자주 칭찬을 듣는 편이다. 아내는 왠지 내 요리솜씨에 대해서만은 칭찬을 잘 하지 않는다.
그런 아내에게서 모처럼 칭찬을 들으면 내 기분은 하늘을 날아오른다.

요리는 예술이라고 한다.
요리 잘 하는 사람이 창의적(creative)이라는 말도 있다.
어떤 주부는 자녀들이 부엌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는데 잘못이다.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요리를 가르쳐야 한다. 특히 아들들이 요리를 배울 필요가 있다.
어느 집에 초청받아 갔는데 엄마와 아들이 부엌에서 함께 요리하는 풍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나도 아들에게 가끔 요리를 가르치는데 그 녀석도 이제는 계란 스크램블을 비롯해서 요리를 제법 한다. 요리는 자라는 아이들의 심성을 순화하고, 가정의 더 큰 평화를 약속할 것임에 틀림없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날마다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에 열중하는 가정이 어찌 평화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리는 맛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그 의미는 맛을 훨씬 능가한다.
프랑스 요리를 주제로 한 최신 영화 <줄리와 줄리아>(Julie & Julia)는 연기파 배우 메릴 스트립(줄리아 역)의 능청스런 연기 못지않게 그 메시지가 인상적이다.
이 영화에서 줄리아의 자칭 후계자인 젊은 주부 줄리는 1년 동안 매일 저녁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요리일기를 올리면서 “요리가 나를 살려줬다”(It saved me), “요리에서 나는 큰 위안을 받는다”(It's such a comfort)고 말한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요리는 평안이며 위로이며 구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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