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격랑속으로 ⑨

     한동안 종적을 감췄던 이충구가 나타난 것은 10월 초였다.
    놀란 내 팔을 쥔 이충구가 복도 끝의 한적한 곳으로 끌고가더니 굳어진 얼굴로 말한다.

    「이형, 만일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 가족을 부탁하오.」

    난데없는 말이었지만 이유를 물을 수는 없다.
    뻔한 사유를 묻는다면 모욕이 될 수도 있다.
    대신 나는 길게 숨을 뱉았다.

    이충구는 애국지사다.
    두달 전 민비가 시해되었을 때 기필코 원한을 갚는다고 했지 않은가?

    그때 이충구가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형, 훗날을 부탁하오.」
    그리고는 몸을 돌려 걷는데 두 다리가 허공에서 누가 당기는 것처럼 허청거린다.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충구의 가족을 보호하겠는가?
    이충구만큼 내 형편을 아는 인간도 없다.
    나는 이충구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주시했다.
    그렇다.
    이충구는 누군가에게 뭔가 한마디라도 남기고 싶었으리라.
    내가 그 입장이 되었어도 그리했겠다.

    문득 눈이 뜨거워졌으므로 서둘러 발을 뗀 내가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지만 이충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와 섰다.

    머리를 든 나는 노블 박사를 보았다.
    「리, 이충구를 만났소?」
    노블이 낮게 묻는다.
    아마 노블도 학당에 들어온 이충구를 보았으리라.

    머리만 끄덕인 내게 노블이 말을 잇는다.
    「임금을 어디로 옮길 것 같소.」
    「그게 무슨 말이오?」
    놀란 내가 영어로 묻자 노블이 주위를 둘러보고나서 목소리를 낮춘다.

    「피신시킬 것 같단 말이오.」
    「피신시키다니.」
    해놓고 내가 곹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직까지 임금은 조선의 심장이나 같다.
    굶주리고 병들고 온갖 착취에 시달리면서도 백성들은 임금을 공경한다.
    참으로 순박한 백성이다.

    목이 메인 내가 헛기침을 하고나서 물었다.
    「어디로 말씀입니까?」
    「그건 모르겠소. 어쨌든 곧 정변이 일어날 것 같으니 리는 경거망동 하지 마시기 바라오.」

    임금을 피신시킨다는 것은 곧 일본의 세력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이다.
    임금이 궁을 떠나 어디로 간단 말인가?

    기가 막히는 이 거사에 이충구가 참가했다.

    머리를 든 내가 노블에게 말했다.
    「이미 조선 땅은 격랑속으로 휩쓸려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머리를 저어보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노블은 알 것이다.
    나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영어를 배웠으며 제중원의 여의사에게 조선어를 가르쳐 가계를 도왔고 서양 문물을 습득했다. 내가 말을 이었다.

    「나는 부패한 관리나 굶주림과 질병, 노역에 시달리는 고통이 가장 큰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목이 메인 내가 잠깐 외면했다가 노블을 보았다.

    「강대국의 압박을 받는 약소국의 서러움이 이토록 처절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는 노블이 외면했다. 과연 임금이 미국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한다고 해서 이 난국이 평정될 것인가?
    기세충천한 일본이 가만 보고만 있겠는가?
    우리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