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한국병탄과 이토의 속마음

    ‘보호정치’의 실패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5월 천황에게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천황은 일단 기각했으나 이토가 사의를 굽히지 않자 이를 받아들였다. 후임은 그가 추천한대로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가 임명됐다(1907.6.14). 출발 당시 품었던 큰 기대와 달리,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 통치는 실패로 끝났고, 좌절의 심정으로 통감직에서 물러났다. 

    이토의 통감정치를 곤궁한 지경으로 몰고 간 것은 고종의 강제 퇴위 후 행동으로 나타난 한국인의 저항이었다. 특히 ‘의병’의 도전은 결정적이었다. 이토를 위시한 통감부는 처음부터 의병투쟁을 과소평가했다. 의병의 저항은 일시적 현상이고, 또한 힘으로 평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의병과 일본군의 교전회수와 사상자가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이(15회 표 참고), 의병투쟁은 전국적 현상이었고, 1907년 이후 크게 늘어났다. 1909년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약화되는 현상을 보이기는 했으나, 병탄이 강행될 때까지 한국인의 의병투쟁은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의병 씨를 말려라" 마을 초토화 방화...살육작전

    일본은 무자비한 무력탄압으로 일관했다. 한국의 현상을 취재하기 위하여 당시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특파원 프레드릭 매켄지Frederick A. McKenzie)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측근은 무력탄압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지금 그들에게(의병) 일본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가를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동부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군을 거의 본적이 없거나 전혀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힘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강한가를 그들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현장에서 본 것은 마을을 완전히 초토화 시키는 방화였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살육이었다. 현장을 목도한 매켄지는 “이 때 뿌려진 증오의 씨앗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수세대가 지나야 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탄압을 위한 병력이 계속 증강됐다. 한국군 해산 직전에 증파된 12여단을 시작으로, 4개 중대의 기병대(1907년 9월), 2개 연대의 보병(1908년 5월)을 강화했고, 한국주둔군과는 별도로 2개 연대로 구성된 한국파견대를 창설(1909년 5월)했다. 이들에 의한 ‘무자비한 탄압’과 ‘살육’은 도처에서 계속됐다. 그러나 매켄지가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의병의 수는 날이 갈수록 증가” 했다.

    통감부는 무력탄압과 병행해서 강화되는 민중의 반일여론을 통제하기 위한 법도 새로 정비했다. 1907년 7월 신문지법을 시작으로, 보안법(7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9월), 신문지법을 더욱 강화한 개정법(1908년 4월), 학교령(9월) 등이 차례차례 제정됐다.

    "황제를 이용하자" 순종 동원해 전국 지방 순무여행

    순종의 지방순행
    무력탄압과 강력한 통제정책을 실시해도 한국 민중의 의병투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그리고 양민을 학살하는 일분군의 가혹하고 난폭한 행동이 점차 외국으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토는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을 두려워했다.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그는 순종을 이용하려고 했다. “민심의 일신을 꾀하기 위해 한국 황제의 지방 순행” 구상이 그것이다. 순행의 목적은, 이토가 가츠라 수상에게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 민중으로 하여금 모두가 일본을 신뢰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토는 이완용 수상에게 메이지 천황의 지방순행을 본받아 순종의 순행을 종용하고, 자신이 수행할 뜻을 밝혔다. 

    1909년 1월 4일 순종은 다음과 같은 조칙을 발표했다.
    “지방의 소란은 아직도 안정되지 않고 백성들의 곤란은 끝이 없으니 말을 하고 보니 다친 듯 가슴이 아프다. 더구나 이런 혹한을 만나 백성들의 곤궁함이 더 심하여질 것은 뻔한 일이니 어찌 한시인들 모르는 체하고 나 혼자 편안히 지낼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단연 분발하고 확고하게 결단하여 새해부터 우선 여러 유사(有司)들을 인솔하고 직접 국내를 순시하면서 지방의 형편을 시찰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보려고 한다. 짐의 태자태사(太子太師)이며 통감(統監)인 공작(公爵) 이토 히로부미가.....이번 짐의 행차에 특별히 배종할 것을 명하여 짐의 지방의 급한 일을 많이 돕게 해서 근본을 공고하게 하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여 난국을 빨리 수습하도록 기대하는 바이다”(<순종실록>).
    그리고 7일 서울을 출발하여 대구, 부산, 마산, 대구를 경유하여 13일 궁에 돌아왔다. 이어서 27일에는 서북부 순행 길에 올랐다. 평양, 의주, 정주, 평양, 황주, 개성을 거쳐 2월 3일에 서울에 돌아왔다. 순행의 분위기가 어떠했나는 <대한매일신문>의 논설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대한매일신문 "일본 공갈 심해도 일본기 걸지마라"

    "대왕대폐하께서 서도에 순행하시는데 지방 관리가.....태극국기 옆에 일본 국기를 함께 달라고 한번 말하고 두 번 말하며 말 할 때마다 크게 공갈하였으되....우리 대왕대폐하께서 지방에 순행하사 우리민정을 두루 살피시는 이때에 우리 백성은 당당히 우리 대한 국기만 달지니 아무리 관찰사의 영이 엄하고 (일본)순사의 공갈이 심할지라도 우리 대한국기 곁에 다른 나라 국기가 와서 걸림을 허락하지 아니하리라."(1909.2.7)

    순행은 이토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 효과는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했다.”
    황제의 권위를 이용한 순행 행사는 민심을 수습할 수 없었고, 의병투쟁을 전혀 진정시킬 수도 없었다. 이 때 이토는 이미 사임을 결심했다. 순종의 지방 순행을 끝낸 후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2월 17일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일본에 머무르면서 사임을 결정했다. 그해 5월이었다.

  • 순종을 수행하여 한국지방 순행을 끝내고 귀국하는 이토 히로부미.
    ▲ 순종을 수행하여 한국지방 순행을 끝내고 귀국하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수상-외상 3자밀담 "한국병합 만장일치"

    레이난사카(靈南坂)의 밀담
    이토의 사임이 확정되기 직전인 1909년 4월 10일 가츠라 수상과 고무라 외무대신은 레이난사카의 관저로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갔다. ‘합병 반대론자’로 알려진 이토의 진의를 파악하고, ‘한국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가츠라는 구라치 데츠기치(倉知鐵吉)가 작성한 ‘합병’ 방침을 설명했다. 이토의 전기 작가는 그날의 회담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09)4월 10일 양상(兩相, 가츠라 다로와 고무라 쥬타로)은 병합에 관하여 서로 협의하고, 당시 추밀원 의장의 관사에 있었던 공(公-이토 히로부미)을 방문했다. 그리고 한국의 현상에 비추어 장래를 내다 볼 때 한국을 병합하는 이외에 다른 계책이 없다는 사유를 설명했다. 처음에 양상은 공이 당당하게 반대 의견을 주장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에 대응할 많은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은 양상의 설명을 듣고, 예상 밖으로 병합에 이론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양상은 크게 기뻐하며 병합의 방침을 제시하고 협의했다. 공은 대강을 모두 시인했다. 다만 이로 인하여 중대한 외교문제가 야기되지 않도록 사전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뜻을 주의했을 뿐이다."(<伊藤博文傳>)

    이토, 질문 한마디 없이 즉석 동의

    그리고 고무라가 준비해 간 병탄의 ‘실행방침’을 보고, 고마츠 미도리(小松綠)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토는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질문도 없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옳다면서 모두 동의했다.” 가츠라와 고무라가 ‘환희의 실망’을 느낄 정도로 이토의 병탄지지는 간단하고 확실했다.

    이토는 이어서 4월 24일 가츠라가 회장으로 있는 동양협회가 주최하는 한국 진신단(搢神團)의 일본관광환영회에서 “종래 두 나라는 두 나라로써 존립을 같이 해왔고, 지금은 협동적인 관계에 있으나 한 걸음 더 나가 일가(一家)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개석상에서 “처음으로 한국병합에 대한 의향”을 밝혔다. 이토가 한국병탄에 동의하면서부터 정부의 병탄프로젝트는 신속히 가동하기 시작했다.

    3년반동안 "병합 안한다" 공언 되풀이

    이토 히로부미는 병탄을 반대했었나?

  • 일본 수상 가츠라 다로. 
    ▲ 일본 수상 가츠라 다로. 


    이토는 그가 사임을 결심할 때까지 공석이나 사석에서 한 번도 한국을 ‘병합’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차례 국내외적으로 일본은 한국을 ‘병합’할 의지도 없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이 보호정치를 하고 있는 이유는 오로지 한국을 부익(扶翼)하여 문명의 경지로 인도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한 연유로 그는 일본 정치권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합병 ‘반대론자’인 것처럼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이토는 처음부터 병탄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만 이를 밖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다.

    병탄주역의 한 사람인 고무라 외무대신은 이러한 이토의 내심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세상에서는 이토가 만년에 병합론에 찬성하였다고 추단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토의 가슴 속에는 의외로 일찍부터 병합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토가 신뢰하는 막료가 조기 병합의 급진론을 제시했을 때 이에 반대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유신원훈의 한사람이면서 이토의 1차 내각에서 농상무상을 역임한 다니 간쇼(谷干城)에 의하면 이토는 한국문제에 대해서 “치밀한 정견(定見)”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을 병탄해야 한다는 데는 야마가타와도 다를 바 없었다. 다시 고무라의 기록을 보자.
    “1909년 봄 이토가 오이소(大磯)의 별장에서 야마가타와 회견할 때, 한국의 장래에 대하여 야마가타의 일한일제론(日韓一帝論)에 대하여 이토는 그 실행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설명했다. 이 소식이 밖으로 전해지자, 야마가타의 병합론에 대하여 이토가 비병합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정계 일각에 전해졌다. 그러나 이는 이토가 비병합론을 주의(主義)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이를 결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깊이 우려했을 뿐이다.”(<小村外交>)

  • 일본 외상 고무라 주타로. 
    ▲ 일본 외상 고무라 주타로. 


    즉 병탄에는 두 사람이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나, 3년 반 통치를 담당했던 책임자로서 이를 실행함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을 뿐이다.

    3년 가까이 이토의 휘하에서 병탄운동을 전개했던 우치다 료헤이도 이토의 진의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통감 이토는 한국이 부강해지고 발전하면 독립하게 될 것이라고 늘 공언하지만, 한국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이토의 심중을 헤아리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이토의 통치 방법은 “한국의 군주와 백성의 음모가 나타나고 소요가 일어날 때마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한국인의 권리를 하나씩 삭제하고, 일본의 이익을 하나씩 확보하여 점차적으로 정치상의 실권을 빼앗고, 한국 왕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용의주도하고 신중한” 점진주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치다가 이토의 경질을 위한 캠페인을 전개한 것은 이토가 ‘비병합론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병탄 시기에 대해 견해를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병탄의 시기에 관해서는 우치다를 위시한 조기병탄론자의 견해에도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국내외적으로 1907년 말에 이르러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은 거의 제거됐다. 나라 안팎의 여건은 성숙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국내적으로는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일본의 전체적인 여론이 한국에 대해 더욱 강경한 정책을 요구했고, 원로와 내각 역시 강경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미국-영국-러시아 차례차례 "일본의 한국지배 인정"

    국제적으로는 1905년 7월의 태프트-카츠라 밀약에서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종주권을 확립하는 것”은 지극히 “논리적인 결과”라고 승인함으로써 일본의 한국 지배를 사실상 인정했다.
    1905년 8월 12일 런던에서 조인된 제2차 영․일동맹조약에서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상, 군사상 그리고 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소유하고 있고, 일본이 그 이익을 옹호하고 증진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지도, 감리 및 보호의 조치를 한국에서 집행할 수 있는 권리를 승인”함으로써 영국 또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사실상 승인했다.
    1907년 7월 30일 합의된 이즈볼스키․모토노(本野) 비밀협약에 러시아는 한국에서 수행되는 일본의 정책에 “방애(妨礙)하지 않는다”고 다시 확약함으로써 1905년에 조인된 포츠머스 조약을 재확인했다.
    이와 같이 강대국들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사실상’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기병탄론자들이 주장한 것과 같이 일본이 병탄을 강행한다 해도 국제적으로 큰 물의가 일어날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했다.

    노회한 정략가 "건축공사만 완벽하게...완공식은 후임자에게"

     빈틈없는 정치가인 이토가 물론 이와 같은 나라 안팎의 정세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우치다를 비롯한 조기병탄론자들이 병탄을 강력히 주장하던 1907년 이후에도 왜 이토는 병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을까? 통감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할 때까지 왜 이토는 일본의 병탄정책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았을까?  이토는 병탄반대론자였나? 우치다와 일진회를 중심으로 한 이토 경질 캠페인, 이완용과 송병준의 갈등, 1907년 이후 일본 정치권에서 강화된 통감정치에 대한 비난과 공격, 치열한 의병투쟁 등과 같은 이유가 작용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외부의 압력이나 여건 변화 때문에 사임하기에는 이토는 너무나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또한 정치적 책략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렇다면 왜일까? 물론 정확한 해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만 몇 가지 이유를  유추해 볼 수는 있다.

    만일의 국제간섭 우려...일본내 정치생명을 최우선으로
     
     첫째, 권한과 책임을 함께 가진 정책 결정자는 권한과 책임을 함께 지니지 않은 사람보다 더 신중할 수 밖에 없다. 정책 수립과 집행자로서 권한과 책임을 가진 이토가 아무런 책임도 없는 대륙낭인이나 ‘매국’에 앞장선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욱 신중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야마가타와 같은 정적이 도쿄에 도사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이토가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따르는 과감한 정책을 수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커다란 모험이었다.

     둘째, 비록 열강이 한국에서 일본의 ‘탁월’한 지위를 인정했으나, 이토는 열강의 개입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던 듯하다. 물론 이토도 일본이 한국을 병탄할 경우 삼국간섭과 같이 열강이 부정적으로 간섭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통감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한국을 병탄함에 있어서 열강의 움직임에 늘 주의해서 대처해야 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간섭의 쓰라린 외교적 실패를 체험한 이토는 열강으로부터 확고한 보장을 받은 후에 병탄을 실행하는 것을 한국정책의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겉으로 "한국 독립해야" 속으로는 "반드시 병탄해야"

     셋째, 이토는 처음부터 일본의 한국병탄을 공식적으로 부인했고, 또한 한국의 독립을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초대 통감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떠나기 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이토는 통감부의 근본이념과 기본정책 노선은 한국정부의 개혁을 돕고, 한국의 독립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또 정미7조약이 조인된 직후에도 이토는 일본은 한국을 병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언했다. 그리고 한국은 반드시 자치국이 되어야 하고, 이를 성취시키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기회 있을 때 마다 거듭 공언했다. 그는 때가 무르익으면 일본의 한국병탄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이토는 스스로가 거듭 부인해 온 병탄을 수행하는 장본인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고무라 주타로가 적절히 표현한 것과 같이 이토는 다만 “흉중의 계획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절묘한 사임'...결정되자 "병탄 지지" 공개 선언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토는 수완 있는 정치가였다는 점이다. 한국에서의 3년 반의 경험을 통하여, 일본은 한국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병탄을 성사시킬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필요한 모든 조건이 성숙되면 자신이 병탄정책을 수행하지 않아도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토는 1909년 초가 사임의 시기라고 판단했고, 병탄을 승인함으로서 그 책임을 후임자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므로 이토가 통감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한 것은 조기병탄론자와 대륙낭인의 비판이나 정부 내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신중히 계산하고 계획한 결과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이토의 전기 작가 고마츠 미도리가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토는 자신이 “통감직에서 물러날 시기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이토는 자신의 사임을 결정한 1909년 4월 이후부터 일본의 한국병탄 정책을 강력히 지지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