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에 들어가니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신광용의 처가 특별히 불고기상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우리는 더 할 말을 잃었다. 더욱이 친구가 자꾸 눈물을 흘리자 남자가 우는 것을 처음 봐서인지 광용의 처는 세운 두 무릎 안에 이마를 쑤셔 박고 있었다.

    고기가 까맣게 타자 광용이가 술병을 들었다. "자, 자, 남자들이 뭐 고만한 일을 가지고…그 배짱으로 탈북은 어떻게 했소?" 난 친구의 손에 술잔을 쥐어줬고 광용은 술을 채웠다. 우리는 연거푸 세 잔을 마셨다.  네 번째 잔을 비운 광용이가 말했다. "근데, 난 정말 이것만은 궁금한데 우리 처 같은 경우는 배고파서 왔어요. 쌀 가지고 다시 들어가겠다고 처음엔 난리쳤다니깐. 근데 당신들은 평양사람들이잖소, 내 보기엔 직업도 괜찮았던 것 같고, 살인할 사람들도 절대 아닌 것 같고, 탈북 한 이유, 그 이유가 도대체 뭐요?"

     "쾅!" 친구가 식탁을 내려친 주먹에 머리를 버쩍 쳐든 광용의 처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친구의 그런 눈빛과 목청이 처음이어서 특히 나의 놀램은 더 했다. "이유? 무슨 이유를 알고 싶은데? 북한에 무슨 이유가 있는데? 이유가 있어서 사람들이 굶어죽었냐고? 이유가 있어서 당에 충성했던 사람들이 숙청됐냐고? 그럼 김일성이 제 아들놈에게 권력을 준 이유가 뭔데? 김정일이가 계속 독재를 하는 이유가 뭔데?"

    그 말 앞에서 우리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다. 친구와 나만이 아니라 과연 모든 탈북자들에게 자신들의 탈북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가 어디 있으랴. 배고파서 살자고 왔든, 핍박으로부터 도망쳐왔든, 그 정권이 싫어서 버리고 왔든, 그것이 어떻게 자기 친부모형제들과 처자, 고향을 버리고 온 인간의 이유로 될 수 있는가. 그 모든 이유를 생각할 자유마저 철저히 박탈당한 몹쓸 나라가 아닌가!

    나는 그날 심화조에 의해 간첩혐의로 숙청된 친구의 장인에 대해서, 남한 서적들을 친구들에게 몰래 돌린 혐의로 국가보위부의 엄격한 조사를 받았던 자신에 대해서 신광용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온 밤 탈북동기를 말하고 나니 한국행 결심과 용기가 두만강 기슭에서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다음날 우리는 신광용과 작별했다. 우리가 친구의 친척집으로 접근할 것을 예상하고 공안과 북한 국가보위부 해외반탐과 시선이 연길에 집중됐으리라 판단해서였다. 속히 연길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탈북여성과 사는 신광용의 처지도 불안한데 우리까지 얹혀있을 순 없었다. 신광용은 한국 사람이 연락 올 수도 있으니 자주 통화를 하자며 자기 연락처를 주었다. 그리고 떠나는 내 손에 중국 돈 100원을 주었다. 그는 작은 돈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겐 천만금과도 같았다.

    훗날 처와 함께 한국 입국에 성공한 신광용을 만나 그 백 원에 대한 보답을 했더니 그는 그날의 우리보다 더 고마워했다. 그러한 인품을 만나지 못했다면 장담컨대 나는 한국으로 절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제도 서울 노원구에 사는 그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끔찍했던 탈북과정의 회고에 스스로 혀를 찼다.

    연길시를 벗어나 친구와 내가 밖에 나와 정처 없이 찾아다닌 곳은 십자가였다. 광용의 말에 의하면 성당이나 교회들에서 탈북자들에게 돈과 먹을 것을 주고 간혹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한국에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주의할 것은 배고파서 탈북한 사람들로 말해야지 살인자로 수배된 상황에서 자기 신분을 노출시킬 경우 신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목사나 선교사들 중 공안과 연결 된 사람들도 많으니 그 점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몇 번을 강조했다.

    우리는 돈과 먹을 것을 공짜로 주는 종교도 있다는 사실에 사람은 다 살게 돼 있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붕이 뾰족한 건물들과 십자가를 찾아 온 종일 헤맸지만 매 번 허사였다. 대부분 문이 잠겨있거나 건물을 지키는 노인들이 나와 개처럼 쫓았다. 북한에서 말하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김정일 민족이란 것이 이 정도로 형편없는 줄 몰랐다. 그때마다 친구와 나는 우리를, 아니 북한 주민들을 세상이 이렇듯 멸시하고 천시하게 만든 김정일 정권에 대해 치를 떨었다.

    그렇게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배는 고팠지만 워낙 밝은 낮을 무서워했기 때문인지 밤의 어둠 속으로 기분이 풍선처럼 둥 둥 떴다. 항상 숨어 살고 갇혀 살다 넓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이야기도 하며 나란히 걸으니 즐겁기까지 했다. 칼날 같은 눈바람이 무슨 대수이랴. 이대로 가다 벌판에서 쭈그리고 잔들 어떠랴, 우리는 이미 산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모진 생명들이 아닌가. 끝도 없이 무연한 중국의 농촌 길에서 우리는 밤하늘에 대고 와! 와! 고함치기도 했다.

    그날 밤 연길에서 멀리 떨어진 용정리 어느 집 소외양간에 나란히 누운 우리는 백 원을 들여다보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솔직히 300만 아사의 나라에서 왔지만 친구나 나는 배고픔이란 것을 남의 나라 일로만 여겼었다. 때로 지방 출장길에서 거리의 시체를 보면 왜 저 사람들에겐 먹을 것이 없었을까? 왜 사람이면서도 굶어 죽을까? 왜 훔쳐서도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생사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의문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그 백 원 앞에서는 우리 눈에도 사람이 가진 목숨의 한계란 것이 보였다. 당장 이 돈마저 없다면, 그래서 하루 이틀 먹지 못하고 방황하다보면 이렇게 굶어죽겠구나! 이렇게 초라해지겠구나! 하는 절망으로 초조해졌다.

    그러자 배고픔과 그 결말의 두려움이 육신을 파고들며 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전 같았으면 온 밤 못 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겠지만 그 날만은 공안의 추격 따위는! 하고 체념한 채 잠들고 말았다. 아마도 공안의 존재를 하얗게 잊어 본 것은 그 밤이 처음인 것 같다. 다음날 소 울음소리에 깨어난 우리는 돈 백 원이 품에 있음을 먼저 확인하고서야 자리 털고 일어났다.

    그러나 서로 마주보던 친구와 나는 소 외양간 밖으로 절대 나갈 수 없음을 알았다. 언젠가 창용아저씨가 말하던 방황자의 증표가 얼굴과 옷차림에 역력했던 것이다. 이 꼴로 그냥 밖으로 나가면 누구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배고픔도 잊고 도망치듯 가장 가까운 집 앞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노인 한 분이 나오셨는데 척 보기에도 우리 꼴이 탈북자 같았는지 바로 문을 닫을 기세였다. 나는 최대한 허리 깊이 숙여 인사했다.

     "할아버지, 세수 좀 하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문을 반쯤 닫던 노인은 무슨 영문인지 온 몸을 밖으로 내밀고 유심히 쳐다보았다. 우리 말을 못 알아듣는 중국인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노인이 "들어오소" 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노인은 큰 놋대야에 김이 물물 오르는 더운 물을 들고 나오셨다. 우리는 황급히 달려가 대야를 받아 마당 한 구석으로 가져갔다. 혹시 누가 볼세라 말이다. 먼저 씻으라고 서로 양보하던 우리를 지켜보시던 노인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강 넘어 왔소?" 우리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 "네" 노인은 머리를 끄덕이시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때껏 밥 달라고 문 두드리던 애들은 많이 봤어도 씻겠다는 사람은 자네들이 처음인 것 같소. 그래 끼니는 해결했소?" 우린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는 우리를 보던 노인은 "다 씻고 좀 들어오소"하는 말을 남기시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을 땐 노인이 부엌에서 밥을 푸는 중이었다. 그때의 밥 냄새를 나는 자부심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쌀밥 냄새를 맡고 있는 생존의 자부심이었고, 앞으로도 목숨이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의 자부심이었고, 세상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란 믿음의 자부심이었다.

    노인은 우리가 밥을 먹는 동안 오랜 중국 공산당원의 눈으로 본 김정일을 격앙된 어조로 저주하시였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인민 전체를 굶길 수 있냐며 배를 보니 양심도 없는 놈이라고 했다. 중학교 교사였다는 노인은 단둥과 신의주가 개방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하셨다. 우리는 북한이 절대 개방할 수 없는 체제의 속성을 장시간 설명해드렸다. 한동안 듣고 계시던 노인이 가까이 다가앉으시며 물었다.

    "말하는 걸 보니 자네들 배운 사람들 같은데 왜 떠돌아다니오?" 남한으로 가려고 한다는 친구의 대답에 노인은 자기가 잘 아는 한국 교회가 있으니 거기 목사를 만나면 성사될 것이라며 편지와 약도를 만들어 주셨다. 우리는 노인이 주신 편지를 한국으로 가는 여권마냥 소중히 품고 다시 연길로 들어갔다.

    정성껏 그려주신 약도 때문인지 시외버스 정류장들이 밀집된 연길시장 근처 '연길교회' 간판도 의외로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세 명의 중년 남성이 있었다. 그 중 안경 낀 사람이 우리를 먼저 보고 반색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목사를 만나고 싶어서요." 우리는 님 자를 말할 줄 모른다. 북한에서 님은 오직 김정일의 존칭어로만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에겐 목사가 목사님이 아니었다. "어디서 오셨는데요?'  "목사에게만 말할 수 있는데요"  "목사님은 지금 한국 들어가시고 없는데요. 내가 목사님을 대리하고 있으니 나에게 말해도 됩니다."

    우린 편지를 꺼냈다. 그가 편지를 읽는 동안 우리는 책상 위의 십자가와 성경책을 이상한 물건처럼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큰 목청이 울렸다. "탈북자야? 나가!" "?" "야, 이것들 내보내 탈북자야!" 나는 뜻밖의 상황에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앉아있던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우리를 방안에서 밀어내려고까지 했다. 그 기세에 문까지 힘없이 뒷걸음쳤을 때 갑자기 친구가 무릎을 끊었다. "우린 한국교회라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우린 한국에 갈려고 목숨 걸고 탈북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나가면 우린 죽습니다."

    안경 낀 사람이 악을 쓰며 소리 질렀다. "너희들 같은 놈들이 한둘이야? 우리 목사님이 너희들 때문에 공안에도 잡혀갔었어, 교회가 문 닫게 생겼어! 일어나서 안 나가? 안 나가!" 나는 억이 막혔다. 이것이 우리가 가려고 했던 대한민국이었단 말인가?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찾던 한 민족이었단 말인가? 친구의 머리까지 툭 툭 치는 그들의 행패를 보는 순간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안경 낀 사람의 면상을 후려치고 두 사람을 향해 옆에 있던 십자가를 흉기처럼 쳐들었다.

    "공안 불러! 전화해!" 욕이라도 후련히 하고 싶었지만 그 소리에 나와 친구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안이 따라 올 것만 같은 착각에 미친 듯이 교회 멀리 뛰고 또 뛰었다. 한국 입국 후 내가 한국기독교총연맹 세미나에서 그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그랬더니 모두 믿지를 않았다. 아마도 연길 현지 사람들일 것이라며 한국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 날의 우리에겐 그 교회가 난생 처음 가 본 한국 교회였고 그래서 그들도 한국인일 것이란 생각뿐이었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숨을 고르며 도망쳐 온 교회 쪽을 바라보던 그때 우리의 가슴은 먹먹하기만 했다. 방랑자의 희망이란 밟힐 때마다 소멸되는 것이다.

    주머니에 남아있던 교회 약도를 천천히 찢던 친구가 돈 십 원만 달라고 하였다. 이유를 묻자 오늘만은 술 한 병 사먹자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무시한 채 숨어서 잘 곳이나 찾자고 했더니 친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데? 대한민국? 우린 거기 절대 못가! 금방 보고도 모르겠냐? 저 사람들이 공안에 신고한다잖아! 너나 나나 이젠 어느 민족도 아니야, 그냥 사람 같은 사람일 뿐이라고!"

     난 아무 대꾸도 못했다. 우린 태어난 조국을 버렸는데 찾아가고 싶은 조국도 우리를 버린 것만 같아 육신만 있고 삶은 없는 자신들을 보는 듯해서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