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우치다 료헤이와 '反이토' 캠페인

     일본 정계-언론계 "특단조치 필요한 시기 다가온다"


    헤이그 사건이후 일본에서도 통감부의 유화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졌다. 겐요샤(玄洋社)나 고쿠류카이(黑龍會)와 같은 우익단체는 물론이고, 정계나 언론계에서도 이토의 점진정책을 우려하면서 ‘병탄’을 의미하는 보다 강력한 조치를 촉구했다. 정부를 이끌어 가고 있는 권력의 실세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원로), 가츠라 다로(수상), 데라우치 마사다케(육상), 고무라 쥬타로(외상) 등은 이토의 점진정책을 표면적으로는 지지했으나,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전반적인 사회분위기는 ‘병탄’의 길로 접어들었다. 각계에 흩어져 있는 이러한 우려와 비판과 반대를 하나로 묶어 한편으로는 ‘반(反)이토’ 캠페인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진회를 조정하면서 조기병탄의 분위기를 만들어 간 인물은 통감 이토의 촉탁 참모인 우치다 료헤이다. 

    1907년 7월 헤이그 사건의 결과로 새로 조인된 ‘정미7조약’은 우치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좀 더 강경한 조치를 기대했던 그의 표현에 의하면 새로운 조약은 1904년이나 1905년의 조약을 조금 더 확대한 것으로서 “요란한 빈 수레”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는 정책 결정자와 집행자가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간접적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비판했다.

    우치다 "통감부는 保身私利로 失政" 도쿄에 조치 촉구

    이토를 중심으로 한 통감부의 한국통치정책에 대한 우치다의 불만은 헤이그 사건 처리과정에서 움트기 시작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국익’을 늘 앞세우면서 활동해온 대륙낭인 우치다의 눈에 비친 통감부의 고위 관리들은 ‘국익’보다 ‘보신(保身)’과 ‘사리(私利)’에 더 밝았다. 통감부 관리들과 함께 1년 동안의 한국지배를 체험한 우치다는 크게 실망했다. 그에 의하면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정책 기조는 지나치게 유화적이고 점진주의적이었다. 일본주둔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생각이 짧고 정치적 두뇌가 없는 인물로서 “한인 잡배들에게 현혹되어 항상 추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경찰고문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는 “일한연방을 위해 활용해야만 할 일진회를 증오하여 그 세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통감부의 고위 관리들은 자신의 지위를 “축재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어 한국인들의 원성을 자초하고 있었다. 1907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우치다는 도쿄의 스기야마 시게마루에게 통감부 시책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견해를 전달했다. 또한 이와 같은 통감부 정책이 계속된다면 일본은 머지않은 장래에 수습하기 어려운 국면에 부딪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도쿄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일한연방의 급무”와 “통감부의 실정(失政)”을 사실 그대로 전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당부했다.

    도쿄의 스기야마도 우치다의 상황판단과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지난 3년간의 통치 실적에 비추어 볼 때, 스기야마도 이토가 한국문제를 종국적으로 해결하기에는 적절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이토의 “퇴임이 불가피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토의 퇴임을 위한 공작이 서울과 도쿄에서 진행됐다.

    야마가타, 政敵 이토의 귀국 반대...통감 경질 지연작전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러나 도쿄의 실권자들은 이토가 한국에 좀 더 오래 체류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정치적 라이벌 관계에 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원로 가운데 천황의 신임이 가장 두터운 이토 히로부미가 도쿄로 돌아와 다시 세이유카이(政友會)를 이끌고 직접 국내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야마가타도 이토가 한국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위해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에는 적절치 못한 인물이라는 것과, 또한 그가 한국에서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야마가타는 가능한 한 이토가 외국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이 자신과 자파의 세력 확장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아직 병탄을 단행하기에는 시기상조이고, 병탄을 위한 분위기가 좀 더 무르익을 때까지 이토가 한국에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토는 한국인의 저항의 대상이었다. 그는 을사강제조약을 강행했고, 통감정치의 주체이고, 고종을 퇴위시켰고, 정미7조약을 주도했고, 군대를 해산하는 등 한국의 외교와 국내정치를 강압한 장본인이고, 그래서 한국인의 저항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가 한국에 좀 더 머물러 있는 것이 병탄의 ‘구실’을 무르 익게 만들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의병’ 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던 1908년 말 이토는 통감 사임의 뜻을 밝혔으나, 야마가타 파에서 “적절한 인물을 찾기에 곤란”하다는 이유로 이토의 사임을 수용하지 않았다.

     병탄론자 야마가타 "종기가 충분히 곪을때까지 기다리자"

    야마가타는 공개적 병탄 지지자였다. 그러나 알려진 것처럼 결코 급진적 병탄론자는 아니었다. 병탄을 위한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지극히 현실론자였다. 헤이그 사태 직후 우치다 료헤이가 병탄 단행을 주장할 때, 야마가타는 한국문제를 종기(腫氣)에 비유하여 설명하면서, “종기는 충분히 곪은 뒤에 째서 농과 뿌리를 한 번에 짜내야지, 너무 일찍 손대면 덧나서 더욱 커지고, 너무 늦으면 문드러질 위험이 있다. 그 적시(適時)를 찾아내는 것이 명의(名醫)다”라고 설명하면서 서두르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는 이토가 통감직을 좀 더 수행하는 것이 ‘적시’를 앞당기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야마가타는 헤이그 밀사사건 후 한국정책을 결정하기 위하여 소집된 원로와 대신회의에서도 ‘즉각 병탄’을 단행하는 것을 반대한 인물이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낭인들 "한국 병합은 일본 國是...통감 갈아치워라"

    그러나 서울의 우치다 료헤이와 도쿄의 스기야마 시게마루를 중심으로 한 조기 병탄론자들은 여전히 이토 통감의 사직을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우치다는 도쿄의 실력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츠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다케 등에게도 비공개적인 사신과 보고서를 통하여 통감부의 한국 지배정책을 비판하고 통감 경질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토는 한국의 실상(實狀)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한국인의 국민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한국사회의 계급제도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우치다의 주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통감은 “주어진 기회를 충분히 활용치 못할 뿐만 아니라, 사상누각과 같이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정책을 수립하게 되고, 따라서 정책의 지속성과 신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통감 경질은 “필요불가결하고 화급한 대사(大事)”였다. 

    우치다와 의견을 같이하면서 “조선 문제 해결에 생애를 건” 스기야마 또한 이토의 사임을 촉구하고 나섰다. 스기야마에 의하면 일본의 ‘국시(國是)’는 그 세력을 중국대륙과 시베리아로 진출하는 것이고, 이는 한국이 ‘발받침[足場]’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스기야마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일로전쟁이 끝나면, 그 다음에는 일한병합이 예정된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이토는 이 ‘국시’를 적절히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기야마의 전기 작가에 의하면 그는 “1907년 11월 경성을 찾아가 이토에게 사임을 권유”했다고 한다.

    우치다, 이토 떠나 도쿄로...黑龍會 동원 이토 비판 캠페인

    1909년초 통감부 막료직에서 사임한 우치다는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보다 공개적이고 본격적으로 이토의 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1909년 1월 <한성사연(漢城私硏)>이라는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병탄 실현에 동조하고 있는 도쿄의 실력자인 야마가타, 가츠라, 데라우치, 고무라 주타로 외상, 그리고 요로의 중요한 인물들에게 전달했다. “국정이 잘못돼 가고 있는 것을 묵시(黙視)할 수 없어 통감부 개설 이래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정세를 분석”했다고 시작한 이 보고서에서 이토의 통감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리고 “하루 속히 한국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방침을 확립하고 실행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제시했다. 우치다가 뜻하는 당면한 가장 중요한 ‘근본방침’이라는 것은 이토 히로부미를 교체하고 병탄의 기본방침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우치다는 고쿠류카이를 동원하여 이토의 정책을 비판하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고쿠류카이는 한편으로는 회의 부설기관으로 조선문제동지회(朝鮮問題同志會)를 조직하여 조기병탄을 주장하는 강연회를 개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관지인 <黑龍>에 한국문제를 특집으로 꾸며 통감부의 통치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또한 고쿠류카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의원의 오가와 헤이키치(小川平吉), 오타케 간이치(大竹貫一) 의원 등을 통해서 정치권에서도 이토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한국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촉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이토 "나를 반대하는 저의 뭐냐?"  우치다 "일본 국시에 반하기때문"

    통감부 정책에 대한 우치다의 이와 같은 비판과 통감의 경질을 위한 그의 움직임을 이토가 결코 모를 리 없었다. 1909년 초 정무협의차 잠시 귀국한 이토는 우치다를 자신의 관사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는 우치다에게 “군은 통감정치에 반대의 뜻을 표시하고 이를 문서화하여 정부 요로에 돌리고 있다는 데 그 저의가 무엇인가” 하고 추궁했다. 이에 우치다는 정중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료헤이는 통감정치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통감정치가 제국의 국시에 반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어 저의 소신을 피력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일한합방은 일본 제국의 국시입니다....그러나 통감정치의 현상이 과연 국시를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료헤이는 다만 이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치다는 이미 이토의 통제권 밖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출신 다른 이완용-송병준, 세력 확대위해 일본 지지 쟁탈전

    이완용과 송병준의 알력
    우치다는 스기야마와 함께 통감의 경질을 위한 여러 형태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진회와 송병준을 조정하여 정적인 이완용과의 불화를 조장했다. 한국내각의 혼란을 조성하여 이토를 궁지로 몰려고 했다.
    출신 배경을 달리하는 이완용과 송병준은 처음부터 물과 기름처럼 융화할 수 없었다. 귀족배경을 지닌 이완용은 송병준의 입각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지지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일진회의 정계진출을 될 수 있는 대로 억제하려고 했다. 고종을 퇴위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송병준은 기회 있을 때 마다 일진회의 세력을 중앙과 지방 정계에서 확대해 나갔다. 통감정치체제 안에서도 이완용 파와 송병준 파는 세력 확장에 필요한 일본의 지지와 신임을 얻으려고 서로 경쟁했다. 주도권 장악을 위한 두 파의 갈등은 불가피했고, 시간이 갈수록 더 심화됐다. 이완용과 송병준은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나라를 파는’ 일에 서로 경쟁했고. 이토 히로부미와 우치다 료헤이는 이를 적절히 활용했다.

    불안한 이완용, 이토에게 송 제거 애원...우치다, 송 사퇴 지시

    고종의 퇴위와 ‘정미7조약’의 성사를 계기로 한국정부 안에서 송병준의 영향력이 확대됐고, 일진회의 진출도 눈에 띠게 드러났다. 또한 송병준과 이용구는 우치다와 스기야마를 통하여 도쿄의 실력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 세력을 과시했다. 이완용 파는 불안해했다. 송병준 파의 세력이 강해지면 질수록, 이완용 파의 세력이 축소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토가 1908년 7월 이후 사임을 구상하면서부터 일진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고, 이를 계기로 이완용 파가 다시 권력의 전면에 부상했다. 1909년 초 이완용은 송병준이나 일진회와 연합하여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이토에게 호소했고, 이토가 이를 받아들이자, 송병준은 우치다의 지시에 따라 내각에서 물러났다. 일진회의 세력도 크게 위축됐으나 내각 또한 불안정했다.

    송병준-이용구, 도쿄로 직행...일본 정부에 "한국병합 시급합니다"

  • 송병준(왼쪽)과 이용구.
    ▲ 송병준(왼쪽)과 이용구.


    1909년 2월 내각에서 물러난 송병준은 이용구와 함께 도쿄로 가서 그곳에서 이토 퇴임과 병탄 실행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우치다와 스기야마의 후원을 받아 야마가타, 가츠라, 데라우치를 찾아다니면서 신속한 한국 병탄을 촉구했다. 통감부의 외사국장이며 ‘병합준비위원회’의 한 사람이었던 고마츠 미도리(小松錄)의 회고록에 의하면 송병준은 가츠라에게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병탄을 촉구했다고 한다.

    송병준 "1억원이면 병합"  가츠라 총리 "비싸다, 반으로 깎자"

    “송병준은 도쿄에 도착하자 즉시 가츠라 총리대신을 면회하여 자신의 합방론을 제시했다. 그는 가츠라에게 “이토 통감은 결단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한합방의 실행은 진실로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청컨대 각하의 영단을 기다립니다”라고 병탄을 독촉했다. 가츠라 수상은 그에게 합방의 취지는 잘 알겠지만 실행이 대단히 어렵다고 말하자, 송병준은 “합방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일억 원(一億圓)만 있으면 간단히 실행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가츠라 수상은 “일억 원은 일본의 재산으로서는 대금(大金)이네, 너무 비싼 것 아닌가, 그 절반정도면 어떤가?”라고 값을 깎자, 송은 “아닙니다. 절대로 비싸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8천6백 방리(方里)의 면적과 2천만의 인구를 가지는 것이고, 그 위에 수십억이 될지 또는 수백억이 될지 알 수없는 부원(富源)을 지니고 있는 한국을 사는 대가로서는 턱없이 싼 값입니다.”(<朝鮮倂合之裏面>)

    훗날 실제로 한국병탄에 투입된 경비는 3천만원뿐

    그러나 가츠라가 실제로 병탄을 단행할 때 투입된 총 경비는 “송병준이 제시한 값의 3분의 1인 3천만 원”으로 충분했다.

    우치다나 송병준의 조기병합운동과는 별도로, 야마가타와 가츠라도 병탄의 ‘적시’가 무르익어 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준비가 필요했다. 가츠라는 외무대신 고무라에게 한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기본방침’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고무라 외상은 정무국장 구라치 데츠키치(倉知鐵吉)에게 자신의 복안을 설명해 주면서 안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수정에 수정을 거친 ‘기본방침’은 3월 30일 가츠라 수상에게 제출됐다. 근본방침의 핵심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을 실행”하는 것이다. 즉 “한국을 제국의 판도에 편입하고, 우리 천황 폐하가 그 통치권을 완전하게 장악” 한다는 방침을 확실히 했다.     

    1909년 5월 이토 히로부미가 3년 반의 통감직책에서 물러나는 것이 확정되자, 일본 정부 주도하의 한국병탄 프로젝트는 신속하게 추진됐다. 도쿄에 머물러 있던 송병준과 이용구는 우치다의 지시에 따라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병탄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업에 뛰어 들었다.