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용의 전화를 받고나서 나는 서둘러 옷을 입었지만 이내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돈 한 푼도 없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땐 정말 노인네 집 머슴이라도 될 수 있다면! 눈 감고 이런 짧은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렇지! 눈이 번쩍 떠졌다. 창용 아저씨 밖에 없다. 그는 내 돈 700달러씩이나 받지 않았는가. 주었던 걸 돌려달라면 비열한 짓인 줄 알았지만 내 처지에 무슨 인격을 돌보겠는가? 나는 전화를 들었다.

    “광용이한데 전화번호를 알았는데요...창용아저씨 아직 안 들어왔어요?” “그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헤어진 거야?” 창용아저씨 처는 겁에 질려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그것을 안 그때의 나는 정말 몹쓸 인간이었다.

    “내 말 똑바로 들으세요. 내 친구는 돈 준 사실을 전혀 몰라요. 내가 준 돈이었거든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러나 만약(나는 여기서 힘을 주었다.) 내가 잡히는 경우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러니 내가 지금 당장 어디든 멀리 떠날 수 있게 광용이에게 전화해서 돈 100달러를 준다고 약속해요.”

    창용아저씨 처는 하늘에까지 맹세했다. 하여 나는 연길에서 신광용을 만나 300원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고(나머지는 만약 친구가 오면 주라고 남겨두었다.)심양으로 가는 버스에도 오를 수 있었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심양주재 한국 영사부가 있는데 거기를 걸쳐 한국 가는 탈북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버스에 올라 털썩 주저앉고 나니 너무도 엄청난 일들이 단 몇 초 사이에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에야 친구의 불행에 대해 돌이켜보게 되었다. 정말 잡혔을까? 잡혔다면 지금 그는? 그러나 나는 자신에게 놀랐다. 왜 친구잃은 슬픔보다 자신을 잃을 공포부터 앞세웠던가? 생사를 약속하고도 나는 왜 자결까지 결심했던 친구를 뒤에 두고 허겁지겁 달아날 궁리부터 했단 말인가? 비겁하고 치사하고 가증스러운 나! 나! 나! 이렇게 되 뇌이며 손톱으로 계속 내 살을 꼬집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용서가 안 되고 스스로에 대한 미움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광용의 말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의미해보고 싶어졌다. 창용아저씨가 공안에 불려갔다. 친구가 잡힌 것 같다. 이것이 전부일 뿐 확실한 근거는 없지 않은가. 아니 창용아저씨가 미워하던 그 중국여자가 신고하여 단순한 조사 차원일 수도 있지 않은가. 친구는 살아있으리라. 이 미련으로 마음을 다잡으니 박동소리가 약해지며 조금 편해진 듯싶었다.

    그것도 잠깐. 나는 이번엔 버스에 불안해졌다. 도 경계선은 물론 군을 하나하나 통과할 때마다 군인들이 올라와 통행증을 일일이 검열하는 북한처럼 이 버스가 검문소 앞에 멎으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6시간 넘게 달리는 동안 그렇게 나는 떨어야 했고 기도해야만 했다.

    마침내 야경이 넘치는 도시가 보였다. 그 화려한 중심으로 버스가 당당하게 질주할 때는 친구를 좀 더 기다렸을걸! 저 불빛들을 함께 볼 수 있다면! 하는 후회와 희망이 썰물과 밀물처럼 혈관 속으로 오고갔다. 버스가 멈추기 바쁘게 승객들 중 가장 먼저 내린 나의 눈에 거대한 시계가 보였다. 1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의 시간은 그 때뿐, 공안들이 또 서있는 광경에 나는 그만 기겁하여 몸을 숨겨 찾아 들어간 곳이 PC방이었다. 물론 알아서 거기 눌러 앉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 중 다행으로 한 구석 의자에 앉아 밤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누군가 심하게 흔들어 깨웠다.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니 핑크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여자가 비명 지르며 뒷걸음 치고 있었다. 내가 몸을 솟구칠 때 떨어뜨린 만두 세 개 때문이었다. 나에겐 목숨 같은 식량인 그 만두들을 똥처럼 혐오스럽게 보던 핑크머리가 줍고 있는 내 등에 대고 욕을 했다. 그때 만두를 집으며 나는 속으로 욕했다. “북한 같았으면 네 머리 꼴만으로도 개년 돼!” 나는 그 PC방을 나올 때 간판을 익혀두었다. 훗날에도 또 가리라, 물론 핑크머리년이 없는 곳으로!

    밝은 거리를 걷는 나는 연길에서와 달리 발걸음이 가벼웠다. 중국이 이렇게 생겼구나, 이런 곳이 외국이구나. 여권도 없는 공짜 관광이 흡족했다. 북한에서 볼 수 없는 광고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걷다나니 불안이 점점 일어섰다. 한글들이 슬슬 지워지더니 간판들이 모두가 중국어에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그 도시가 심양이 아닌 장춘이라는 곳을 알았을 때는 기가 막혔다. 심양은 또 어디란 말인가?

    나는 일단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곳부터 찾아가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간 곳이 “고향밥”이란 한글간판 음식점이었다. “심양 가려고 하는데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식당 아줌마는 골똘히 쳐다보더니 대답 대신 무언가 내밀었다. 한글로 된 관광 안내책자였다. 책이 그렇게 인간에게 필요한 물건인줄 그때 새삼 알았다. 그 책이 가리키는 곳으로 버스 터미널을 찾아갔고 그 책 덕에 “썬양”하고 입을 열어 티켓도 구매할 수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신광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소식 없어요? 창용아저씨는?” 광용은 달라진 것이 없다며 자기 사정을 더 길게 털어놓았다. 급하게 친구 집으로 짐을 옮기다나니 여간만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동안 나는 그가 잠시 미웠다. “내 친구가 꼭 전화 올 겁니다. 절대로 핸드폰을 꺼 놓지 말아요. 내가 지금 심양으로 가고 있으니 만약 친구가 오면 바로 출발하라고 해요”

    심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하마터면 환성을 지를 번했다. 관광안내 책자에 심양 주재 한국 영사관 전화번호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흥분됐다. 장춘 버스와 달리 심양버스는 느려 터진 것만 같아 발을 굴렀다. 빨리 가면 빨리 한국 갈 수 있는데… 심양에서 내리기 바쁘게 전화박스를 찾아 뛰었다. 두만강을 넘을 때부터 이렇게 줄곧 뛰었지만 언제 단 한 번 내 발이라고 느껴본 적 있었던가.

    전화박스 안에서 번호를 돌릴 때에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호음이 울리던 끝에 “여보세요”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숨이 컥 막혔다. “여보세요, 한국 영사관이지요?” “네, 누구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한국 영사관이 내 전화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도 격정이 끊어 올라 정신없이 이 말부터 마구 해댔다.

    “근데 누구세요?” 나는 크게 호흡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저 북한에서 왔습니다. 친구도 함께 왔습니다. 한국 가려고 합니다. 신분증도 가져왔고 정말 북한 사람 맞습니다.” 응답이 없었다. 기다렸지만 조용했다. 아니 전화가 끊어져 있었다. 망할 놈의 중국 전화! 나는 전화기를 주먹으로 쾅 쾅 쳤다. 고장 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뛰었다. 달리는 동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전화를 애타게 기다릴 한국 영사관 직원을 생각하니 그동안의 고생들이 한꺼번에 두 눈으로 주르르 흘러 내렸다.

    “여보세요” 다른 전화박스 안에서 이번엔 내가 먼저 불렀다. “네 누구세요?” “금방 전화했던 사람입니다. 한국 망명을 신청하려고 합니다. 신분증도 가져왔습니다. 공안이 우리를 살인자로 지목하고 수배하고 있습니다. 우린 절대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여보세요, 다 알겠는데 내 말 잘 들으세요, 이 전화가 그렇게 안전하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 말에 나는 사방을 황황히 둘러보았다. “여기 심양에서는 한국 가기 힘듭니다. 한국 갈려면 북경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찾아가십시오, 우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북경 대사관에는 어떻게 가는데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어요?” “그건 탈북자들이 다 알아서 들어가요. 그것까지 우리가 어떻게 알려줘요? 전화 오래 못해서 그러는데 이만 끊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그냥 들고 서있었다. 해외공관들의 전화가 주재국 정보기관들의 도청에 노출돼 있고, 그래서 혹시나 공안이 이쪽으로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떤 시련을 넘으며 왔는데? 설명을 잘 하지 못한 내 탓인 것만 같아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엔 받지조차 않았다. 마치도 그 침묵은 교회에서 중국인들이 우리를 쫒던 욕질 같았고 하루 밤만 재워달라고 애원하는 우리를 보고 쾅 닫아버리던 대문 같았다.

    대한민국이 이다지도 멀단 말인가? 대한민국이 우리 탈북자들을 구출할 권한이 이렇게까지 없었단 말인가? 전화박스 밖으로 나올 때 세상 끝으로 누가 날 밀어버리는 것만 같아 서러움이 확 북받쳤다. 스스로 알아서 가야 한다는 영사관 직원의 그 말에는 북한 주민인 내가 전혀 없었고 그래서 내 보기에도 나란 존재는 이국의 하늘 밑을 떠도는 작은 먼지 같았다.

    나는 그날 주머니에 남아있는 마지막 돈으로 술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먹다나니 연길에서 친구가 술을 사자고 말했던 그 상황이 그때가 아니라 지금 같았다. 친구가 그리워졌다. 제발 살아서 나에게로 와주었으면, 제발 내일은 그와 함께 새롭게 시작했으면.

    아파트 옥상 위에서 그렇게 자고 일어난 나는 아침이어도 갈 데가 딱히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친구의 칼이 생각났다. 아직도 친구는 칼을 가지고 있을까. 만약 정말로 공안에 잡혔다면 그 칼을 원했던 것처럼 사용했을까. 이 생각까지 이르고 나니 나는 어디든 가야겠다는 결심이 서게 됐다. 그렇다. 북경으로 가자. 남들도 알아서 간다는 길을 내가 왜 못 가겠는가. 가자고 온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살아오지 않았는가.

    나는 지붕 바닥 한쪽에 고여 있는 눈 녹은 물로 세수를 했고 옷도 툭툭 털었다. 그리고 시를 쓸 때와 같은 영감으로 사색했다. 사람도 땅도 모두 낯 설은 저 밑으로 내려가면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계단을 내려 현관까지 가는 동안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결론은 오직 하나였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말부터 통하는 조선족을 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중국말로 꽉 찬 이 심양에서! 그때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우선 조용한 골목길에 섰다. 그리고 행인들을 행해 조용히 불렀다. 남자가 지나가면 “아저씨!” 여자가 지나가면 “아가씨!”했다. 중국인이라면 그냥 지나갈 것이고 조선족이라면 틀림없이 반사적으로 돌아볼 것이리라.

    그렇게 한 시간 또 한 시간,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세끼를 굶은 이 채로 또 하루가 지나면 어쩌나. 그 조바심에 애가 타는데 그때 저만치서 26살 돼 보이는 여자가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앞에서 부르면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목소리에 반응하기 때문에 그 여자 등을 보일 때쯤 불러보았다.

    “아가씨!” 그러자 그 여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섰다. 그러더니 말했다. “저를 불렀습니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