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뜬 눈으로 날을 밝힌 후 나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다. 더는 공안이 무섭지 않았다. 설사 잡힌다 해도 친구와 똑같은 선택을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때의 충격은 나에게 삶이란 매 순간이 기적이고 생명의 도전임을 느끼게 했다.

    북경으로 가자! 나는 일어섰다. 자살했다는 광용의 말은 친구가 그렇듯 자살하고 싶을 만큼 괴로운 처지이리라. 내가 빨리 가야 한국 정부의 도움으로 그를 구출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광용의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그렇게 가는 길이 곧 친구의 한을 갚는 복수가 될 것 같았다.

    하여 나는 북경으로 가는 차비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머리를 싸쥐고 고민했다. 도둑질을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일요일을 기다려 서탑교회 앞에서 동냥하는 것은 더욱 싫었다. 나는 이 수기를 쓰는 기회에 심양 서탑의 경회루 사장님께 사죄를 하고 싶다. 이유야 어쨌든 나는 그 분께 사기를 쳤다. 구차한 변명이겠지만 그때 나의 처지에선 한글 간판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그래서 경회루로 찾아들어간 것이다.

    "사장 좀 불러주세요" 나는 구걸이 아니라 빚 받으러 온 사람처럼 당당하게 사장을 찾았다. 잠시 후 나타난 40대 중반의 남성은 세무조사라도 나온 중국 공무원 같은 내 폼을 살피더니 직원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차 두잔!" 직원이 차를 놓고 가기를 기다렸던 나는 입을 열었다. "전 북한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다시 소리쳤다. "여기 밥 가져와!" 나는 사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 요리 냄새에 창자가 끓었지만 그 말에 발끈하는 척했다. "나는 밥 먹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말씀 드릴게 있어서 왔을 뿐입니다." 사장은 나를 뚫어지게 보더니 이번에도 역시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밥 취소! 가져오지 마!" 나는 순간 오늘 굶겠구나 하고 속으로 탄식했다.

    "혹시 ○○○ 기업을 아십니까?" "그 기업이라면 우리 한국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근데 무슨 일로?" "그럼 그 회사 ○○○ 회장님도 아십니까?" "내가 어떻게 그런 분을 알겠소. 도체 뭘 물어 보려고?" 나는 그 회장의 프로필을 알고 있었다. 북한에 있을 때 남한의 유명기업들을 대북사업으로 유도하기 위해 통전부가 작성했던 CFO들의 개인 자료들을 열람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통전부의 그 자료들을 토대로 나는 탈북자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알 수 없을 만큼 ○○○ 기업 회장의 친인척관계와 알려지지 않은 약간의 가족 갈등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끝으로 중국 한인회 회장과 안면 정도는 있는 것 같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러고 나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그 분 조카입니다." 사장은 차를 마시다 힐끔 쳐다보았다. "큰 아버지가 지금 미국 갔는데 저의 탈북을 알고 모레 당장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근데 나는 친구가 북경에서 기다리는 관계로 더 못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단순히 동냥이나 하러 왔으면 그 이상 요구했겠지만 난 지금 차비만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꼭 갚겠습니다. 그 이상으로"

    아마 경회루 사장님은 속으로 코웃음 쳤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를 대단한 사기꾼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도 몰랐던 ○○○ 기업 회장의 흥미진진한 직계 일화까지 주워섬기는 것을 보고 정말 조카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경회루 사장님은 북경까지 250원 정도 소요될 것이라며 선뜻 내주셨다. 아직까지 중국에 가지 못한 이유로 나는 그 분께 빚을 졌다. 훗날 심양에 가면 꼭 사장님을 만나 뵙고 용서를 빌고 싶다. 내 믿음으로는 웃으며 이해해주실 그런 분이시다.

    나는 그렇게 북경으로 갈 수 있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 터미널 근처에서 한국의 대표언론사의 신문을 샀다. 남이 보면 한국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북경으로 가면 어떻게 대사관이나 영사관으로 들어갈지 고민해보았다.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심양도 서탑을 벗어나면 힘든데 북경은 더 할 것이다. 아니 북경도 서탑처럼 한국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 쪽부터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하며 신문을 펼쳤다. 가보고 싶은 한국이어서 점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보게 됐다. 그런데 한 장 두 장 펼치던 나의 눈에 갑자기 불꽃이 튀었다. 한 쪽 작은 구석에 그 신문사 전화번호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을 모으기 위해 눈을 감았다. 북한 노동신문 같은 경우 중국 주재 특파기자 세 명 중 두 명은 단순히 기자가 아니라 대남공작부서와 국가보위부의 스파이다. 한국은 사기업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특파기자의 업무 특성상 한국 국정원과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바로 이것이다! 특파기자를 찾자! 나는 무릎을 쳤다. 버스에 내리기 바쁘게 전화박스를 찾았다.

    신문에 적혀있는 번호를 돌리는 동안 한국 영사관처럼 거절하면 어쩌나 싶어 두근거렸다. "여보세요" 아가씨 목소리였다. "안녕하십니까. 제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저는 북한 중앙기관에서 근무하다 며칠 전에 탈출한 사람입니다. 저는 한국행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네 신문사에 특종을 제보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습니다." "잠시만요" 아가씨의 목소리가 나보다 더 다급해보였다. 잠시 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반갑습니다. 우선 자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줄 수 있습니까?" "나는 전화를 오래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쫒기는 몸입니다. 그러니 당신네 신문사 북경 주재 특파기자 전화번호를 알려주십시오, 도청될 우려가 있으니 반드시 그의 개인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십시오." "네 네, 알려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그가 알려준 번호를 즉석에서 다시 돌렸다. 훗날 특파기자는 나와 만난 자리에서 자기 핸드폰으로 탈북자가 전화 올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그 쪽 본사는 왜 그 정도로 멍청하냐고 웃으며 농담했지만 그때의 나에겐 그 전화번호가 운명적인 행운이었다.

    "여보세요" 특파기자 핸드폰은 세 번째 시도 끝에야 연결됐다. 나는 그 동안에 내가 한국 영사관과 통화할 때 어떤 점이 실책이었는가를 생각해 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단순히 탈북자의 한국행 소원보다도 내가 누구이고, 어떤 정보가 있으며, 그래서 한국에 어떻게 필요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상대방에게 정확히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것도 단 한번 주어진 통화 기회에! 가장 분명하게!

    "저는 통전부에서 근무했던 사람입니다." 이 말로부터 시작한 나는 논리정연하게 탈북동기와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현 처지를 이야기했다. 마지막엔 국정원과 연결시켜줄 것을 희망한다는 말로 끝맺었다.

    그 분은 오랜 특파기자 경험이 있는지 아주 냉철했다. "제가 국정원을 모르죠, 알 수도 없죠. 하지만 내가 아는 다른 사람에게 말해보겠으니 십분 후에 다시 전화 걸어보십시오" 나는 정확히 십분 후에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다른 번호를 알려주며 지금 그 분이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하면서도 혹시 날 피하려고 이러는 것이 아닌가 싶어 차마 전화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알려준 다른 번호는 신호음이 한 번 울리기 바쁘게 반색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북한에서"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정말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은 내 말을 서둘러 막으며 이야기했는데 그 내용들이 날 놀라게 했다. 그는 내가 친구와 함께 언제 탈북했으며 살인자로 수배되고 있다는 것, 공안은 물론 중국 국가안전국에서도 쫒고 있다는 것과 북한 대사관으로 어제 북한 국가보위부가 나왔다는 것까지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지금 친구랑 같이 있지요?" 친구와 헤어졌다는 나의 대답에 침묵을 지키던 그는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 신분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신분증이 있지요?" "네, 그건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갖고 있습니다." "알았습니다. 당신만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친구는 훗날 찾기로 하고, 그러니 그 자리에서 절대 떠나지 마세요. 우리가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그 다음 과정부터는 나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내가 더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고마운 손길들의 보호로 안정을 보장 받은 그 나날에도 나는 폭풍의 공포에서 고요의 공포에 떨었다는 것이다. 내가 미처 몰랐던 중국 국가안전국의 추격과 나를 체포하기 위해 별도로 북경까지 파견된 국가보위부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실제로 탈북 전 업무차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에 들렸던 평양출신 한 고위 탈북자는 내 사진을 들고 온 국가보위부 사람들과 대화 한 적도 있었다. 그 자리서 북한 보위부 사람들은 한 놈은 잡았으니 나만 무조건 잡아 들어가면 된다고 했고, 북한 대사는 이 넓은 중국 땅에서 어떻게 찾냐고 푸념했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에 호혜일이란 이름으로 '북한요지경' 책을 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전해주던 그 끔찍한 말들이 서울 생활 5년 동안 꿈에서 자꾸 들리기도 했다.

    나는 북경 주재 영사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도 혹시나 이 차가 북한 대사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부들부들 떨었다. 얼마 후 양 옆에 바투 붙어 앉았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말했다. "장 선생님, 이젠 웃으세요, 머리를 들고 저기를 보세요, 태극기예요. 대한민국 국기예요"

    나는 그들이 가리키는 손끝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정말 파란 하늘을 뚫고 일어 선 하얀 태극기가 있었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는데 울음부터 쏟아져 나왔다. 진정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그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때는 내가 참아야 될 눈물이 아니었다. 눈물이 참아주고 다독여 주어야 할 나였다. 내가 믿어지지 않아서 울었고 함께 못 온 친구 얼굴이 떠올라서 또 울었다. 그때 천만마디 말로도 다 표현 못할 나의 격정을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에 담았다. 태극기를 보았을 때, 그 깃발을 알지도 못했지만, 그 땅을 보지도 못했지만, 자유와 민주도 몰랐지만 그 밑에 온 몸이 무너져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