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어머니의 나라에서 노래 부를 수 있게 돼서 기쁩니다.”
    12년만이다.
    1998년 한국 무대에서 최초로 일본어로 노래를 불러 화제를 모았던 사와 도모에(澤知惠·39). 한일문화교류의 상징인 그녀가 1월의 마지막 날인 31일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 교회를 찾았다.

  • ▲ ⓒ 뉴데일리
    ▲ ⓒ 뉴데일리

    제암리 교회는 1919년 3.1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일본 헌병들이 신도 20여명을 교회 안에 가두고 불을 지르고 사격을 가해 순교하게 한 곳이다.
    공연 준비에 바쁜 그녀가 발길 닿기 어려운 제암리 교회를 찾은 것은 그만한 사연이 있다.

    시계바늘을 되돌려보자.
    일본 도쿄대(東京大) 법대를 나온 수재가 있었다. 사법시험 합격이 떼놓은 당상이던 이 수재가 어느 날인가 발길이 도쿄 인근 가와사키의 한 한국인 교회로 향했다. 한국과 달리 교회며 신도 수가 극히 적은 일본에서 그가 그날 한국인 교회로 향한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부름이었을지도 모른다.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를 듣던 그는 제암리 학살이라는 충격적인 사실(史實)을 처음 접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내 나라 일본이, 내 동족 일본인들이 한국에 그런 몹쓸 짓을 했구나.”
    그는 속죄의 심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해방 후 첫 일본인 한국 유학생 사와 마사히코가 그였다.
    연세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당시 학부생이던 김영씨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이 이날 제암리를 찾은 사와 도모에, 그녀다.
    “한국에서 살 때 아버지는 틈만 나면 저를 데리고 제암리 교회를 찾았어요. ‘가해자’인 일본의 목사로서 늘 속죄의 기도를 드리시곤 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와 제암리 교회를 찾으면 마을 어른들이 ‘사와 목사의 딸’이라며 반기고 안아주곤 했다”고 기억했다. 그녀는 이날 예배 뒤에 신자들의 양해를 얻어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다.
    “속죄의 마음으로 찬송가를 꼭 하나 부르고 싶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일본 가와사키에서 태어난 그녀는 두 살 때 한국 땅을 밟았다. 아버지가 한국 선교사로 파견되어서 였다.
    어머니가 일본사람과 결혼을 하자 딸과 인연을 끊었던 그녀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마음을 풀고 사위와 외손녀를 인정했다. 이렇게 매몰찼던 그녀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목근통신’으로 유명한 대표적 지일작가 김소운씨와 한국 민주화운동의 대모 김한림씨였다.
    행복했던 서울 수유리에서의 생활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끝났다.
    미국 프린스턴대 유학을 마친 아버지가 귀국 설교에서 민주화를 이야기하는 바람에 당시 유신정부로부터 강제 추방당한 것. 그녀는 “한국에 도착해 짐도 못 풀고 일본으로 쫓겨갔다”고 회고했다.

  • ▲ 'Who am I?(나는 누구일까요)' ⓒ 뉴데일리
    ▲ 'Who am I?(나는 누구일까요)' ⓒ 뉴데일리

    일본말을 모르는 채 간 아버지의 나라 일본은 썰렁했다.
    "가와사키에서 태어나 여기저기서 자라고 / 아침에는 낫토, 저녁에는 김치 / 나는 누구일까요. / 아버지는 고지식한 일본사람, 어머니는 고집쟁이 한국 여자 / 두 사람이 합쳐서 둘로 갈라놓은 나는 누구일까요."
    그녀의 노래 'Who am I?(나는 누구일까요)'는 그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웅변처럼 보여준다.
    일본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돼 아버지가 한참 나이에 세상을 뜨고, 어머니 김영 목사가 교회를 이어받아 목회를 꾸려갔다.

    그리고 그녀는 고등학교에 입학해 록그룹 밴드에 들어가 리드 싱어가 됐다. 고2때 암으로 돌아가시기 직전 아버지는 “네가 원하는 대로 음악을 하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래서 그녀는 도쿄예술대 음대에 진학했고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부르다가 음악 프로듀서의 눈에 띄어 가수가 됐다.
    그녀는 공중파 대신 일본 전국을 돌며 투어 콘서트를 여는 가수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매년 40여 차례 공연을 하는 그녀는 지난 1998년 일본 레코드대상 아시아음악상을 받기도 했다.
    또 지난 2000년엔 세계를 도는 ‘Peace Boat’의 초청으로 북한 평양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소년문화궁전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국어는 안 되고 꼭 일본어로 노래를 해야 한다고 북한 당국이 얘기한 게 기억납니다.”
    그녀는 “아마 노래의 전파력 때문에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로 노래를 하라고 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릅니다. 경제만 아니라 정치도 그랬지요. 하지만 저는 지난 10년간 뮤지션으로서의 자심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라이브만 고집하는 그녀는 전국 투어를 따라다니는 열성 팬도 많단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들려주면 눈물을 흘리는 일본 팬들이 많아요.”
    그녀가 부르는 ‘아침이슬’은 그녀가 편곡을 해 일본말로 부르는 노래. 하지만 그를 듣고 일본팬들은 눈물을 흘린단다. 암울했던 70년대 대학생들의 가슴을 달래주던 ‘아침이슬’을 일본인들은 어떤 감정으로 받아들일까. 이번 한국 공연에서도 그녀는 ‘아침이슬’을 부른다.

  • ▲ 사와 도모에 ⓒ 뉴데일리
    ▲ 사와 도모에 ⓒ 뉴데일리

    그녀가 가장 한국인들에게 들려주고픈 노래는 ‘마음(心)’이다.
    외할아버지 김소운씨가 한국 시를 일본에 알리기 위해 일본어로 번역한 것으로 김동명(金東鳴)의 시 ‘내 마음은’에 그녀가 곡을 붙였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는 가슴을 파고드는 노랫말에 일본인들이 큰 감동을 느끼는 노래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2일 오후 8시 홍대상상마당 라이브홀, 3일 오후 7시30분 연세대 백주년기념관 콘서트홀, 5일엔 부산시민회관 소극장에서 공연을 갖는다.
    “일본국제교류기금에서 제안이 왔을 때 선뜻 서울과 부산에서 공연을 갖겠다고 대답했어요. 서울 특히 연세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을 키워나간 곳이고 부산은 외할아버지 고향입니다. 부산에 가면 영도에 있다는 외할아버지의 시비(詩碑)를 꼭 찾아갈 거예요.”
    그녀는 마냥 설레는 표정이었다.
    “올해가 한일병탄 100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100년을 다짐하는 해였으면 합니다. 서로 마음을 여는 다정한 벗으로서의 새로운 100년을 여는 해였으면 해요.”
    그녀는 “서로의 마음을 여는 100년에 자신의 노래가 작은 기여를 할 수 있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