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격랑속으로 ⑧

     「민주주의는 의회주의요, 의회주의란 각 고을에서 백성들이 뜻이 맞는 인물을 선거로 뽑아 국회로 보냅니다. 국회는 국가를 운영하는 법을 만드는 곳이지요. 백성들의 뜻에 맞는 법을 만든단말이요. 그러니 백성들은 불평이 있을 수가 없지요. 그들이 뽑은 인물들에게 국가 운영을 맡긴 것이니까요.」
    에비슨(Oliver R. Avison)이 조선어로 또박 또박 말했다.
    나는 에비슨한테 영어로 말을 하고 에비슨은 조선어를 쓴다.

    내가 물었다.
    「그 국회로 보내는 인물은 어떤 이들이 선거에 나옵니까?」
    해놓고 에비슨이 알아듣지 못했을 것 같아서 덧붙였다.
    「빈부, 귀천, 노소에 차별은 없습니까?」

    「없소.」
    머리를 저은 에비슨이 두손을 모았다가 풀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생명이며 인격체요, 차별이 없소.」

    「도적놈이 백성들을 속이고 국회로 나갈 수도 있겠소.」
    「그렇지요.」
    에비슨이 선선히 긍정 했으므로 내가 긴장했다.

    제중원 뒤쪽에 위치한 에비슨 의사의 저택 안이다.
    나는 자주 이곳에 들려 에비슨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영어 회화 공부보다 미국의 문화, 정치, 사회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내 회화 실력이 늘어날수록 이야기는 진지해졌고 재미가 솟아났다.
    또한 그만큼 현실과의 괴리감에 답답해지기도 한다.

    에비슨은 2년전인 고종 30년(1893)에 조선 땅을 밟았는데
    가끔 왕실에 들어가 진료를 하기도 한다.

    그때 내 표정을 본 에비슨이 쓴웃음을 짓는다.
    「허나 끝까지 속일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곧 국회 안에서 제명을 당하거나 다음 선거에 나올수가 없게 되지요. 몇 년에 한번씩 다시 선거를 하니까요.」

    「옳지.」
    「어제 왕실에 갔더니 임금께서 기력을 잃고 계셨소.」
    에비슨이 화제를 돌렸다.

    국모 민비가 시해된지 20여일이 지났다.
    민심은 갈수록 흉흉해졌지만 왕은 일본의 압력을 받고있는 상태에서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민비 시해 직전에 조직된 친일 김홍집 내각은 일본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에비슨이 말을 잇는다.
    「격변기요. 이공도 처신에 조심하셔야 하오.」
    요즘 이충구가 보이지 않는 것도 에비슨을 자극 했으리라.

    이충구는 친러, 또는 친미파에 가깝다.
    이충구와 친한 나도 그런 오해를 받을 것이다.

    쓴웃음을 지은 내가 에비슨을 보았다.
    「닥터, 나는 개혁에는 동감하고 있지만 그 어느파에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휩쓸릴 수도 있소.」
    에비슨의 얼굴에는 진심이 베어나 있었으므로 나는 머리를 숙였다.

    이들은 나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공화정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스승이다.
    나는 영어를 배우려고 배재학당에 들어왔으나 영어를 통해 새 세상을 알았다.
    개안(開眼)이 된 것이나 같다.

    심호흡을 하고난 내가 입을 열었다.
    「조선은 변해야 됩니다.」
    에비슨이 잠자코 눈만 껌벅였고 나는 말을 잇는다.

    「나는 청이 일본에게 패한 후에 밥상 위의 고기처럼 열강에 의해 찢기는 것을 보고 약육강식의 세상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길게 숨을 뱉았다.
    가슴이 미어졌기 때문이다.
    어찌해야 될 것인가?
    문득 죽어가는 짐승에게 달려드는 개떼들이 눈 앞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